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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y 10. 2020

나는 트로트 선곡을 시작했다.

7080 린이, 올드팝린이 탈피한 나, 지금은 트린이가 되었다.


"미쳤음.. 해킹당했다 ㄷㄷㄷ"


3년 전, 동생이 아이디가 해킹당했다며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영혼 빼고는 웬만한 것들을 다 공유하는 우리는 스트리밍 아이디를 공유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나 역시 선곡을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어젯밤 처음 알게 된 곡들로 빼곡했다. 내가 들은 줄도 모르고 빨리 비번을 바꾸어야 한다고 재촉한다는 동생에게 네가 들은 거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동생은 기겁을 하면서 내 취향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결국 내가 들었다고 실토했더니 동생은 뭉크 표정을 지닌 이모티콘을 보내며 폭소했다. 그때 들어보면 좋다고 권유했지만 철벽을 치며 트로트를 듣지 않던 동생이 요즘 들어서는 트로트 한 소절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는 지금은 알고리즘 추천 곡에 트로트가 떠도 해킹당했다며 난리 부르스를 뜨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 선곡의 시작은 2017년 여름 무렵이었다. 대중가요보다는 자기만의 색깔이 강한 뮤지션들을 좋아했던 나는 선곡표를 자유롭게 메워보라는 선배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정말 내 취향의 곡들로 빼곡히 매웠다. 물론 정말 난해하다고 생각했던 곡들은 제외했지만 그 선배 표현에 의하면 내 선곡표는 '13번 트랙' 천국이었다. 유명한 가수의 곡이기는 하나 가수마저도 잘 부르지 않아서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곡을 13번 트랙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가수의 타이틀곡보다 다른 곡들 중에서 보물 같은 곡을 발견하면 뿌듯해하는 사람이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진리는 이번에도 적용되었고 나는 다른 프로그램들의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선곡표를 하나둘 스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스캔을 한다고 해서 이런 흐름으로 이런 순서로 선곡을 하는구나 가 바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내가 맡은 첫 프로그램은 출근길 아침 프로그램이었다. 신나는 7080 히트곡을 주로 트는 게 선곡의 기조이긴 했으나 2시간 내내 방방 뛰는 곡을 틀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남녀 관계에도 밀당이 필요하듯이 선곡에도 밀당이 필요했다. 신나는 곡을 틀다가 잔잔한 곡을 틀다가 중간 템포의 곡을 틀다가 다시 신나는 곡을 틀면서 강강중강약 하면서 청취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야 했다. 7080 곡도 아직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배의 선곡을 관찰하며 벤치마킹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 선배가 7080 곡들 중 트로트를 하나둘 틀면서 분위기 전환을 할 때마다 청취자의 반응이 좋았던 기억 때문에 틀 만한 트로트를 찾다가 동생의 레이더에 걸리고 말았다. 방송 전에 짜 두었던 선곡표가 청취자의 신청곡이나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바뀌는 것조차 예상치 못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물론 이를 즐거움이라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으나 학습에도 계단 효과가 있듯이 어느 순간 껑충 나의 선곡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느꼈다. 7080 하면 유재하, 김광석을 떠올리는 게 다였던 나는 7080 곡들은 선곡하면서 62년생 아빠보다 7080 곡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첫사랑' 하면 볼 빨간 사춘기가 아닌 임현정을 떠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톤 체호프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빛을 발하듯 7080년에 태어난 곡들 중에도 진귀한 곡들이 많았다. 곡에 대한 스펙트럼이 넓지 않았던 중, 고등학생 시절에는 동방신기가 타이틀 곡으로 내건 '풍선' 이 다섯 손가락의 리메이크곡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린이날에 주로 들었던 이용복의 '어린 시절' 이 Clint Holmes의 Playground In My Mind 번안곡이며 그 시대에는 번안곡이 많이 불렸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어떤 감독의 영화가 좋으면 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서 그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보면서 가지치기하면서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혀갔듯이 선곡을 위한 음악공부를 할 때도 한 가수의 인생사를 들여다보며 가지치기를 해가다 보니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 7080 곡들은 웬만하면 같이 흥얼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를 되뇌면서 선곡 리듬과 성별 배분이라는 기본 룰을 지키면서 코너 내용에 맞게 선곡을 한 지 어느덧 3년째에 이르렀을 무렵, 처음에 내가 제출했던 선곡표가 얼마나 아찔한 선곡표였는지 와 닿았다. 싸이월드 bgm이야 내 취향대로 선곡해도 무방하지만 공공재인 전파에서는 트는 사람보다 다수의 듣는 사람의 귀에 익숙한 노래들을 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던 2017년의 여름의 나는 2019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타인의 선곡보다는 나만의 선곡 기조에 따라 움직이면서 선린이(선곡+어린이)의 태를 슬슬 벗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3번의 개편이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출근길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고 선곡의 흐름과 패턴에 익숙해져 갔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어가던 무렵, 나는 밤 10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고 또 다른 시작을 맞게 되었다. 이번에는 올드팝이었다. 영어보다는 국어를 더 잘해서 한글로 된 가사의 질감을 좋아하던 나는 최신 팝도 아닌 올드팝이라는 생경한 세계에 다시 발을 들여다 놓게 된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침 시간대에는 인터뷰가 많아서 곡수도 최대 10개였는데 낭만에 잠기고 싶어 하는 밤 프로의 경우 1시간에 많이 틀 경우에는 10곡을 트는 경우도 있었기에 곡수가 거의 2배 이상 증가해서 부담은 백배로 다가왔다. 다시 선린이(선곡+어린이)가 되었고 청취자가 나보다 올드팝을 더 많이 아는 상황을 하루빨리 역전시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래도 이전의 학습효과 덕분인지 처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부터 7080 팝송 자료들을 참고해가며 13번 트랙보다는 누구나 아는 명곡을 선곡했다. 그렇게 올드팝 초보티를 벗어나는 듯했으나 1년 후 다시 개편을 맞이하게 되었고 지금은 '트로트' 선곡을 하고 있다.



트로트 열풍 덕분에 이런저런 트로트를 주워들으면서 트로트 완전 초보는 아닌 상황이지만 7080을 선곡하거나 올드팝을 선곡할 때와는 여전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트로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곡만 바뀌었을 뿐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것은 똑같은 상황인데도 프로그램이 바뀌는 첫날에는 웬만해서 긴장을 잘 안 하는 나는 안절부절 못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다 못해 세 근 네 근 뛰어서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여전히 트로트는 내게 미지의 영역이지만 7080과 올드팝 때 그러했듯이 언젠가 트린이(트로트+어린이)를 탈피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시작은 늘 두렵고 긴장되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갈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에 설레기도 한다. 오늘도 새로운 문물에 철벽을 쳤던 흥선대원군의 마음이 아닌 온건 개화파의 마음으로 트로트를 플레이리스트에 하나 둘 추가해 본다.  새롭기 때문에 더 겸손할 수 있고 시작이기 때문에 더 낮은 자세와 넓은 마음으로 트로트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음에 감사하며 김태욱의 '내 사랑 트로트'를 틀어본다. 트로트가 7080과 올드팝만큼이나 익숙해지는 그 날을 기대하며 치어스! 살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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