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위임의 사이에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역할을 혼자 쥐고 있는 걸까?
회계경리, 디자이너 실장, 고객 상담, 협력사 관리,
인력 채용, 급여 관리, 비용 관리, 홍보 마케팅,
심지어는 탕비실 간식 채우는 일까지..!
정신 없이 물 속을 헤엄치다
잠시 물 밖에 호흡을 하러 고개를 들어
'대체 뭘 덜어내야 하지?' 했다가
또 다시 앞을 향해 가기 바쁘다.
어쩌면 작은 조직의 숙명이다.
첫 직원이 한 명 생겼을 때,
내가 직접 하던 많은 일들을 넘겨주는 데 일 년이 걸렸고
다음 직원이 생겨서
그보다 더 작은 일들을 넘기는 데 또 일 년은 걸렸다.
당시 내가 위임한 대부분의 일은
내 생각을 아웃풋으로 만드는 일들이었다.
그렇게 팀의 구성이 커질 때마다
내가 직접 손으로 작업하는 일은 점점 줄었지만
정작 그 외의 일들은 무조건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 속에 살았다.
그러다
몸과 마음은 너무 바쁜데 집중할 일을 뒷전에 두고 있을 때,
클라이언트를 응대하는 나의 입장이 복합적이라
나를 여러 사람으로 분화하고 싶다고 느껴질 때,
그제야 든 생각이 있었다.
처음의 나는 단지 디자인만 하던 사람이니까
그 일을 나누었던 거라면,
지금은 조직의 규모로 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으니
이것도 일정 부분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 설명할 시간에 내가 하는 게 빠르지.'
모든 리더의 생각일 것이다.
심지어 신입사원이 들어와
막내 직원에게 하던 일을 나누라고 할 때도 같은 생각을 하더라.
위임을 잘하기 위해서는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하던 일을 정의해야 하는데
그게 불명확하니 위임이 될 리 없다.
암만 일을 나누었다고 해도,
책임까지 전부 넘기지는 못하니
일도 반만, 책임도 절반만 덜어주는 위임이 된다.
그렇게 ‘덜어냄’은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리더라는 자리는,
문제가 뭐든간에 가장 먼저 자기 잘못을 찾고,
팀원의 실수가 크게 번질 때나 프로젝트 잡음이 있어도
“내가 더 챙겼어야 했는데” 하고 자책하게 마련이다.
아는 대표님이 말하길
직원이 실수를 하면 꼭 경위서를 쓰라고 하던데,
그것도 아직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직원의 책임과 나의 책임 사이의 거리가 이토록 가까운데
그걸 '너만 잘못했다'라고 하는 게 왠지 불편하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나 자신에게도 많은 책임을 한계 없이 지게 한다.
책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서는
이런 상태를 '터널링(Tunneling)'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어떤 고민이나 문제가 마음속을 지배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잊은 척하지만
실제로는 뇌의 한쪽이 계속 그것을 감지하고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
마치 투명한 터널을 달리는 차처럼
동시에 다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엇도 집중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니 딱 나 같다.
그로 인해 정작 중요한 일에 쏟아야 할 집중도와 몰입력이 떨어지면
실제보다 더 큰 피로감을 느끼게되고,
결과적으로는 쉽게 무기력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서도
여러 이해관계를 거쳐 고민하는 대표인 내가 아닌,
‘일’로서 내 일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더 중요한 일에 더 제대로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원칙을 제대로 위임할 수만 있다면,
꼭 내가 모든 사안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책임과 위임의 경계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본다.
영화 〈인턴〉의 벤처럼
묵묵하게 옆을 지켜주고, 감정의 균형을 잡아주는 어른 같은 존재.
나를 대신해 사무실의 교통정리를 해주는 누군가.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깊이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용히 외연을 잡아주는 그런 존재.
하지만, 경험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만의 방식이 단단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 조직에 잘못 스며들면
오히려 큰 벽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로서 내가 할 '진짜 중요한 일'은
우리 회사를 더 오래 지속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는 일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디자인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모든 걸 다 짊어지는 게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에 집중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지금 '다 해야 한다'는 이유로
중요한 가치의 일에 시간을 덜 쓰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대한 사안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적정한 사람을 찾는 일은
'리더가 해야 하는 디자인’인 것.
오늘부터 나는
디자인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내 일을 나눌 누군가의 자리를 그려보기로 한다.
그리고 하루 중 가장 맑은 집중력을
그 일을 위해 조금씩 떼어놓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