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김치를 꼭 먹어야 할까?

일상의 철학: 이유를 물으며 살기

by 남창우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유를 물으며 사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어령-

어릴 때 김치를 먹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음에도 나는 김치를 먹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김치를 담그셨는데, 세월이 흐르며 미각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생기셨던지 김치가 제법 맵고 시었다. 어린 내 입맛으로는 그 맛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의문이 생겼다. 김치 등의 발효 식품을 먹는 이유는 보관할 때 썩지 않고 발효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는 냉장고가 있지 않는가? 그러면 굳이 발효 식품을 먹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유산균이 필요하다면 요구르트를 먹으면 그만이다. 굳이 실용적 이유를 찾자면, 채소를 먹어야 섬유질을 섭취할 수 있는데 식단의 채소 중 하나가 김치이기 때문에 먹어야 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식단에 채소가 김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채소를 챙겨 먹으면 그만이다.


그 당시 TV 프로그램 등에서는 우리 민족의 DNA가 김치를 먹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다. 이런 주장을 따져보려면 '민족'이라는 개념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공동체 의식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민족 개념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이 복잡한 논의는 일단 넘어가고, 김치와 고추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고추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포르투갈이 그것을 유럽으로 수입했고, 그걸 일본으로 수출해서 임진왜란(1592) 때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식문화다. 심지어 고추는 상대적으로 신생 작물이기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가 빨랐던 해안 도시 위주로 전파되었으니, 내륙 지방까지는 전파되기도 힘들었다. 실제로 인류학자, 민속학자들이 연구해 본 결과 내륙 지방의 전통적 김치는 대부분 고추 없이 담가진 백김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추를 사용해 맵게 담가진 김치가 전국에 보급된 것은 근대화로 경제가 성장하고 교통이 발전한 이후의 일이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전국 단위에서 붉은 김치를 먹게 된 건 100년 정도의 역사다. 19세기까지 한민족은 붉은 김치를 먹지 않아도 잘 살았는데, 어째서 20세기 이후의 한민족은 붉은 김치를 먹어야만 하는 민족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생각해볼 지점이다.


전통이라는 말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단지 옛 것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400년 전 사람들은 고추라는 외래 작물을 이용해 붉은 김치라는 새 음식을 탄생시켜 식문화를 발전시켰다. 400년 전의 혁신(전파로 따지면 100년 전의 혁신)은 유지되어야 하는데, 현 시대의 혁신은 배척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김치를 반드시 먹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종이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전래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기간은 유전자의 관점에서 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김치는 유전자에 적합한 게 아니라 문화에 적합한 것뿐이다. 다른 문화권의 인류가 김치를 먹지 않고 산다면 한국인도 김치를 안 먹고 살아도 문제가 없다. 섬유질과 유산균을 다른 음식에서 챙길 수 있으면 그만이다. 어린아이들에게 김치를 먹도록 권하는 것은 좋지만, 먹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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