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함이 아니라 고유함을 추구하는 사람
0. 수능을 치고 10년이 흘렀다. 나를 돌아봤다. 어렵지만 내 얘기를 해보려 한다.
1. 아버지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다. 30여 년을 주로 입시 지도를 담당했다. 그 경험이 학벌 콤플렉스와 합쳐져 세상을 서열 논리로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단일한 정답이 있으며,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공부 외에는 모두 쓸모없는 일이라는 가치관을 암암리에 나도 내면화했다.
2. 아버지는 막 중학교 1학년이 된 나에게 과학영재고를 가서 아이비리그로 유학을 가라고 했다. 왜 가야 하는지를 몰랐으니 동기부여가 안 됐다. 난 수학, 과학을 잘했지만 글을 읽고 쓰고 토론하는 걸 더 좋아했다. 언어적 재능으로는 유학을 가기 힘드니 적성이 무시당했다.
영재고에 떨어지고 나니 아버지는 내신을 잘 따서 서울대에 가라며 일부러 비학군지의 일반고로 보냈다. 같은 학년 학생들의 상당수는 중학생 때까지 입시의 중요성을 모르다가 고등학교에 와 갑자기 입시의 우열 논리에 노출되어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공부가 아닌 무언가로 나와 비교하여 우월감을 취하며 나를 깔보는 행동들을 많이 했다. 어리석게도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손쉬운 우월감을 충족하게 해주는 성적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자존감을 지켰다. 갈수록 더 오만해졌으니 그들과의 갈등은 그칠 줄을 몰랐다.
교사들은 대부분 나를 사람이 아니라 입시 성과의 도구로 봤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학생들이 너무 떠들어 공부를 하지 못해 야자를 빼고 싶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내가 교실에 머물면서 분위기를 잡아줘야 한다고 했다. 좀 헌신하라고, 이기적인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교사들도 8, 9교시 보충 학습과 야간 자율 학습을 강제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교사들과 학생들은 니가 정말 뛰어나다면 이런 환경 속에서도 노력해서 서울대에 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비아냥댔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걸 좋아했던 나는 경제학과에 가고 싶어 져 고2에 올라가면서 문과를 지망했다. 본인들이 세워둔 입시 플랜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자 아버지, 교사들, 학생들이 나를 뜯어말렸다. 의도를 알기에 듣지 않았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방어기제가 심해져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고3 기간 동안 아버지와 아예 대화를 하지 않았다. 자퇴를 꿈꾸었으나 정도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웠다. 그때 내가 좀 더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후회한다.
3. 모든 감정을 억압해 가며 탈출을 위한 공부를 해서 서울대에 왔다. 입학하고 보니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생 시절의 상흔으로 우울증과 소화 장애를 달고 살았다. 교내 심리상담센터는 항상 북적였다. 켜켜이 쌓인 자기 방어기제 때문에 내 경험을 털어놓지 못하니, 친구와 대화를 해도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피상적인 얘기밖에 하지를 못 했다. 알콜에 뇌를 절이고 억지로 공통의 주제에 관심 있는 척을 하며 서로의 기행을 지켜보는 게 다였다. 나 말고도 그런 친구들이 많았다.
사회 전체가 우열 논리에 빠져 승자도 패자도 모두 병들어 있는 걸로 보였다. 직업을 정하게 되면 그 길로 해외로 떠나려 했다. 내가 딛고 선 땅의 현실을 외면하고 또다시 탈출을 하려고 했다.
4-1. 그런데 나이가 들고 좋은 경험들이 축적되니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군대에서, 학회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내 군대 동기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는데, 자라온 환경과 성격이 나와 너무 달라 많이 다투었지만 선의를 알기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악습을 겪고도 망설이던 나와 달리 용감하게 신고하여 중대를 뒤엎어버리기도 했다. 인간관계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던 나였는데, 사람은 결국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군 제대 후 어느 학회에 들어갔는데, 맡을 사람이 안 구해져 어쩌다 보니 회장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근대 세계의 형성'이라는 이상하고 쓸모없는 주제를 잡아, 살면서 재미로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한 학기 동안 마음대로 떠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양한 사람들이 학회에 찾아오더니 어떻게 그렇게 연구를 많이 했냐며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대화가 너무 즐거웠다. 그때 비로소 정해진 기준을 따라 뛰어난 성과를 내지 않아도,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나답게 좋아하는 걸 하고 살아도 인정받고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블록체인을 연구하는 학회에 들어갔는데, 코인 가격이 떨어졌을 때 진심인 학회원들이 더 늘어났다. 돈이 안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의미를 느끼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이들을 보면서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가 서열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큰 위안을 얻었다. 사람을 믿지 않고 거래할 수 있다는 철학에 이끌려 블록체인을 공부했는데, 오히려 사람을 믿고 싶어졌다.
4-2. 첫 직장은 다섯 명짜리 스타트업이었다. 명문대를 나오고도, 박사학위를 가지고도, 미국 빅테크에서 승승장구했는데도, 재밌는 일 하고 싶다며 모인 신기한 팀이었다. 운 좋게도 회사가 서른 명까지 커졌다.
사수들은 지방대를 나왔는데 똑똑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주니어 개발자로서 개발을 잘하지 못했던 나를 끈기 있게 기다려줬다. 대학을 중퇴해서 나보다 나이는 세 살 어린데 경력은 나보다 3년 많은 친구가 있었다. 뛰어난 실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느끼는 몰입감, 그것들이 주는 말의 무게에 놀랐다.
개발을 하다 기획 일로 직무를 옮겼다. 같은 팀이었던 분들은 주로 금융권에서 경력을 많이 쌓은 분들이었다. 그런데도 경력이 1년도 안 되는 나와 격의 없는 토론을 하며 업무를 했다. 열린 마음을 가진 그분들 덕에 내 방식과 상대의 방식을 모두 존중하면서 일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좋은 사람들이 회사에 참 많았다.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렸다.
퇴사 후에도 믿고 조언을 구할 멘토님들도 생겼다. 겨우 1년 남짓 회사 생활을 같이 했을 뿐인데도, 진로 고민을 극심히 하던 나를 믿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이 게 정답이야 하고 꼰대질하는 게 아니라, 넓은 커리어 세계를 알려주시고 나의 적성과 가치관에 맞는 일을 찾아나가 보자고 하셨다. 어디든 레퍼 체크를 해줄 테니 될 때까지 한 번 해보자고 하셨다. 그때 받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5. 나와 교류한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데도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을 보고, 삶의 방식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세상에는 우열이 없고 고유함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해외로 떠나고 싶지 않다. 이곳에 남아 내 마음의 고향인 스타트업 업계에 기여하면서 한국 사회의 우열 논리를 극복해보려 한다. 학벌이나 스펙이 아니라 경험과 실력을 중시하는 스타트업들의 채용 문화가 확산되어, 사람들이 입시와 스펙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공하는 수많은 회사들이 나와, 성공에 이르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고 각자의 해답만이 있을 뿐임이 알려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사회가 우월하다고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지 않아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유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P.S. 이러한 비전에 공감하는 분들과 같이 일할 직장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배를 만들고 싶다면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 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을 키워주라는 말을 믿습니다. 항해하고 싶은 바다를 보여주세요. 그 바다에 같이 가보고 싶어 진다면, 스스로를 성장시키며 배를 만들겠습니다.
직접 연락을 주셔도 좋고(https://www.linkedin.com/in/changwoo-nam-345448188/), 좋은 회사를 소개해주셔도 좋습니다. 커피챗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