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개인적 시간이 필요한 이유
둘째 : 엄마 뱃속에 내가 들어 있었어?
나 : 그렇지. 엄마가 열 달 동안 너를 뱃속에 품으면서 힘들게 조심스럽게 지내다가 네가 태어난 거지. 엄마 정말 힘들었겠지?
둘째 : 응. 그런데 엄마 뱃 속에 나랑 형이랑 동생까지 있었으면 엄청 배가 불렀겠다
나 : 아냐. 한 사람 씩 있었지. 형이 먼저 있다가 나오고, 네가 나오고, 동생이 나온거야.
둘째 : 그렇구나.
나 : 이렇게 힘들게 엄마가 너희를 뱃속에 품고 있다가 엄청 아프게 낳았어. 그러니 너희를 사랑하겠어? 안 사랑하겠어?
둘째 : 사랑하겠어.
(여기서 첫째가 급 발동)
첫째 : 그럼 아빠 그렇게 힘들게 낳아서 사랑하면 우리한테 화내고 짜증 좀 내지 말아줄래.
나 : .....어...응...미안해...
나름 아이들에게 엄마아빠가 너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설명해주려다가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왜 맨날 혼내냐고. 그렇게 울분을 터뜨린다. 이 대화 이후에도 "엄마아빠는 너희한테 화만 내진 않잖아. 좋은 일도 있지 않았어?"라고 물으니 단호하게 말한다. "없어!". 그러자 둘째가 좀 미안했는지 "나는 있어"한다. 그러니 첫째가 "뭔데?"라고 묻는다. 둘째 왈, "글쎄 기억은 잘 안나." 첫째가 꾸짖는다. "기억 나지 않는건 없는거야!" 둘째가 또 항변한다. "아냐 있어. 대공원 간거." 그러더니 조금 미안했는지 둘 다 좋았던 기억을 하나 둘 이야기한다. 놀이 공원, 동물원, 점핑 파크, 바다, 오락실 등등 엄마아빠가 주말에 데리고 놀러 간 곳들을 하나둘 이야기한다. 그 말들을 들으며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엄마아빠와의 긍정적인 정서적 교류의 기억이기 보다는 본인들이 즐겁거나 신기했던 기억들만 이야기를 한다. 한편으로 돌아보면 정말 첫째 말대로 난 잔소리하다가 욱해서 화를 크게 내는 걸로 대부분 아이들과 대화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명확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을 쏟아내어 놓고선 좋은 정서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여느 아빠들과 달리(?)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함께한다. 5시 반 이후로는 거의 매일 함께하고, 주말은 종일 함께 있는다. 셋째가 태어난 이후로 개인적인 약속을 거의 잡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의 총량은 평균 이상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시간들 중 아이들과 교류하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몸이 조금 피곤하기도하거나와 사적인 만남을 거의 가지지 않고 집에서 가족들과만 보내고 있자니 답답함도 컸다. 결혼 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맘대로 살다가 너무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심적으로 우울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걸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폭발시킨다는 것이다. 참아야지...참아야지...그러면서 결국 했던 말 대여섯번 반복하다가는 야!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그나마 조금 아이들이 좋았던 시간들은 기억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도 아이들도 상처만 남는 시간이 된다.
아이들이 문제가 아닌 것은 안다. 막 엄청 장난꾸러기이거나, 말 지지리도 안듣거나 하지 않는다. 문제는 내게 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머리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잘 다독이고, 현 상황을 수용하고,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다짐 또한 수백번 한다. 그런데 이런 다짐이 모래 위 성으로 순식간에 휩쓸려오는 화라는 파도에 휘말려 스르르 사라진다. 아이들 행동을 잘 해석하고, 감정을 잘 읽어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대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불같은 화가 치솟아 올라 평상 시의 모든 생각을 잡아먹어버린다. 그리고 폭발. 이 과정의 반복과 누적. 그 결과가 위의 대화일 것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데 이렇게 부정적인 결말로 남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첫째나 둘째가 기억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로선 억울하다. 그래도 원하는 것들 해주고, 심심하지 않게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부모로서의 억울함이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느꼈으며, 함께한 시간의 축적으로 아이들에게 새겨진 기억과 부모에 대한 정서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시간을 잘못 쓴 것이다. 기억나는 것도 없고, 부모와는 짜증과 화라는 정서적 교류만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연결이 잘못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것은 이미 언급했던 나의 부적응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내 역할에 내가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요즘 간혹 이런 생각도 했다. 요즘 내가 내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무기력하다는 사실말이다. 30대 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고, 누가 뭐래도 내 할 말은 한다는 듯 때론 싸가지 없게 굴기도 했던 것 같다. 옳던 그르던 그렇게 살면서 자존감이 높아 스트레스 또한 크게 받지 않는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하나, 둘, 셋이 되고나니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했다.
그렇게 활동 범위도 좁아지고, 사회 생활 속에서 관계도 협소해지고, 하고 싶은 일들도 하나둘씩 포기하였다.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도 무얼 해야할지 몰랐고, 시간이 남아도 연락할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렇게 자초한 고립감 속에서 아이들 재우고 티비를 보거나 유투브를 보는 것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한 3~4년 여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요즘은 머리까지 굳은 것 같다.
지금 나를 보면 내가 봐도 여러모로 참 한심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싶으면서 30대 때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 했던 말들이 막 부끄럽기도 하다. 참 지금 생각해보면 거창한 고민, 뭣도 모르면서 나불댔구나 하는 생각조차 든다. 이렇게 악순환에 빠져 들다 결국 다시 애들하고 시간 보내다가 화내고선 애들 재우고 티비나 보고 있다.
그러니 개인적인 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중요하다. 사실 애들 재우고 나면 대략 10시부터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 된다. 활동적이진 않더라도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이나 관심사를 그 시간에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도 하지 않으면서 한탄하고 있으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변화된 결과를 바라고 있으니 될리가 있나. 그럼에도 하물며 유투브나 티비나 보고있긴 하지만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언뜻언뜻 아이들에게 한 행동을 반성도 하고, 다시 다짐도 한다. 그리고 다음날은 화를 내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길어지기도 한다.
나야 겨우 이정도이지만 육아를 전담하거나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모들에게 자신만의 개인적 시간은 꼭 필요하다. 가족들은 그걸 도와야한다. 물론 아내도 나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 나만의 시간을 소비적으로만 써서는 안된다. 생산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도록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소비적인 시간 탕진은 악순환을 잠시 멈추게할 뿐, 사라지지 않고 다시 시작하게 한다.
아이들을 대하는 내 가장 큰 문제는 현재 나의 판단으로는 나의 자존감 부족과 부적응이다. 아이들이 평균적인 모습이며, 어떤 면에서는 평균 이상의 태도를 보임에도 나와 아이들의 유대감과 정서적 연결이 약한 이유는 부모인 나에게 있다. 그런데 내가 부모 역할에만 매몰될수록 더 이 문제는 풀리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육아가 내 인생 최대의 목표는 아니다. 주어진 역할 중 하나일 뿐. 어쩌면 나는 육아를 핑계로 나를 방치하고, 나태해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핑계거리 아닌가? 귀찮은 거 다 육아 핑계로 안하기. 육아는 내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특정 시기에 행해야할 과제일 뿐이다. 물론 자신의 성취보다는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과제이기 때문에 내 인생의 목표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허나 생각해보면 내 아이의 성장을 돕는 것이 내 성취이기도 하다. 둘을 딱 잘라 나눌 수는 없는 것 같다.
우선 순위가 있다면 육아 이전에 나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아란 그 과정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놓인 과제 중 하나인 것으로 생각해야한다. 육아에만 몰빵하면 안된다. 육아와 병행하는 것이어야한다. 평생을 자신을 사랑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병행하는 일들 중 하나인 것이다. 둘의 균형을 이루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며 곁에 있어주기만 하는 양적인 기여로 육아에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 속에서 괴로워한 것이다. 나의 시간과 육아 시간의 균형잡힌 분배 속에 아내와 함께 시간과 정성을 나누어 아이들 곁을 지켜야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해야겠다.
근데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