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철학: 이유를 물으며 살기
어렸을 적 할머니나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들었던 시류 한탄의 주요 레퍼토리는 ‘요즘 세상은 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도, 동사무소에 서류를 떼러 가도 상인이나 담당자가 대개 동네에서 교류하고 사는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말도 터놓고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도 하는 등 사람 사는 맛이 있었는데, 요즘은 물건만 빨리 팔려고 하고 업무만 빨리 처리하려 하니 비인간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한 번 의심해 보자. 시장 거래나 관청 업무에 인간적인 관계가 개입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과 정부로부터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시장과 정부의 각 구성원들과 인간적 관계가 계속 발생한다면, 결국 그 인간적 관계에 의해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과 친하거나 가치관이 맞는 사람의 편의를 더 봐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부산에는 호남 출신이 꽤 많다. 나름 제 2의 도시이기도 하고, 호남에서 서울보다는 가까우니 먹고 살 길을 찾아 부산으로 이주한 인구가 꽤 된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까지도 부산에는 전라도 출신에 대한 차별이 잔존해 있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 나이 지긋한 시장 상인들이 기분 나쁘다며 물건을 팔지 않는 걸 종종 목격했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 '호남 상회'라는 이름의 가게들이 남아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물론 일방향의 문제는 아니라서, 광주에서 ROTC 훈련을 받고 외출을 나갔던 아버지는 경상도 사투리를 썼을 때 종종 택시와 음식점에서 이용 거부를 당했다고 한다. 대형 마트에서 매뉴얼을 숙지한 직원들에게 물건을 사거나, 최근에는 쿠팡과 컬리, 배민에서 비대면 구매를 할 수 있으니, 시장 상인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지 않아도 상거래가 가능해졌다. 분명한 진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시장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생들이 입시를 위해 교사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사실상 강제되었다. 그들이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데다, 입시에 유리한 여러 활동 기회들이 교사들에 의해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교사들과 결이 맞지 않았던 친구들은 여러 모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교육부가 교사의 비공식적 권한을 점차 없애는 방식으로 개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법적 실체를 놓고 봤을 때 교사는 학생을 훈육할 권리가 있는 스승이 아니라 교육부 소속으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일 뿐이다. 이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솔직한 마음으로 진정한 멘토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보다 폭넓게는 ‘이웃사촌’의 신화도 있다. 나는 어렸을 적 단독 주택에 살았는데 부모님은 옆 집 사람과 여러 면에서 견해 차이가 있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 근처 공사장의 소음 문제나 재개발 이슈 등을 논하기 위해 계속 얼굴을 맞대며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파트로 이사 가니 관리실에서 이런 문제를 대행해서 처리해 버렸다. 그저 관리비를 납부하기만 하면 되니, 부모님은 옆 집 사람과 문제 해결을 위해 억지로 교류하지 않게 되었고 친구 분들과 주말을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가치관이 다양해질수록, 주변의 재화/서비스 제공자들이나 이웃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치관이 비슷해지기는 어렵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시장경제와 관료제의 비인간성 때문에 그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지 않고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물론 이 상태에서 그쳤다면 각종 문학이나 기사들이 지적하는 대로 인간 소외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기술 발달로 여러 웹/앱 서비스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된 현시대에는 제한된 시간을 더욱 마음 맞는 이들과 교류하며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비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는 것이 현대인이 인간관계의 자유를 누리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