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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얼굴>을 보고

부조리한 사회의, 부조리한 개인

by 김영

영화 <얼굴>을 보고 왔다.

영화가 나에게 준 시사점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아주 많으니 영화를 다 감상한 후에 읽기를 권장드린다.


#1. 부조리한 사회

주인공의 어머니인 정영희는 화장실을 1분 안에 다녀오라는 말에 따르다가 바지에 실례를 할 정도로 순수하고 정직한 인물이다. 그 순수함이 진실을 정직하게 말하는 '정의로움'이 되기도 하지만, 진실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영희는 아버지가 외도하는 걸 보았던 사실을 가족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오히려 '집안 망신을 시키는 거냐'라고 어머니한테 두드려 맞는다. 피복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인 진숙이 공장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을 알고 주변에 알렸지만 진숙은 오히려 '여자로서 자신을 망신시켰다'라고 영희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맹인이었던 남편은 영희와의 결혼이 '세상이 나를 멸시하고 조롱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죽이게까지 만든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를 보여준다. 남편의 외도나 성폭행에도 사회적 수치심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남성 중심적 구조, 툭하면 '잘라버린다'는 말로 생계를 위협하는 고용 관계에서의 부조리, 살인자인데도 장애를 극복한 영웅으로 미화되는 영규와 이를 알고도 아버지를 옹호하는 아들, 타인의 개인사에서 자극적 소재를 찾으며 인간의 고통마저 상품화하는 PD의 취재 방식.


세상에는 아직도 다양한 부조리가 존재한다.


#2. 부조리한 개인

사회적 층위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면, 이 부조리를 증폭시키는 것은 '개인'적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사회에서 발생한 부조리를 개인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학습하고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실'을 왜곡하며 부조리한 신념을 강화한다.


맹인인 영규는 '시각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영규가 맹인이라는 것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사실에 대한 왜곡이 심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장치이기도 하다. 맹인인 영규에게 영희의 얼굴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평생 확인할 수도 없는 영희의 외모가 그에게 정말로 중요한 가치였을까? '절세미인'이라는 반어적인 조롱에 속아서 결혼을 결심한 것은 영규 자신이지만, 사실 맹인에게 있어 상대의 외모라는 가치는 사회가 주입한 것이지 실제로 영규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나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땐, 그 외로운 시장 바닥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챙겨주고 잘해줬던 사람이 영희였고 그런 따스한 인품이 영규에게는 정작 더 중요한 가치였을지도 모른다. 영규는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사회가 주입한 가치만을 내면화한 채,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열등감을 품은 비극적 인물이다. 영규도 악인이라기보단 부조리한 사회의 피해자 같은 느낌이었다.


현대사회라고 다를까? 사실 그대로 보면 멀쩡한 얼굴인데도 우리는 늘 자격지심을 가지며 성형을 그렇게 해대고, 생계가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끊임없이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을 느낀다. 멀쩡히 잘 살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압박과 세뇌에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고 느낀다.



한마디로 부조리한 왜곡.

이것이 이 영화가 담는 강렬한 메시지를 요약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희의 얼굴이 지극히 평범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영화 내내 영희는 ‘괴물처럼 못생긴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지만, 영화 말미에서 확인된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사실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영화는 사회적 소문과 편견만으로 판단하고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하는 인간 심리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화는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영희가 진실을 고발하다가 사장에게 밉보일 때 영규는 "그냥 쥐 죽은 듯이 살면 안 돼?"라고 말한다. 영희는 예의 그 어눌한 목소리로 그렇게도 살아봤다, 그렇게 계속 살아왔는데, 당신이 나에게 잘해주면서 용기가 생겼다고 말하는 영희.


영희의 고백은 거대한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도 작은 인간적 연결이 가지는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그리는 부조리함은 단순히 좌절과 불행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도 인간적 용기와 연결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부조리함은 늘 존재해 왔다. 부조리함 속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생존만을 위해 부조리함을 묵인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부조리함 속에서도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방법을 찾으며 따뜻하게 살아가려고 했던 영희의 삶. 영희는 사실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