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를 읽고
2. 소설 [크눌프] (11)
1) 이른 봄 (10)
환호를 기대했습니다.
조용하기만 합니다.
쥐죽은 듯 움직임이 없습니다.
적막입니다. 주위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눈앞의 여인도 사라졌습니다.
뿌연 조명에 주위가 아른거립니다.
다리 밑이 허전합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리둥절합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발을 구릅니다.
빠져나갈 궁리를 합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을 깨뭅니다.
아무도 없는 이곳, 적막한 이곳, 홀로 있는 듯한 기분, 어렵사리 고개를 돌립니다.
등 뒤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모두 한 곳만 쳐다봅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크눌프의 주머니를 향하고 있습니다.
눈짓으로 어서 수고비를 내라고 재촉합니다.
주머니는 이전부터 비어있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접만 받았지 고개를 숙여보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뿌연 조명이 싫고, 쥐죽은 듯한 적막도 싫습니다.
저들의 재촉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크눌프의 머리가 복잡합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은유 ‘In einem kühlen Grunde’ 이후 처지가 달라졌습니다.
어깨가 처지고 시선은 땅을 향합니다.
어디서도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았습니다.
정말 뛰쳐나가고 싶습니다.
영웅을 영웅답게 대하지 않은 이들의 처신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래 허울이라 해라, 민낯을 보니 만족하는가, 영웅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창피하니 인제 그만 합시다.
영웅이라 불러도 좋고 떠돌이라 불러도 좋으니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옆집 여인의 도움으로 술집에서 빠져나옵니다.
크눌프는 옆집 여인에 빚을 집니다.
옆집 여인이 의인인 셈입니다.
옆집 여인은 좋든 싫든 크눌프의 민낯을 보았습니다.
크눌프의 허울도 지켜보았습니다.
영웅 크눌프에게 이번 봄은 시기가 빨랐습니다.
바람이 매섭고 얼음이 채 녹지 않습니다.
입춘 지나 우수(雨水)나 되어야 날이 풀릴 것 같습니다.
기백과 자신감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꽃샘추위처럼 짜고 맵습니다.
짧은 만남을 끝으로 옆집 여인과 헤어집니다.
그러면서 옆집 여인은 크눌프에게 쓰라며 돈을 건넵니다.
이를 마다하지 않은 크눌프, 호의라고 생각했지만 동정이었습니다.
크눌프는 자존심마저 내려놓습니다.
창피한 것도 현실 앞에서 배부른 사정입니다.
영웅 크눌프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번 난관으로 크눌프는 어떤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다음 여정은 어떤 시련이 기다릴 것인가?
멋쟁이 크눌프는 어떤 영웅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인가?
모두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영웅 크눌프는 떠났습니다.
영웅과 크눌프는 합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영웅과 크눌프 사이에 벽이 높았습니다.
크눌프는 영웅 대신 인간을 선택했습니다.
창피하기는 했지만, 영웅은 크눌프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노래 ‘In einem kühlen Grunde’가 크눌프를 깨웠습니다.
노잣돈 얼마는 크눌프에게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아들고 다음 날 길을 떠납니다.
영웅으로 마을에 들어 인간으로 마을을 벗어나는 크눌프입니다.
그가 가진 건 옆집 여인이 준 노잣돈 얼마가 다입니다.
봄날 크눌프의 등장은 따스했고 밝았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른 탓인지 그 기운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크눌프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깨닫기도 합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오래 즐기다 떠났을 텐데, 이번에는 급하게 퇴장을 해야 합니다.
친구한테 작별인사 제대로 못 한 것 같습니다.
며칠 사이 많은 일을 겪은 크눌프가 안 되어 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