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와 <헤어질 결심>, 줄 수 있는 권력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by 바나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흔한 경구입니다. 특히 연애시장에서 많이 들어본 말일 겁니다. 그런데 더 사랑하면 진다고요? 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가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일차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의 균형이 망가지기 때문일 겁니다. 생수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1L쯤 되는 생수 한 병을 500원 미만의 가격을 지불해서 얻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막에서 몹시 목마르고 허기진 사람에게 이 생수는 얼마의 가치로 책정될 수 있을까요? 몇 배, 몇십 배나 되는 가격을 기꺼이 내려고 하지 않을까요?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간절하기 때문에 많이 지불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받을 수 있는 몫은 적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게 이득이기 때문이죠. 저도 십대 시절 사랑에 빠졌을 때 제가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용을 쓴 기억이 있습니다. 연애는 그 사람과 저의 게임이었고, 저는 거기서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연락이 오면 얼른 대화에 응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20분 뒤에 답장한다든지, 일부러 시큰둥한 척을 한다든지… 밀당? 뭐 지금 생각해보면 마냥 웃기기만 한 수를 썼던 것 같군요.


하지만 주는 게 항상 나쁘기만 할까요? 재미있게도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주는 것을 자처하다 못해 재산을 거의 파괴하는 풍습 ‘포트래취’를 가진 콰키우틀족이 소개됩니다.


콰키우틀족에 한 추장이 있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이나 이웃 부락의 추장들로부터 받고 있는 존경의 정도로는 결코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기의 지위에 불안을 느꼈다. 그에게 붙여진 가문의 칭호들은 분명히 그의 조상들에게 속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았고, 새로운 추장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그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줘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런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규정된 행동양식은 포트래취를 열게 하는 것이다. (…) 포트래취의 목적은 주최자인 추장이 정말 추장에 오를 자격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초대받은 추장보다 더 신분이 높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자기가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증명해보이려고 주최자인 추장은 경쟁 상대자인 추장과 그의 부하들에게 다량의 귀중품들을 선사했다. 초대된 자들은 그 선물들을 얕보았고, 자기들의 추장이 주최자인 추장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더 귀하고 더 많은 양의 선물을 준비한 답례 포트래취를 열어 주최측을 초대하겠노라고 맹세했다. (p112)


포트래취는 콰키우틀족의 추장이 다른 부락의 추장들을 초대해서 선물을 돌리는 행사인데, 이를 통해 주최는 초대받은 추장보다 신분이 높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어떤 포트래취에서는 아예 귀중품들을 선물로 주는 대신에 불을 붙여서 소각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추장이 “내 축제에 참가한 부족을 위해 일 년 내내라도 이런 연기를 지펴 놓을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을 하면 손님들은 그걸 수치스럽게 여기며 방안 공기가 쌀쌀하다고 불평을 했다네요.


요지는 주는 행위는 그 사람의 권력을 입증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는 것이 손해라면, 주는 사람들은 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한 재력과 위엄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죠. 저는 박찬욱 감독의 두 영화(<박쥐>, <헤어질 결심>)에서 ‘주는 행위’가 권력의 지표로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박쥐>


거시적인 의미에서, 영화(를 포함한 거의 대다수의 서사 작품)에서 권력을 가진 것은 작품을 직접 이끌어 나가는 주역입니다. 작중 인물의 사회적 신분이나 마이너리티성과는 별개의 개념일 것 같네요. 설령 비천한 노예라는 설정을 가진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가 주인공이라면 더 많은 발화 기회와 분량, 주체성을 할애받으며, 서사의 전개는 그의 선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박쥐>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상은 왠지 김이 빠진다… 였습니다. 저는 폭력과 자극을 좋아하고 그게 예쁘면 더 맘에 들어하기 때문에… 박찬욱식 바로크 미학은 항상 호감에 속했는데, 도저히 재미가 없을 수 없는 소재로 싱거운 기분을 느낀 게 희한하더군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깨달은 건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아마 괴리감을 좀 느꼈던 것 같아요. 무슨 괴리감이냐면, <박쥐>의 태주(김옥빈 역)이 독보적인 존재감과 매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으로서 서사의 권력은 상현(송강호 역)이 지배하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박쥐>, 왜 줬다가 뺏어요?



영화 <박쥐>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상현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입니다. 그는 백신 개발 사업에 자원했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음에 이르게 됐는데,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받고 뱀파이어로 되살아납니다. 신도들은 돌아온 그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그는 자신이 밤마다 환자들의 피를 몰래 빨아먹는 괴물이 되었단 사실에 괴로워합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친구의 아내인 태주. 덜떨어진 남편과 엄한 시어머니의 수발을 드는 태주는 상현과 이끌리면서 그의 힘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도덕과 욕망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딜레마의 플롯입니다.



팜므파탈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파멸에 빠뜨리는 여성을 가리키는데, <박쥐>에서 태주는 상현에게 있어서 일종의 팜므파탈로 기능합니다. 상현은 태주의 남편을 죽이는 데 동조합니다. 여성 때문에 죄를 짓고 만 남성. 창세기부터 내려온 원죄 서사네요.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태주와 싸우는데, 그는 태주를 죽였다가 자신의 피를 먹여 뱀파이어로 다시 되살리는 걸 선택합니다. 상현은 외로웠고 태주를 잃고 싶지 않았거든요.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상현과 다르게 자신의 본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사냥하죠. 제지하는 상현에게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하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닭 잡아먹는 여우에 비유한 것치고는 생명유지 목적으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달리던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는 상현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집에서 가장 입지가 약했던 태주입니다. 비좁고 추레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죠. 뱀파이어가 되기 전, 새벽에 맨발로 동네를 달리는 태주에게 상현이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게 일종의 힘과 자유에 대한 비유로 느껴졌는데요. 인간은 살이 물렁하기 때문에 맨발로 아스팔트를 달리게 되면 상처를 입잖아요? 신발을 신지 않는 이상 그렇게 다니긴 어렵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자유를 얻지 못하는 거죠. 그러나 뱀파이어가 되면 상처가 생겨도 금방 아물기 때문에 맨발로 달릴 수 있습니다. (달리는 걸 넘어서 태주는 이제 날아다닙니다.) 그녀는 뱀파이어가 됨으로써 줄곧 바라마지 않던 자유를 얻었고, 이걸 과시하고 휘두르는 게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부분은 태주가 누리게 된 힘과 자유가 결국 허상이란 점입니다. <박쥐>의 결말은 결국 속죄를 선택한 상현이 태주를 차에 태우고 바닷가가 보이는 절벽에 데려가 그녀와 햇빛 아래에서 소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일반적인 뱀파이어의 클리셰대로 그들은 햇빛에 노출되면 죽습니다). 당연히 태주는 저항합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상현의 딜레마는 알 바도 아니고, 만족스럽게 욜로하고 있는 삶을 반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실랑이를 벌입니다. 태주가 트렁크에 숨으면 상현은 트렁크를 뜯어서 바다에 던져버리고, 차 밑에 숨으면 차를 옮겨버립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던 태주는 결국 체념하고 상현이 줬던 신발을 꺼내 신고는 상현의 옆에 앉아 죽습니다. 체념하는 것이 태주의 마지막입니다. 태주가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서 체념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슬픈 결말이네요.


살이 타들어가는 상현과 태주


맨발로 달리는 태주에게 신겨준 신발처럼 태주가 가진 힘과 자유는 상현이 준 것입니다. 태주의 서사는 상현에게 속해 있습니다. 상현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에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영화의 권력을 가진 주인공은 이야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박쥐>의 권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현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현은 태주를 사랑해서 남편을 함께 살해해주고 뱀파이어의 불멸성과 힘을 건네줬습니다. 상현과 태주의 관계에서 상현은 타락했고, 태주는 혜택을 받았죠. 하지만 그건 사실 태주의 권력이 아니고 결국 상현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사랑부터 이별까지, <헤어질 결심>



그렇다면 <헤어질 결심>은 어떨까요? <헤어질 결심>은 많은 부분에서 <박쥐>를 떠올리게 합니다. 남편에게 학대받고 그를 죽이는 여자주인공, 그녀가 입는 푸른 원피스, 서늘한 얼굴, 도덕적 강박이 있지만 폭력에 끌리는 남자주인공, 아름답고 고독한 바다의 이미지. 하지만 중대한 차이점이 있죠. <박쥐>가 상현의 이야기였다면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은 이견의 여지 없이 서래라는 부분입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의 플롯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역시 전형적인 팜므파탈의 서사를 따릅니다. 강력형사 해준(박해일 역)은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내이자 피의자인 서래(탕웨이 역)의 수사를 맡게 됩니다. 중국인인 서래는 한국어에 서툽니다. 해준은 전문 용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고 값비싼 초밥을 사주는 등 그녀를 배려하면서 수사를 진행합니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궁합이 몹시 잘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준의 아내인 정안보다도 그렇죠. 그들은 가까워진 끝에 서래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자 아예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합니다.


마치 천생연분 같은 두 사람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게 됩니다. 특히 불면증을 앓던 해준이 서래의 해파리 호흡법으로 깊이 잠에 빠져드는 장면에서 아무래도 그의 마음이 명백해 보이지요. 해준처럼 깔끔하고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잠잘 때만큼 무방비한 상태를 허락할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 정도잖아요. 그러면 서래의 마음은 어떻죠?


서래 또한 해준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서래는 해준이 그녀의 집을 감시할 때 중국어로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라는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하고, 자신을 품위있게 대하는 형사는 해준밖에 없었다고 그에게 마음을 표시하기도 했죠.


하지만 서래의 행동에는 사실 속셈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사건의 진범이었고 (남편을 산에 밀어서 죽였습니다.) 이를 은폐할 요량으로 해준에게 접근한 겁니다. 해준이 서래와의 관계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 서래는 남편을 둘러싼 서류를 조작하고 수사 자료를 폐기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진상을 알게 된 해준은 절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뿐더러, 유능하고 결벽적인 사람이 감정 때문에 직업적 사명을 그르쳤다는 게 스스로도 괴로웠을 겁니다. 더 무서운 것은 진실을 알고나서도 해준 스스로가 서래를 잡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사랑에 빠지고 만 그는 더 이상 이전의 해준이 아니게 되었거든요. 사건의 유일한 증거물인 휴대폰을 바다에 던지라 하고는 그녀에게서 떠나가기를 선택합니다.



여기까지는 해준의 이야기입니다. 파멸적인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를 바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자. 아마 역사 속 팜므파탈을 다루는 많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끝났을 것 같군요. 어쩌면 <박쥐>의 상현처럼 나중에 속죄를 결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이 평이한 서사에 변수가 생깁니다. 바로 그 팜므파탈인 서래가 해준의 고백을 듣고 그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이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붕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본 서래는 눈물을 흘립니다.


서래는 한국으로 건너온 중국인입니다. 외모는 아름답지만 한국말은 어수룩하죠. 남편을 포함한 남자들이 서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지 않았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자신이 한 남자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서래가 해준을 사랑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해준의 이야기가 끝나고 서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헤어질 결심>의 후반부는 서래가 주인공입니다.


전반부의 사건으로부터 13개월 후, 해준은 경상북도 이포군으로 근무지를 옮겼습니다. (이포는 가상의 지역인데요. 해준의 아내가 다니는 원전이 위치한 곳으로서 짙은 안개로 유명합니다.) 어느날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온 해준은 그날 헤어졌던 서래와 재회하게 됩니다. 서래는 그동안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것 같았는데, 다음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한 여자의 두 남편이 죽은 겁니다. 당연하게도 해준은 서래를 범인으로 추측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를 죽인 다른 진범이 밝혀집니다. 그럼에도 서래에 대한 의심은 쉽사리 거둬지지 않는 가운데 서래가 어머니의 유골을 묻고 싶다며 그를 호미산으로 불러냅니다. 서래는 첫 남편을 산 절벽에서 밀어뜨려서 죽였죠. 혹시 해준도 그렇게 죽는 걸까요?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녀는 해준을 끌어안고 방수팩에 담긴 휴대전화를 건네줍니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서래는 그렇게 말합니다.


해준이 몰랐던 사건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서래의 남편이 두 사람이 이별하던 당시 녹음했던 대화를 알게 되었고, 죽기 전에 이를 빌미로 삼아 서래를 협박했다고 합니다.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의 어머니를 약물로 죽이고 살인을 조장했습니다. 진실을 깨달은 해준은 서래에게 전화를 거는데, 그녀는 바닷가로 향하는 중입니다.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합니다.


해준 : 서래 씨도 그 파일 갖고 있죠? 말해요, 무슨 녹음이에요?
서래 :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해준 : 내가요?
서래 :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그걸 남편이 알아 버렸어요.
해준 :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 말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서래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느냐는 해준. 전 이 장면에서 내내 해사하고 정갈한 신사처럼 보였던 해준이 좀 좀스럽다고 느껴졌는데요. 느글느글하게 핸드크림도 발라주고 우산도 같이 쓴 여자가 자기 말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데 그게 중요한가?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해준에게는 정말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가르침을 따른다면요. 그는 자신을 기만한 살인자를 사랑하기로 결심하면 볼 손해가 너무 많습니다. 그걸 감당하기에는 스스로를 견디고 유지하는 데에도 너무나 벅찼죠.


그렇지만 서래는 그런 구차한 표현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주저하지 않았죠. 해준의 안전을 위협하는 남편은 자기 손으로 죽여주고 자신은 바다에 빠져죽는 정도로요. 서래가 바닷가에 온 이유는 자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이 해준을 붕괴시켰다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녀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그녀 자체가 미결 사건이 되고 싶었을 수도 있죠. 서래의 말을 빌리자면, 해준은 미결 사건이 있을 때 벽에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그 생각만 하거든요. 어느 쪽이든 저 같은 소시민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서래는 스스로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밀려오는 바닷물에 뒤덮입니다. 여기서 서래가 정말 죽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흰 손에 밀물이 스며드는 장면 이후로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서래의 거대한 사랑 앞에서 해준은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비유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그렇죠. 바로 발 밑에 있을 서래를 찾아헤매는 마지막 장면,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밀려드는 바닷물 속에서 줌이 멀어지면서 아득하게 작아보이는 해준의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와 흡사합니다. <박쥐>의 결말에서 태주에게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해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서래가 시작하고 이를 다시 돌려주었는데, 해준은 시작한 것도 끝난 것도 따라잡질 못했습니다.


<헤어질 결심> 국내 포스터


<헤어질 결심> 포스터는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그려진 서래가 당당하고 강렬한 눈빛으로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고, 그 앞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해준이 어설픈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등을 돌리면 서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도통 갈피를 못 잡는 듯합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포스터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서사는 송서래가 지배합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갈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기꺼이 더 사랑하고 내어줄 수 있었으니까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약자일 수는 있습니다. 상현과 서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죄를 저질렀던 것처럼요. 하지만 그들은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건 자신의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는 충분한 주체성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죠. 그러고보니 두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팜므파탈의 예시를 들었는데, 팜므파탈이 20세기에 전문직으로 진출한 여성들과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가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남성들의 불안감이 극대화한 끝에 유포된 개념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사랑과 실제 권력에 대한 얘기는 더욱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