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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y 16. 2020

사경을 헤맸던 시간, 사냥의 시간

파수꾼 팬이 아쉬워서 쓰는 리뷰



감독의 전작도, 출연배우들도 너무 환상적이라 넷플릭스로 공개되기 전까지 엄청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포스터부터 제목까지 전작인 <파수꾼>을 능가하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그 날, 사냥의 시간을 본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물론 넷플릭스가 아닌 극장에서 보거나 VR 체험형 영화로 제작되었다면 마치 내가 이 상황을 체험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스릴이 넘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스릴을 스토리가 따라오지 못했다.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레버넌트'가 다소 지루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촬영한 덕분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사냥의 시간'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영화라기보다는 극한의 감정, 졸리는 감정을 체험해야 하는 영화에 가까웠다. 준석(이제훈)이 바에서 상수(박정민)에게 전화를 하는데 전화벨이 그 근처에서 울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해 놓고 일어나지 않아서 여러 번 심장을 부여잡았다. 빨간색을 기가 막히게 사용해서 거의 애니메이션 실사판 느낌도 들었으나 그 이상의 깊이와 울림이 없는 영화였다.


2011년 무렵 봤던 파수꾼의 경우, 어쩌다 친한 남자 셋의 관계가 흐트러졌으며 이유가 뭐였을까 하는 물음을 처음부터 던지기 때문에 추적해가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남자 셋의 미묘한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냈기에 파수꾼은 수작이 될 수 있었다. 9년 만에 나온 영화 <사냥의 시간>의 때깔은 <파수꾼>에 비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파수꾼보다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bgm 하나 없이 날 것 그대로의 사춘기를 담아냈던 파수꾼과 달리 사냥의 시간에서는 처음의 콘셉트만 강렬하고 마지막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쌍둥이는 썩소를 자아내게 한다. 화폐가 무용지물이 된 디스토피아 콘셉트 역시 외국 SF 어딘가에서 자주 등장하곤 하는 콘셉트며 사실 콘셉트야 자주 쓰이더라도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야기가 전혀 새롭지 않다.



불법 도박장에서 일하는 친구와 합작해서 금고를 턴다는 이야기는 도발적 사건이 되기에 충분했으나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사냥꾼으로 나오는 한(박해수)의 무자비한 성향은 처음부터 제시가 되어서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독 안에 든 쥐 격인 준석(이제훈),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을 왜 바로 죽이지 않고 피 말려 죽이듯이 괴롭히는지는 이해가 안 갔다. 차라리 셋 중 한 명이 자백을 한다거나 배신을 해서 사냥꾼인 한(박해수)이 이들을 쉽게 찾아내고 단서를 찾았다면 납득이라도 갔겠으나 한(박해수)은 총을 그리 맞아도 불사신처럼 죽지 않으며 총 맞은 채 물에 빠져도 살아남는 강철 로봇 같았다. 차라리 로봇이라는 반전이 있고 쌍둥이 형제가 실은 로봇을 개발했는데 로봇이 자신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되어서 로봇을 쫓아다니는 이야기라도 있었다면 강철 로봇에 버금가는 한 캐릭터가 이해가 갔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본 이야기라도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평을 받았을 것만 같은 비주얼은 굉장한 영화지만 스토리가 부실해서 때깔마저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은 무나도 안타깝다. 게다가 상영시간은 무려 134분이나 되는데 134분 동안 주인공들의 생사마저도 불확실하고 사냥꾼인 한(박해수)의 의도와 목적이 간파되지 않는다.



시간이 곧 돈인 SF 영화 '인 타임'의 경우 설정이 상당히 복잡하지만 109분이라는 시간 동안 구역별로 빈부격차가 나뉘는 이야기부터 러브라인까지 세세한 설정들이 촘촘히 박혀있어서 납득이 가능한 수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냥의 시간'의 경우, 친한 남자 친구들 셋이 지옥 같은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가느냐가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도적으로 행동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파수꾼처럼 친구들 관계에 집중했다면 준석(이제훈)의 출소 이후 '돈' 문제로 금이 가고도 남았을 세 사람의 위태위태한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인간의 탐욕에 대해 드러내거나 상수(박정민) 덕분에 금고털이에 성공하지만 돈 배분 과정에서 나오는 일그러진 인간의 물욕이 부각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전작 <파수꾼>을 보면서 먹먹해했던 팬으로서 이번 <사냥의 시간>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컸다.  스토리라인이 명확한 영화보다 인간 군상의 심리를 파고들어서 관계에서의 균열을 표현해내는 영화를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전작에서 심리 묘사를 탁월하게 그려내서 한동안 그 먹먹함에 잠기게 했던 감독의 장기가 이번에도 발휘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냥의 시간>에서도 전작 <파수꾼> 못지않은 '관계'의 균열, 봉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몽환적이라기에는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라기에는 디스토피아적 느낌이 강한 이도 저도 아닌 장르의 영화를 보고 말았다. 물론 나도 직접 만들라고 하면 때깔은 물론이거니와 엉성한 스토리라인으로 점철된 졸작을 만들는지도 모른다. 창작과 비평은 너무나도 다른 영역이지만 '사냥의 시간'을 보면서 사경을 헤매는 시간이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안타까워서 주절주절 댈 뿐이다. 윤성현 감독님,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파수꾼'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 주세요. 파수꾼 팬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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