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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외인 Feb 21. 2018

무기력에 대한 관점의 전환과 초대

무기력의 비밀(김현수)을 읽고

이 책을 내 방식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학습된 무기력에서 학습된 낙관주의를 향하는, 무기력에 대한 관점의 전환과 초대


이 책의 첫 페이지를 펴면 저자의 자필로 쓰인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기적처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혼내지 않기” 뭔가 거창하고 학술적인 방법론에 따른 서술과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로 포장된 멋들어진 수사가 아니다. 따뜻한 시선을 담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을 제일 첫 장에서 저자의 친필로 맞이하는 순간, 무기력의 비밀은 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일상으로 파고 들어온다.


이 책은 크게 두 챕터로 나뉘었다. “Part 1 무기력 시스템 이해하기”와 “Part 2 무기력한 아이들 돕기 –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법”이다. 내 경우 책의 전반부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무기력을 살피게 되었다. 대상이 학생들이었지만 어른이라 불리는 나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 한편 현재의 내 상태를 무기력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면서 나도 알지 못한 채 나 역시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기력의 스펙트럼에 대한 글 중 스스로가 스스로를 더는 돕지 못하는 상태인 helplessness(無助感), ‘그냥 지낸다’와 ‘의지로 이렇게 지낸다’는 의욕을 잃은 상태인 avolition, 희망이 없는 상태인 hopelss(無望感). 이렇게 무기력이라 통칭되는 상태를 좀 더 세분화하여 자신의 무기력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pp36~37).


첫 번째 파트의 3장 ‘관점의 전환, 무기력의 숨은 의미’는 소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변화를 이끈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무기력이 단순하지만은 않음을 알게 해준다. 그 구성은 아래와 같다.


관점의 전환① : 무기력은 결과다(인과론적 관점)
관점의 전환② : 한 아이의 무기력은 한 세계의 닫힘이다(정신분석적 관점)
관점의 전환③ : 무기력은 슬픈 협력이다(관계론적 관점)
관점의 전환④ : 무기력은 절망이자 자기학대다(내면적 관점)
관점의 전환⑤ : 무기력은 피도다(생활적 관점)
관점의 전환⑥ : 무기력은 트라우마 상태, 아이들은 시스템의 부상자다(트라우마적 관점)
관점의 전환⑦ : 진짜로 무기력한 것은 어른들이다(역설적 관점)


이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관계론적 관점, 내면적 관점, 역설적 관점이 새롭게, 그리고 깊은 공감을 가지고 읽은 부분이다. 관계론적 관점의 내용 중 아래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무기력하게라도 지내면서 버티는 것은 아이들의 슬픈 협력이었다.(p59)


이 문장을 읽으면서 ‘슬픈 협력’이라는 단어는 내 주위를 둘러싼 실체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 속에 나도 포함하면서. 나 역시 슬픈 협력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다.


내면적 관점의 내용 중 “그런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미워했던 것보다 더 자신을 미워하면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무언가를 다시 하려면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극심한 자기혐오, 자기애에 항복하고 있는 상태였다.(p62)”를 읽으며 어쩌면 자기혐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무기력이라는 이름으로 순화시켜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만큼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를 지키고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합리화의 노력들이 서글프면서도 한편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라도 생존해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이.


역설적 관점의 내용 중 “바라는 것은 많고 뜻대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는 어른들이 내는 화는 과연 그 과녁이 어디일까?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위니컷은 이렇게 말했다.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있는 어른들은 사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p70). 그리고 “결국 무기력한 아이들에 대한 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자신을 향한 화로 바뀌어서 증오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함께 포기한 채로 지내게 된다. 우리 자신도 무기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난 상타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방식, 다른 전략을 찾아야 하는데 아마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본 일이 아닐 것이다.”(p71)은 말 그대로 역설적 관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충분히 와 닿게 해 준 문장으로 기억에 남는다.


이어 4장 ‘무기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회적 무기력’과 5장 ‘무기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 가정과 학교에서의 무기력’으로 무기력의 형성 과정을 밝히고 난 후 흥미로운 6장으로 넘어간다. 6장 ‘무기력의 심리유형별 특징’은 3장과 마찬가지로 소제목을 보는 것으로도 새로운 관점을 익힌다.


무기력 심리유형① : 아이의 잠재력을 도둑질하기(과잉보호 무기력)
무기력 심리유형② : 자신감 잘라내기(과잉기대 무기력)
무기력 심리유형③ : 존재감 없애기(방임, 결핍 무기력)
무기력 심리유형④ : 모험과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부모와 사회(순응 무기력)
무기력 심리유형⑤ : 고통을 마취하는 확실한 방법, 중독(중독 무기력)


이 중에서 세 번째 유형에서 지금 나에게, 그리고 학급에서 내가 아이들을 만날 때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 내용을 만나게 되었다. 그 말은 곧, 그 내용이 바로 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 일상과 이 책의 내용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쉽게 말하면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등 감정적 교류를 하지 않고 시간표를 짜서 할 일만 하게 하는 가정이다. 재미있게 같이 놀아주는 시간이 없고, 영화나 미술관은 숙제 때문에 다녀와서 감상문이나 과제를 제출하면 그만이지 서로 소감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공부만 잘하면 되고,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관심이나 지원을 단절하는 상태의 가정이다. (중략) 나는 한 아이의 표현을 빌려 이런 가정을 ‘공지사항 가정’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마치 하나의 회사처럼 중요한 공지사항만 공유하고 각자 자기 할 일을 충실히 하면 ‘굴러가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정. 그래서 힘든 문제가 생기면 각자 해결해야 하는 가정. 이런 ‘공지사항 가정’에서 정서적인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은 급격히 ‘기능’이 떨어져 어쩔 줄 몰라하는 상태가 무기력으로 이어진다.”(p105)


 이 책의 앞부분에 소개한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이나 ‘기획된 가정’이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의 내용이다. 정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을 어느 순간 나는 관리와 안전, 효율의 이름으로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뿐. 그것이 다시 정서적 교류로 바로 이어지지 않고 있음은 서글픈 일이다. 단, 그러한 정서적 교류의 필요성을 환기했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큰 수확임에 분명하다.


첫 번째 파트의 마지막 장인 7장, 무능함을 보여주는 회피의 4가지 패러다임에서 드라이커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과잉열망(자기가 원하는 만큼 잘할 수 없다), 경쟁(다른 사람들만큼 잘할 수 없다)), 압박(자기가 해야 하는 것만큼 잘하지 못한다), 실패(자기가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다)’(p125)를 소개하며 각 요소가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설명한다. 이 중 특히 ‘압박’의 경우 “끊임없이 ‘잘해라’, ‘기본을 해라’, ‘제대로 해라’라는 압박을 받는 아이들은 어느 시점부터 차라리 기대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내보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 부모와 교사가 정해놓은 기준을 달성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 불편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p129)”는 단락은 ‘기본을 잘하자’, ‘선을 지키자’라는 나의 학교에서의 일상적 언어들조차 이에 해당하는지를 돌아보게 하였다. 정말 ‘몰라서’ 안 하는 것과 ‘알지만’ 안 하는 것의 차이도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알려주기 위해서 기본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압박인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보았다. 칼로 무 썰 듯이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일상의 다양한 결들이 있다. 그것은 큰 틀을 염두에 두고 각자가 현실 정황에 맞게 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곁들인다. ‘방향’을 ‘방법’으로 완벽히 일치시키지 않고, 그 방향 안에서 맞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파트는 이제 본격적인 방법, 도움을 주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책의 시작은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로 열고 있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마아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환대’.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Part2의 1장은 ‘변화를 이끄는 마음의 심폐소생술 ① 역설과 긍정’이며, 2장은 ‘변화를 이끄는 마음의 심폐소생술 ② 환대, 참여, 존중’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저자는 ‘심폐소생술’이란 소제목을 붙였다. 죽음에 가까웠던 생명을 깨우는 응급조치이자, 치료의 첫출발이 심폐소생술이다. 심폐소생술만으로는 꺼져가던 생명을 살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온전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더해져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이벤트나 큰 수술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들이다. 말 그대로 Part2의 1, 2장은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시작이며, 무기력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생명력을 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출발선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잊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나만 걱정하는 거냐? 넌 뭘 하는 거니?’라는 생각 또는 말을 하는 순간 출발선에서 멈추선 정도가 아닌 퇴보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 접근 역시 간단한 방법이지만 쉽지 않은 방법이다. 앞서 첫 번째 파트에서 말한 무기력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고, ‘1) 반복하던 잔소리 멈추기, 2) 진심 어린 걱정 표현하기, 3) 잘해주기.(p152)’ 이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행동이라 함은 말을 포함, 구체적 행동과 몸짓, 눈빛 등의 비언어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아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긍정은 역설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역설에 기초한 긍정적 관점으로의 전환은 휴전을 부를 뿐 아니라 평화의 계기를 만든다. 즉, 긍정은 관계 회복을 불러온다. 아이가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관점을 가지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수용과 함께 아이를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시선뿐만 아니라 말까지 따뜻하게 건넬 수 있게 된다.(p154)”

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내가 변해야 하는 역설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는 결과를 정해놓은(아이가 아닌 나 자신의 기준으로) 변화여서는 안된다. 의도적 변화는 맞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마음의 변화, 진심 어린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Part2의 2장은 ‘환대 : 숨길을 열어 주는 길(기도확보)’, ‘참여 :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는 일(심장 압박)’, ‘존중 : 산소를 공급하는 일(산소 공급)’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환대’는 존재와 소속에 대한 환대이다. 그 아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환대하고, 그 아이가 속한 공동체에 함께하고 있음을 환대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환대보다 나에게 더 다가선 것은 소속에 대한 환대이다. 개별화되어 가는 세태 속에서 소속감이란 것은 집단이기주의나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부정적 현상으로 비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소속감이라, 공동체에 속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안위감이란 것은 사실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다. 존재의 환대는 소속에 대한 환대와 맞물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참여’는 ‘할 일 없는 아이’를 ‘할 일 있는 아이’로 만드는 일이다.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다. “참여가 확장되면 아이들은 점점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긴다. 소속감은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자신감을 제공하는데, 특히 공헌과 기여에 의한 참여를 통한 소속감 강화가 효과적으로 발휘된다면 스스로 할 일을 찾게 된다.(p163)”. 환대와 참여와 소속감, 그리고 할 일 있는 아이. 그중 아이가 할 일의 결과는 예단, 확정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존중’은 이 한 문장으로 설명된다. “존중 없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p165)”. 이때에 내가 든 첫 생각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내가 존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이다. 눈앞의 아이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나 자신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 발 나아갈 수 있다는 방증이다. 그것은 관점의 전환이며, 그것은 내 일상 속 말과 행동의 지속적 변화를 통한 내면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아이를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나 자신과 아이들을 그대로 두지 않을 생각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최소한 지금보다 내 마음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Part2의 3장 ‘무기력에서 벗어나 다시 살도록 돕기 – 격려’는 앞서 말한 역설, 긍정, 환대, 참여, 존중이 어른들이 무기력한 아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요소라면 이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아들러는 격려를 ‘아이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실수나 실패를 해도 자존감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했다. 격려의 영어 표기 ‘encouragement’는 ‘용기’라는 뜻의 ‘couragement’에 접두어 ‘en’이 붙은 것이다. 즉 원래 격려는 ‘용기를 다시 갖게 하는 것’이다.”(p170)는 문단과 루돌프 드라이커스의 ‘격려의 3가지 요소’로 ① 낙담하지 않게 하는 것, ② 다시 도전할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 ③ 주변 사람들이 너의 성공을 간절히 원하고 이음을 전하는 것(p172)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유의할 점으로 ‘내가 필요할 때는 곁에 없는 사람(p172)’가 않도록 실패할지 알면서도 방임하지 않기와 ‘칭찬한다고 한 것이 잘못돼서 비교가 되는 상황(p175)’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를 통해 ‘격려는 기회를 만든다.(p178)’를 기억하면서 ‘아무리 아이를 돕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해도 가급적 아이의 동의를 얻어서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p182)’는 첨언을 한다.


격려와 관련하여서 나는 ‘그럴 줄 알면서도 보고만 있고, 그래 놓고는 우리가 실패하면 즐긴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상담 내용이 내 모습에 투영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이가 움직이지 않아서 나는 기다린 것이다.’는 말을 되뇌는 나를 본다. 그 이유로 우치다 다츠루의 ‘나룻배를 건너 주는 사람’이라는 비유나 ‘징검다리’로서의 교사 역할 자리매김 등을 말하고 다녔다. 이것이 좋은 말로 포장한 ‘그럴 줄 알면서도 보고 있는’ 어른의 모습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본인의 실패를 즐기는 어른’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하소연 중 하나는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뭘 하자고 해도 본인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와 상의하여 시도하고, 아이가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것이 이 책이 말하는 격려의 방식인데 나는 그것과 어떤 다른 차이, 입장을 가진 채로 아이들을 만나왔던 것이다. 일종의 방임의 합리화를 통한 회피였는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한다. ‘적극적 기다림’. 이 표현이 다시금 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았다.


Part2의 4장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유형별 방법 – 결핍형 무기력, 과잉열망형 무기력, 오래된 무기력’을 다루며 그 현상과 대하는 방법론을 다룬다. 사실 이 장은 Part1에서 다룬 ‘ helplessness(無助感)’, ‘avolition’, ‘hopelss(無望感)’와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서 조금쯤 의문을 품고 읽었다. 하지만 용어 자체보다 무기력한 아이의 유형 구별과 그 유형에 따른 관계 형성법에 관한 이야기는 실질적이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오래된 무기력에 관한 아이들이 “‘무엇을 하자’는 사람에게는 전문가이고,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지내봐’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비전문자다.(p200)”이다. 이 역시 책을 통해 일관적으로 흐르는 무기력한 아이들에 대한 관점과 행동의 역설, 낯설게 보기의 연장이다.


마지막으로 Part2의 5장 ‘무기력한 아이들을 돕는 지원 전략 - ① 회복탄력성 발휘하도록 돕기, ② 관계를 통한 도약하기, ③ 성취감이라는 기름 붓기’이다. 마지막 줄은 덧불일 것 없이 밑줄 박박 그은 몇몇 문장만으로 정리되며 이 문장들은 현재 지금 내가 어느 지점에서 실수, 실패를 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는 문장들이다.


무기력한 아이들과 잘 지내거나 돕겠다고 결심한 어른들이 같이 무력해지는 이유는 아이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접근하기 때문이다. <중략> 어른들이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회복력을 발휘하도록 이끌면 아이는 이전에 자신이 무기력을 경험한 것과 똑같이 느끼게 된다. <중략> 아이들이 회복탄력성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아이들의 에너지 수준에 맞춰서 걸여야 한다. <중략> 그들의 힘으로 극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pp206~207)
그동안 자신의 꿈을 잃고, 열정과 동기를 발휘할 기회도 잃고 그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역경의 본질이다. 풍요와 번영의 시대에 그렇게 된 것은 자기 탓이므로 역경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에게 절대 빈곤, 전쟁, 가시적 폭력, 독재의 경험이 없었다고 해서 역경이 아닌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과 경쟁이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옥죄는 지독한 역경이고, 절대적 결핍이 주는 고통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격차와 차별이 주는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이다.(pp207~208)
놀아주는 친구를 제외하고 상담해줄 만한 타인이 부족하다. 나와 함께 세계와 미래를 논하고 나를 상처 주지 않으며 거울에 비쳐줄 수 있는 대상의 결핍으로 인해 아이들은 공허 속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중략> 라캉이 ‘나는 너다’라고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은 타인인 수많은 ‘너’를 경험하며 ‘나’를 형성하는데 정말 중요한 ‘너’의 기근으로 인해 아이들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p212)
기본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망감만 안겨준다.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해냄’을 조성해주고, ‘해냄’을 가능하도록 해 주고, ‘해냄’을 축복해주는 과정에서 빛난다. <중략> 누군가에게는 기본인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기력한 아이들을 돕는 핵심이다.(pp215~216)


어른들의 에너지와 속도에 맞추어 아이들을 돕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 절대빈곤과 풍요의 시대에 아이들이 겪는 역경은 어른들의 입장에서 전혀 역경으로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에게는 크나큰 역경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나를 알기 위해 너를 많이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한 관계가 주는 에너지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해냄’을 조성, 지원, 축복하는 일. 이런 관점의 이야기는 나에게 새로울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 나의 태도 속의 似而非적 요소를 가려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때 앞부분과 뒷부분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다가옴을 앞서 말했었다. 앞부분은 나의 무기력을 살펴보게 해주었다. 뒷부분은 내가 교사, 부모인 어른으로서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앞부분은 나의 무기력을 완화시켜주었다. 이 독후감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무언가를 하게 만들었고, 해내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이 경험이 나이 외의 너에게 가닿게 하는 일이겠다 싶다. 머리로 이해했다는 것이 바로 앎과 행위로 옮겨지지 않는 일반적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심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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