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를 읽고
3. 끝 (34)
⑧ 관계- 1
크눌프 삶은 떠남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와 단절, 연인의 거절, 믿음의 거부, 나그네의 삶, 떠돌이의 반목, 두려움의 기습, 회피의 귀결, 어머니의 품, 고행의 끝, 그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외톨이로 세상을 떠돌았습니다.
마음 붙일 곳 없이 객지 생활을 했습니다.
친구, 동지, 연인 있기는 했지만, 마음을 털어놓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크눌프에게 관계는 예전 기억 속 개념입니다.
친구 누이와 아픔을 겪은 뒤 그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너지고 믿음, 신의를 부정하게 됩니다.
주변 관계가 깨지고 사이를 믿지 못합니다.
둘러싸던 보호막을 거부했으며 걷어차는 상황까지 이르고 맙니다.
이것이 떠남의 징조이자 시작입니다.
크눌프에게 있어 떠남은 관계의 단절을 뜻합니다.
혈육, 친분, 사회의 단절로 그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흔적을 남기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해 점점 먼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크눌프는 난 놈 대접을 받았습니다.
관심의 대상이었고 멋쟁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유행을 이끌었고 친구들의 자랑거리로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즈음 고향에서 크눌프는 잊힌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모가 떠나고 기억에서 멀어져 과거의 어떤 사람으로 기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된 결과입니다.
고향에서 크눌프는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 타지에서 크눌프는 있어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여기서 관계가 끊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저기서 탄탄한 관계를 이루며 필요한 인간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가 없어지고 대신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같이 하지만 없는 듯, 크눌프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정 주려 해도 정 줄 곳이 없고, 정 받고 싶은데 정 받을 대상이 없습니다.
독을 채우지만 깨진 구멍으로 연신 물이 빠져 제자리걸음만 거듭합니다.
같이 하지만 없는 듯, 떠남의 반복이었습니다.
크눌프가 자초한 세상입니다.
과거를 가리기 위해 현재를 화려하게 꾸미고자 했던 게 그의 생각입니다.
처음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지금으로 그것을 덮고자 했습니다.
관계의 단절, 크눌프의 의지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단장(斷腸)의 아픔도 상실(喪失)의 충격을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초한 일이고 책임질 일이기에 누구 탓할 사연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했고 그렇게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나’는 ‘같이 하지만 없는 듯’의 ‘같이’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같이’의 속살을 드러내 크눌프 앞에 내보였습니다.
‘같이’의 가치가 무너지자 ‘같이 하지만 없는 듯’이 균형을 잃고 맙니다.
균형의 상실은 자주 혼란, 무너짐, 붕괴로 이어집니다.
처음을 지금에 돌려막기로 버텨왔던 크눌프는 ‘나’의 말에 흔들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같이 하지만 없는 듯’은 ‘같이’를 잃고 ‘없음’으로 모습이 바뀝니다.
‘없음’은 크눌프의 현재 부정을 의미합니다.
과거를 버리고 현재만으로 버티던 그에게 현재 부정은 존재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존재의 상실은 실존의 문제로 낙향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떠난 곳으로 되돌아온 그에게 관계는 ‘같이’에서 시작해 ‘같이 하지만 없는 듯’이 되었다가 끝내 ‘없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사연 많은 인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