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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3-

여순관동법원 전시관을 가다

by 김영

여순관동법원은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은 곳이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이곳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차갑다. 단순히 한 건물의 유적지가 아니라, 정의와 폭력이 맞부딪힌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슬픈 비하인드가 있다.


본래 조선인은 1심을 일본 영사관에서 치른 뒤, 고등법원에서 2심을 받을 수 있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관동도독부가 관할하는 이 법원에서는 2심 절차 없이 직권으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심지어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일본이 안중근의 사건을 다룬 방식은 ‘공정한 재판’이 아니라, ‘어떻게든 신속히 처리해야 할 사안’으로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 후, 공소를 포기하는 대신 집필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오직 ‘글’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저술이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 자체가 두려웠던 것이다. 결국 그의 대표적 사상서인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유고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1) 동양 평화의 필요성
안중근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서양 열강이 동양을 침탈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한국·중국·일본이 단결하지 않으면 모두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 경고하며, 세 나라가 협력해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반일 민족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는 일본에게 ‘약소국을 억압하는 침략자’가 아닌, ‘동양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자’라는 바른 길을 제시했다.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과 중국 침략은 결국 서양 열강의 반발을 불러 동양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라 그는 경고했다. 진정한 지도국은 약소국을 수탈하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협력과 공존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 들어도 놀라울 만큼 선구적이다.


때때로 이러한 발언을 두고 ‘안중근의 친일적 면모’라는 억지 해석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본뜻을 왜곡한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만행을 분명히 지적하고 비판했다. 다만 그는 복수를 복수로 갚는 악순환 대신, 일제가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여 함께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 점에서 그는 진정한 계몽주의자였다.


(2) 한·중·일 삼국 연합 구상
안중근은 세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공동은행 설립, 공동군대 창설, 철도 공동 운영 등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이는 지금의 유럽연합을 연상시키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국제협력 구상이었다. 제국주의가 당연시되던 시대에 그는 평화·공존·협력이라는 대안을 동양 차원에서 제시했다. 그의 구상은 오늘날 동북아시아 평화 담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사상적 깊이와 국제적 시야는 이미 민족을 초월해있었다는 점에서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여순관동법원 전시관 내부는 당시 법정을 충실히 재현해놓았다. 차가운 벽과 높다란 재판정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묘한 긴장을 느꼈다.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재판을 받는다면, 비록 잘못한 것이 없어도 주눅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안중근은 그 무대 위에서 어떻게 서 있었을까.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했을까, 아니면 역사의 부름 앞에 담담히 서 있었을까. 그는 사형을 앞두고도 매일 기도하며 집필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 모습에서 나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이 단순한 절망이 아니었음을 짐작한다. 그는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동양의 평화를, 언젠가 후대가 완성하리라는 믿음을. 나는 그랬으리라 믿는다.


여순관동법원 전시관을 나서며, 문득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있는 자’를 위해 글을 남겼다. 살아남은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그의 삶이 지금 여기에도 이어져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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