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이유를 물으며 살기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유를 물으며 사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어령
한국 사회는 매우 기묘한 형태의 서열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신기한 것이 나이 문화다. 특정 연도도 아니고, n 년 3월 ~ (n+1)년 2월까지를 한 기수로 묶고 그 기수 안에서는 평등을, 그 기수 밖과는 높고 낮음을 선언한다.
나는 96년 4월생이다. 부모님이 학교를 1년 일찍 보내 95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맞벌이를 했던 부모님이 나를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어린이집 교사들의 행정편의주의적 통제가 싫었던 나는 낮잠 시간에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 패턴이 몇 번 반복되자 학교라도 일찍 가라면서 초등학교에 보낸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3월 한 달 동안 같은 반 학생들과 잘 지냈다. 4월이 되어 내 생일이 되었는데, 내가 96년생인 걸 밝히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자신은 95년생인데, 96년생이면서 왜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냐는 식이었다. 참 이상했다. 그 말을 한 아이는 95년생 12월생이었다. 95년 3월생이었던 다른 아이와는 아홉 달 차이가 나는데 맞먹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네 달 차이인 나와 맞먹는 것은 기분 나빠하는 것이다. 이 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그러니 한국식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문화가 임의로 기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실수인 생물학적 나이로부터 정수인 나이를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매 순간 생물학적 나이를 먹고 있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한 살 먹었다고 자조하는 게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기수-나이 시스템은 어째서 만들어진 것일까? 나이의 기준이 입학월인 3월인 것만 봐도 학교가 근원이다. 학교는 어디서 시스템을 모방했을까? 군대다. 적은 수의 교사로 많은 수의 학생들을 통제해야 했던 산업화 초기의 학교들이 군대의 기수 문화를 학교에 도입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고학년을 교사들이 구슬리고, 고학년이 밑 학년들을 통제하는 식으로 관리할 수 있다. 초6, 중3 등이 선도부를 맡게 되는 원리가 이것이다.
더 나아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기수 나이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생물학적 연령이 높다는 사실로부터 서열 상 높이 위치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이끌어내는 유교적 장유유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전근대 농경 사회에서는 이 장유유서가 기능적 합리성이 있었다. 어차피 다들 농사짓고 산다. 나이가 다섯 살 많으면 농사를 5년 더 지은 것이니 직무 전문성이 더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지식과 지혜를 인정하고 존중을 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직무가 다변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전문성이 있다고 추론할 수 없다. 하는 일이 다르고 서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나이가 많다고 대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꼰대질밖에 안 된다.
사실 나이 서열을 따지는 문화는 저숙련 노동에서 좀 더 많이 관찰된다. 어차피 숙련성이 쌓이지 않는 노동에서는 전문성이랄 게 없다. 나이가 많으면 인생 경험, 인간관계 경험이라도 많기 때문에 업무에 전문성이랄 게 없는 상황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존중받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반면에 숙련 노동으로 갈수록 이런 문화가 적다. 1년 차 개발자가 나이 많다고 4년 차 개발자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1년 차 변호사가 4년 차 변호사보다 나이가 많다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렇듯 나이 개념은 따지면 따질수록 합리적 근거가 없는데도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문화의 가장 큰 해악은 교류의 범위를 좁혀버린다는 것이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졌기 때문에, 비슷한 일을 해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이까지 같은 사람을 찾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같아야만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친구가 될 수 있는 풀 자체가 너무 좁다. 이러니 외로워지는 것이다. 나이로 우열을 따지지 않고, 나이가 달라도 서로 마음이 통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