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함을 더하는 시점.
엊그제, 업계의 한 선배님과 나눈 대화를 기록해 본다.
좀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나지만
복잡한 일들이 거미줄처럼 옭아매었던 어느 날엔가
더 이상 혼자서 생각하는 것으론 답을 내기 어렵다 싶었다.
불현듯 누군가를, 나의 사정을 잘 알 것 같은 선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 선망하던 선배님께 연락을 드렸다.
정리될 듯 정리되지 않는 무수한 생각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인데
하지만 만나는 날까지도 괜히 뵙자고 한 걸까,
과연 내가 내 생각을 잘 털어놓을 수 있을까 되뇌었다.
그런데 왠 걸,
조심스레 꺼낸 그간의 사건과 여러 고민들이 나오자
상처와 후회,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고민을 꺼냈을 뿐인데 내가 누구인지 돌아보게 되었달까.
그러고 보면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낄 때
일 분 일 초도 편하지 못한 사람이다.
누가 일부러 해를 끼치지 않아도,
상처받은 내 마음이 더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럴수록 혼자 속앓이를 하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썼다.
어쩌면, 사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관계는
그런 나를 알아본 덕분으로 시작했고,
나와 비슷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해 올 수 있었다.
다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나의 열의 있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이용의 기회가 된다는 것.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까’라는
자책 속에 지낸 시간들을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선배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건 사실 소장님만 겪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덧붙이셨다.
“정말로 바닥을 쳐보면,
그런 류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내칠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말한 그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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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진 않는다는 것.
그런데,
초기 창업자들이 쉽게 그러기도 한다는 것.
하지만,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 꽤나 이성적인 사람이 돼있더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괜찮아 보이는 회사들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곪지 않은 곳은 어디도 없다는 것.
그러니,
일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원하는 방향으로 롱런할 수 있다는 것.
.
.
.
평소 부드럽고 온화하며,
고요한 중심을 지키는 듯 보였던 선배님은
그런 면에서 내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존경해 온 분이었다.
그런데 그날 나눈 말씀들과 태도에서 나는
누구보다 단단한 강인함과 냉철한 심지를 보았다.
그리고 또 이런 말씀도 해주셨다.
“우리가 하는 일은 타인에게 ‘도구’가 되어 주는 일이잖아요.
근데 내 칼날이 날카롭지 않으면,
그 칼은 결국 상대가 나를 휘두르는 도구가 돼버려요.”
한마디, 한마디가 명징하게 박혔다.
십여 년간 중심을 지키고 계신 이면에는
깊은 사유와 올곧은 철학,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군분투가 있었다.
결국 중요한 건,
스스로를 계속해서 복기하고 계획하고,
수정하면서 단련시켜 나가는 힘이라는 걸 실감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무너지거나, 힘든 경험들을 겪다 보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닥쳐도
냉정한 태도로 다음 스텝을 준비할 수 있을 거란 사실도.
선배에게 그런 말을 했다.
너무도 이성적인 누군가에게 이런 조언을 들은게 아니라
나와 닮은 선배로부터 들은 말이라 수긍이 더 간다고.
정말 그랬다.
관계의 불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전전긍긍하던 내가
새삼 귀엽게까지 느껴지면서...
이 또한 과정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나자
이상하게 마음이 가볍고 상쾌해짐을 느꼈다.
직원, 협력업체, 클라이언트...
누구와도 늘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 건
나의 불필요한 욕심에 불과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증오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하게 오래가기 위해 견지해야 하는 태도였다.
이제는 덜 친절할 수도 있고,
거절을 명확히 말할 수도 있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만큼만 받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단,
더 해주고 싶은 관계에서만 내 욕심껏 더하자는 것.
손절할 사람은 칼같이 손절하고,
함께 갈 사람은 기꺼이 끌어안는 것은
어쩌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선배님의 작업실을 나오며,
한결 가볍고 뭉근해진 나의 마음 상태를 느끼며
사무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심한 듯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책들과 손도면,
오래된 문서들과 작은 소품들,
오랜 기간 수집하고 디자인한 가구들 하나하나까지.
그 공간에는 한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고,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지향점과 일상의 태도,
그리고 냉철한 비즈니스 감각.
그 모든 것들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
나의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는 걸,
나의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중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회고록을 통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공감이 닿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나를 단련하는 중이다.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