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통찰의 시간 끝에
제안서를 쓴다는 것.
큰 회사의 일원으로 있을 때,
나는 내가 제안서 쓰는 팀에 있다는 게 좋았다.
과정이 힘들고 고되기는 해도,
완성된 하나의 결과물을 제출하고 난 뒤
한 편의 오케스트라 속 일원이 되는 기분에 매료되었달까.
하지만 인원이 많지 않은
소규모 스튜디오에서의 제안서 작업이란,
밥 먹듯 반복되는 루틴이면서도
대표에게는 가장 고독한 업무다.
‘이 컨셉이 클라이언트에게 와닿을까?‘
‘클라이언트가 예상한 견적 조건과 잘 맞을까?’
‘그래서, 수주에 성공할 수 있을까?’
중요한 제출을 앞두고 여러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 때면
현상 공모 제출을 앞두고 야근하던 일상 속에서
팀 전체가 식사를 하러 갈 때 늘 앞서 혼자 걸어가시던,
유독 고뇌에 찬 이사님의 모습과 내가 오버랩되곤 했다.
디자인 회사의 제안서는
디자인 시안, 견적서, 그리고 공정표로 구성된다.
논리적인 전략과 우리만의 감각을 담은 계획안,
그리고 그에 맞는 예산 시나리오를 담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왜 우리가 해야만 하는지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통해 내린 결론을 증명하는 답안이다.
우리의 모든 제안서는 각기 다른 내용과 꼭짓점을 갖고 있다.
대지든, 임대공간이든
모든 조건이 다르기에 매번 새로운 해석을 요한다.
그 점이 어쩌면 이 일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면서
정량화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아무래도 제안서가 실패하는 일이 잦았다.
"시안은 마음에 드는데 견적이 높다"거나
“경험이 있는 업체를 선택하게 되었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신뢰해 시작되는 프로젝트가 있는가 하면
가끔은 그런 협상의 문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열쇠 꾸러미만 만지작거리다 허무하게 끝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회사가 경쟁력 있는 견적을 내는 회사가 되고,
경험이 있는 업체가 되면서 알게 되었다.
클라이언트마다 고유한 성향과,
각기 다른 사정이 있다는 것을.
가격 협상이든, 계획안 협의든, 정산이든 간에
처음엔 일을 보고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서로 다른 독립된 인간 간의 티키타카,
케미의 결과였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친구로 만났어도 친해졌을 클라이언트도,
선후배 사이로도 잘 지냈을 것 같은 클라이언트도 있다.
견적이 여유 있다고 해서 안될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 추구미가 다른 듯하다가도 결국 합일점을 찾기도 한다.
가끔 결정 과정에서 클라이언트의 MBTI 가 뭘까도 추측해 보고
힘들게 끝난 프로젝트를 어렵사리 회고할 땐
'이래서 다들 사주를 보나',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삶도 끊임없는 제안의 연속이기는 하다.
여행을 가자는 제안,
맛있는 걸 먹자는 제안,
쇼핑을 하자는 제안…
그런 일상 속 장면에서의 나를 떠올려 보면,
프로젝트 제안에 있어서도 성공의 답은 의외로 명쾌하다.
‘상대가 원하는 걸 읽어주는 것.’
어쩌면 그게 다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찾은 해답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무엇을 원해서 여기까지 날 만나러 왔는지,
내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그걸 헤아리는 일이야말로 제안의 본질이다.
내가 암만 이 분야의 전문가라도,
난생처음 카페를 창업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서야
그 어떤 철학과 계획도 그에겐 무의미하다.
그래서 어느 시점을 통과하면서부터는
‘이 프로젝트를 꼭 수주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우리와 잘 맞는 고객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게 우리의 색깔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더 멀리, 오래가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생각이 일을 되려 멈추게 만든 시기도 있었다.
올해 초가 그랬다.
작년 한 해,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쉼 없이 몰아쳤고,
그중에는 내가 중심에 있지 못하고
‘이건 아닌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잘 끝내보려고 애쓰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한마디로 고군분투했다.
그만큼 성과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병이 하나 생겨 있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꾸만
‘이젠 뭔가 다르게 접근해야지'
‘상대를 잘 파악해서 대응해야지’라는
강박에 붙잡히게 된 것이었다.
실수라 여겼던 부분을 개선해 새롭게 해 보자는 시도는
충분히 의욕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나에게 미처 체화되지 않은 시도들은
예상과 달리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던 요 근래 모처럼,
‘안색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부터 올해 초 내내
항상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제야 올해 전반기를 슬며시 돌아보니,
나는 나름의 회복기를 겪고 있었던 거였다.
그것도 모른 채
성취감에 사로잡혀 새해를 맞고,
여전히 몸은 계속 움직였지만
영혼은 빠져나간 듯한 나날을 보냈다.
정작 중요한 나 자신은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밀려오는 요구에 맞춰
다시 제안서를 쓰고, 미팅을 잡고,
끊임없이 ‘괜찮은 척’하며 일을 이어가려 애썼다.
그런 와중에 일이 잘 안 되면
그저 나를 탓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에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나는
스스로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다들 말하는 번아웃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주저 앉아 멍하니 있진 못하는 성미라
이 책, 저 책을 뒤져가며 이유를 찾고자 애썼다.
왜 나는 그렇게 지쳤던 걸까,
왜 아무리 노력해도 충족감이 없었을까—
분명히 내가 이루고 싶던 일들을
실제로 해내고 있는 와중이었는데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의 상태를 위로하는 글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 중에서도,
‘자기 결정성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
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다.
이 이론에서는,
인간이 진정으로 몰입하고 지속 가능하게 움직이려면
세 가지 심리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율성(Autonomy) – 스스로 선택한다는 감각.
유능감(Competence) – 잘하고 있다는 감각.
관계성(Relatedness) –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이 밖에도 다양한 설명들이 있었지만
이 이론을 알고 나서부터는
당시의 내가 유독 지치고 항상 불안정했던 이유를
스스로도 이해하고, 납득하게 됐다.
내가 주도적으로 구상하는 일보다도
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조건, 변수가 많았고,
그에 맞춰 끊임없이 조율하고 반응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의미 있는 작업이었고 배움도 컸지만,
내가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내적 동기'—
즉 스스로의 확신과 열망에서 나오는 추진력보다는,
외부의 기대와 필요에 응답하는 일이 중심이었던 탓에
그만큼 심리적인 에너지도 쉽게 소진되었던 것 같다.
그 시기를 올곳이 지나고 나서,
나의 증상을 발견하고 괜찮아지고 나서야,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걸 직감했다.
괜찮은 줄 알았지만 괜찮지 않았던 나를
천천히 돌아봐주고 인정해 주고,
회복할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었더니
얼굴과 말투에도 조금씩 생기와 안정이 찾아왔던 거다.
그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읽은 책들은
내게 어쩌면 정신과 주치의의 역할을
대신해 준 거나 다름없었다.
몸은 익숙해진 패턴으로 무기력을 견뎌냈고
내면은 조금씩, 아주 단단하게
다시 살아나는 중이었던 나를 조용히 지탱해 주었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지만
사실 나 자신을 바라 보는 시간들이었다.
아마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여전히 내가 세운 성공이라는 강박 속에서
계속해서 나를 몰아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제안이란,
그 일을 하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꺼내어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나를 가장 잘 알아봐 주어야 함을 이제는 안다.
강인한 대표로서 중심을 잡는다는 것 또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도.
오늘도 그렇게,
숱한 다짐 속에 하루를 지나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