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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y 15. 2020

폐부를 찌르는 하이틴 스릴러 <인간 수업>

묵직하지만 정주행이 가능한 드라마


처음 인간 수업의 티저를 봤을 때는 '배틀 로열' 이 떠올랐다. 예고편이 임팩트가 컸고 잔인한 게임이 펼쳐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상 인간 수업 10화가 한꺼번에 넷플릭스에 떴을 때 고민했다. 잔인한 거 못 보는데 이를 견뎌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주변에서 대박이라는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인간 수업이 한국 콘텐츠 스트리밍 1위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1화 보기를 시도했고 그 자리에서 10화까지 정주행 했다.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았고 쌉싸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학원물을 좋아했던 이유는 결핍이 있는 인물들이 어떠한 사건이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뿌듯해서였는데 이번 드라마는 성장이 아닌 파멸로 귀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울림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엔딩이 잔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나서 이 드라마가 지니는 힘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인간 수업>은 작금의 'N번방 사태'를 연상케 하는 지점이 꽤 많다. 미성년자 성매매의 주체가 미성년이라는 점, 누군가에게는 돈벌이인 일이 누군가에게는 장난이라는 점에서 드라마는 N번방 사태와 흡사하다. 자신의 이중적인 생활이 발각되고 나서도 지수(김동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규리(박주현)를 보호하고 싶을 뿐이고 그녀에게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봐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규리(박주현)가 사업을 확장하자며 지수(김동희)에게 유도부 애들이나 엄마 회사의 남자 연습생을 성매매에 끌어들이자고 했을 때 지수(김동희)는 코웃음을 친다. 건장한 사내가 무슨 경호업체가 필요하냐고. 뼈 있는 대사는 왜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수(김동희)는 성매매 중개라는 나쁜 짓을 하면서도 누군가를 보호하고 도와주고 있다고 합리화하고 있었다. 지수(김동희)는 극 중에서 조건에 응했던 민희(정다빈)에게 자신이 범죄자임을 실토하지만 그 사과는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았다. 설령 사과가 진정성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지수(김동희)와 고층 계단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민희(정다빈)가 죽는 장면이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다.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학교에 소문이 났을 때도 의연하게 버틴 민희(정다빈)가 지수(김동희) 때문에 우연히 죽음에 이르는 대목은 '지수가 만든 성매매 중개 어플이 민희를 죽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즌2를 염두에 둔 탓인지 시즌1의 결말에도 규리(박주현)와 지수(김동희)가 잡혀가는 모습은 나오지 않고 그들의 흔적을 목도하는 형사 해경(김여진)의 모습만 나온다. 처연한 형사 해경의 표정이 압권이며 피투성이인 구석구석의 모습들은 너무나도 쓸쓸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잘못이 발각된 상황에서도 저 살겠다고 피를 흘리면서 달아나는 인간의 모습이라니 인간의 바닥은 어디까지인가. 과연 이들이 고등학생이라서, 미성년자라서, 아직 판단능력이 없는 미숙한 아이라는 이유로 죄가 경감되는 법의 울타리는 과연 울타리가 맞는가.



학생의 의무는 공부라고 여겨지는 우리나라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는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사랑받는다. 그렇게 타의 모범이 된다고 생기부에 적혀 있던 아이들이 저지른 행동은 일진 아이들의 담배 피우는 행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죄질이 나빴다. 드라마 제목처럼 학교 수업에서는 100점을 받는 아이들이 과연 인간 수업, 인간학에서는 100점을 받을지 의문이다. 시중의 인성검사가 훌륭한 인성을 담보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인간다운 인간을 가려낼 수 있는 검사가 개발된다면 스펙이 화려한 학생이 좋은 대학 혹은 좋은 기업에 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사슴같이 선한 얼굴을 지닌 지수(김동희)는 음성 변조를 통해 삼촌이라는 가면을 쓰고 명령을 내린다. 지수(김동희)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한 돈벌이 수단이지만 부족할 게 없는 규리(박주현)에게는 놀이 수단이다. 모든 게 다 들킨 상황에서도 규리(박주현)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외국에서 쉬다 올 생각을 한다. 담임 선생님 말씀처럼 지수(김동희)와 규리(박주현)는 비슷한 면이 있다. 타인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규리(박주현)에 비해 지수(김동희)는 그래도 애완동물이 다치는 것에 아파하며 규리(박주현)가 다 먹은 과자봉지를 접어서 간직할 정도로 순수한 면이 있긴 하다. 그러나 10화에서 짐을 급하게 싸는 와중에도 목표를 써 두었던 종이를 챙기는 지수(김동희)의 모습은 뜨악할 정도였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동아리에서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지만 그 사회 문제를 공감할 수 있는 가슴은 없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규리(박주현)는 이전에 자해한 적이 있고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는 냉담한 인물이다. 엘리트 부모의 기대와 그들의 압박감에 반항하는 수단으로 자해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드라마 <17세의 조건>의 주인공 안서연(박시은)이 떠올랐다. 지상파에서 이런 소재를 다루다니 하며 그 당시 꽤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던 드라마였는데 이 드라마는 심지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극 중 과외 선생님은 민재(윤찬영)의 성적이 오르자 선물로 조건만남을 주선하는데 그 상대로 나타난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안서연(박시은)이었던 것이다. 서연(박시은)의 엄마는 이혼 후 보란 듯이 딸을 잘 키워내기 위해 노력하는 극성 엄마다. 서연(박시은)은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방황을 하게 되고 조건만남을 하게 된다. 포주가 되는 규리(박주현)와 결은 다른 상황이지만 부모의 등쌀과 압박감 때문에 부모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원망과 증오를 각기 이상한 방법으로 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실제로 친구 중에는 엄마의 교육열과 간섭이 도가 지나쳐서 엄마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친구의 표현에 의하면 '숨 막힌다' 고 했고 엄마의 기대와 보상심리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물론 부모는 다 아이를 위해서겠지만 지나친 간섭은 아이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말았다. 물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고분고분한 친구들도 있다. 가정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모두가 다 성매매 중개 어플을 만들어서 손쉽게 돈을 벌려는 게 아니듯이 개개인의 성향은 너무나도 다르지만 부모의 역할과 가치관, 교육방식, 환경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분명하다.


시즌2에서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는지 모르겠으나 가정환경이 좋은 소시오패스 규리(박주현)는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고 미꾸라지처럼 무죄로 판명을 받을 확률이 크며 도박이 취미인 아버지를 둔 지수(김동희)는 아등바등 살아왔던 인생이 물거품이 되고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너무나도 불공평한 상황이지만 실제 사회는 극보다도 더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것들 투성이다. 드라마는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생각보다 드라마 구석구석에서 위트를 엿볼 수 있다. 규리와 지수의 미묘한 감정선 줄타기라든가 바나나 노래방에서 벌어지는 혈투신도 우스꽝스럽고 조폭 캐릭터도 허당기가 있다. 드라마가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했다면 10화 정주행을 단번에 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잔재미 덕분에 피식 웃었지만 매 회 마지막의 고지 때문에 매번 숙연해졌다. <인간 수업>의 매 회 끝자락에는 '청소년 상담전화 1388' 이 고지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을 알고 계신다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세요.라는 묵직한 멘트는 가슴을 울린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오갈 데 없이 방황하던 민희(정다빈)가 공황 장애인 자신의 처지를 알아봐주는 왕철(최민수) 주변을 맴도며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하듯 누군가가 대뜸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할 때 들어주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가슴 넓은 사회가 되길,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뱉지 못할 일들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상처 받고 다시 일어서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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