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3일
음악을 편견 없이 들을 수 있을까?
넓혀서 편견이 없다는 게 가능할까?
사람이야 마땅히 각자 자기 생각이 있고 그것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이나 예외 없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그건 인간 이상의 존재일 겁니다.
옆집 순이가 좋아하는 음악도 뒷집 철수는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식으로 누가 와하고 떠들고 떠받힌다고 해도 본인이 싫으면 싫은 겁니다.
객관성이라는 것도 이런 투로 보면 애매한 개념입니다.
객관성이라는 게 있을까?
편견이 없다는 게 가능할까?
표현이 틀리다 뿐이지 의미가 상충합니다.
객관성을 다룬다고 하는 물리학을 보겠습니다.
19세기까지 물리학은 절대 과학이었고 객관성이 논리 위에 있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오면서 물리학에서 객관성은 하위 개념이 되었고 절대성 또한 무너졌습니다.
물리학의 절대성 상실은 자연과학의 절대성 상실을 뜻했습니다.
과학이 절대성을 잃게 됨으로써 사회는 다양성을 얻었습니다.
문화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문화를 바라봅니다.
나는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의 노래를 들었다.
나는 조지 마이클의 자료를 읽었다.
노래는 듣는 것, 자료를 읽는 것, 두 행위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듣는 것이 빠르든, 읽는 것이 빠르든 둘 중 어느 것이 우선 일어나야 한다.
듣고 나서 읽었으면 읽기 전 가졌던 조지 마이클의 이미지에 읽은 내용이 추가되게 되고,
읽고 나서 들었으면 듣기 전 읽었던 조지 마이클의 개념에 들은 감성이 덧붙여지게 된다.
듣고, 읽는다는 것은 개인차를 기본으로 한다.
듣고, 읽는 행위는 행위자의 수에 비례해 늘어난다.
읽고 들은 행위 또한 같은 운동성을 갖는다.
행위자가 많을수록 행위의 경우가 증가한다.
행위자가 많을수록 객관성의 신뢰도는 낮아진다.
행위자가 많을수록 편견의 경우가 증가한다.
행위자가 많을수록 편견의 폭이 넓어진다.
현대사회는 음악에 듣고, 읽기 외에 한 가지 행위를 더 허용한다.
보기, 인자가 늘어남에 따라 결과는 더욱 오리무중이 된다.
편견과 객관성, 그냥 흘러가게 놔둡니다.
주어 담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손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앨범 [Listen Without Prejudice Vol. 1]에서 ‘Praying For Time’을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