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이라는 노동

by 반달



“참 결정을 잘 내리시는 것 같아요.”



어느 날 팀원에게,

한번은 대학교 후배에게,

언젠가는 또 협업하던 교수님께 들었던 말.


별 말은 아니지만 떠올리게 되는 때가 있다.

결정이 그 자체로 너무 어려울 때다.


마치 벼랑 끝에 올라

번지점프를 할까 말까 발을 떼어보길 반복하듯이

끈끈하게 나를 붙잡는 그 무수한 질문들.

그렇게 가끔 지나치게 많은 고민에 파묻힐 때면
별별 가정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후에야

눈을 질끈 감고 하나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남이 보는 나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니.


그러나 결단력이 있건 없건 간에
리더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거리들이 매일같이

눈앞에 당도한다.


‘이 컬러가 맞을까?’

‘어떤 소재가 최적일까?’ 하는

<즐거운 선택>에서부터,


‘지금 이 시점에 팀원을 충원해도 될까?’
‘이 사람이 기존 팀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같은

<중대한 결정>, 그리고


‘현장에서 당장 손해가 난다는데 멈춰야하나?’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어떻게 대처하지?‘ 처럼

<피할 수 없는 결단>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어려운 결정을 대체 어떻게 하지, 싶던 일도

이상하게 지나고 보면 사소한 고민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그 질문에 나만의 답을 써서 넘어갔느냐

아니면 외면하고 회피했느냐 둘 중 하나인 거다.


가장 난해한 결정거리는

a+b=c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다.

결과가 c일지, d일지, 심지어 e일지조차 모를 때—


여러 명제를 다 동원해 시나리오를 예측해본들

결과는 반드시 예상에서 벗어날 것도 이젠 안다.


그 안에는 늘 '사람'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결정들은 직감만으로도 아주 빠르게 내려진다.

그러다가도 나의 습관처럼 빠른 결정의 결과로

예상 못한 문제를 경험하고 나면

당분간은 좀 더 조심스러워진다.


사업 초기에는 금전적 손해 여부로 결정할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금전은 결정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니다.

간혹 돈으로 때울 수 있다면, 하는 일들도 있다.


그보다는 내 선택이 나중에 후회를 가져올까봐,

누군가를 상처 입힐까봐 두려울 때가 가장 어렵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던 답을 애써 미루다가

더 어려운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미안한 마음에 해야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해서

원망을 산 적도 있고

표현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남겨서 병을 만들기도 했다.


같이 일하는 소장님이 자주 해주시는 말이 있다.

“이제 그건 실장님이 고민할 일이 아니라 그쪽에 넘겨야죠”


어쨌든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가장 1순위 원칙은

결정은 되도록 빨리,

그리고 명확하게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선택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과거가 되지만,


지나치게 오래 끌었던 결정만큼은

반드시 또 다른 결정거리를 들고 찾아오더라.






피터 드러커의 책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이 대목을 좋아한다.


“의사 결정이란 기껏해야 ‘거의 올바른 것’과 ‘거의 잘못된 것’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대개는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듯한 두 가지 행동 사이의 선택이다.”


“어중간한 결정은 언제나 잘못되게 마련이다.
자신의 결단력 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언젠가 고민이 많던 날의 나를 저격한 문단들.

지금도 뭔가를 고민하다 결정이 더디어질 때면 펼쳐본다.


내가 지금 결정을 유보함으로 인해 가장 힘들어지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각성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상황들은 찾아오고

지금 이 순간도 내 머리 한 구석에는

<결정 유보의 방> 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나는 결정을

나에게 주어진 ‘노동’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배사는 도배를,
도장공은 페인트칠을,
디자이너는 도면을 그리듯—
대표는 결정하는 사람이다.


<퍼펙트데이즈>에 나오는 청소부 아저씨처럼

가장 나답게, 묵묵히 매일 하는 나의 일이다.


이제는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한 결정이 아니라,

지금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결정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결정하는 마음을 최대한 가볍게 가지는 것.

나의 책임이 될 결정이기에 내 마음에 들면 된다는 것.

나에겐 하나의 믿음이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얼굴에는 그의 삶이 드러난다고 한다.
요즘 나는 회사를 마주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이제 회사는 더 이상 외연이 만든 결과가 아니다.
나의 생각과
그동안의 선택들,

내가 선택하여 함께한 사람들과 함께 만든

수많은 결정들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책임이기에—

잔잔한 주름도, 깊게 파인 주름도

모두 나와 우리의 것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 얼굴을 마주하며 서 있다.



최고의 결정은 없다.

내 결정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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