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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05. 2022

2019년 Vancouver Sun Run

(폴폴 작가님의 '목에 뭐가 걸린 줄 알았는데 마음에 걸린 거였어요'의 비트를 받은 변주곡입니다)




달리기를 끔찍이 싫어합니다.


왜냐구요? 느리거든요.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보통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하는 일을 하기 싫어합니다. 특히 남들 앞에서는요. 무슨 영화처럼 천재 기타리스트가 연주 중에 불우한 사고를 당한 후, 그 트라우마 때문에 기타 연주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거의 없죠. 영화는 보통 주인공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시 기타를 잡아 관중 앞에서 멋진 연주를 하는 걸로 끝나잖아요. 저랑 달리기 입장에서 보면 그런 건 싫어한다는 표현을 붙이기 과분합니다. 잠깐 '냉담'했다고 봐야죠.


하지만, 돈 없고 빽 없는 집에서 태어나 노력하고 경쟁에서 이겨야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교육받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남들 앞에서 자신이 못하는 걸 보여주고 그걸로 비참한 기분이 되는 걸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안 하게 되고. 안 하니까 더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그런 컴플렉스를 간직한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회식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노래를 강요하거나 그런 건 질색했어요. 기껏 노래를 시켜놓고는 듣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또 왁자지껄 떠드는 걸 보고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지만 말이죠. "사람들은 남이 달리기가 느리든, 음치이든 간에 별로 관심이 없다."라는 걸요.


아무튼,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안 하다 보니까 군대에서도 구보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훈련소에 처음 들어가서 전투화를 신고 구보를 하는데, 러너스 하이는커녕 턱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자세가 불량해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고, 그것 때문에 악관절에 영향을 준다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그렇게 한참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니 훈련소 조교가 세상 다 산 도인의 얼굴로 한마디 하더군요. "힘드냐? 그래도 달리기는 스타팅 라인과 피니시 라인이 명확히 있잖냐. 인생 살면서는 그런 게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관등성명을 외쳐야 했던 저로서는 옆에서 말을 자꾸 거는 것조차 짜증났었지만요.


사실 우리가 살면서 느린 달리기 정도는 비교가 안될 만큼 창피한 일들이 많잖아요. 무수히 많은 개쪽을 당하고, 몇십 년을 이불킥할 만한 낯 뜨거운 실수를 연발해도 당장 접시물에 코를 박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비록 저는 아직도 20대 때 저지른 실수들이 떠올라 자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건 다 타인의 무관심 덕분일지도 몰라요 (그것도 안되면 저처럼 이민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못하기 때문에 안 하고,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달리기는 좀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왔습니다. 또 사실, 어른이 되면 달리기를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죠. 선로에 막 도착한 전철을 잡아타는 일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2019년은 제가 냉동 / 에어컨 출장 수리 일에 아주 진력을 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육체노동이 점점 버거워져 가기도 했고, 짬밥이 늘어갈수록 일이 쉬워질 줄 알았는데 회사 입장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시니어 기사들의 능력을 최대한 쥐어짜야 하는 형편이었던 거죠. 그래서 육체노동과 고객 서비스에 일주일 내내 시달리고 오면 주말은 좀 드러눕고 싶었거든요. 근데 아내 생각은 다르더라구요.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최대한 밴쿠버 액티비티를 즐기자...라는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남편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매주말 이벤트를 만드는 아내와, 더 이상 같이 놀기 힘들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


매년 4월이면 밴쿠버에서 작은 마라톤 행사를 하는데, '밴쿠버 썬 (Vancouver Sun)'이라는 신문사에서 주최를 해서 이름하여 '밴쿠버 썬런 (Vancovuer Sun Run)'이라고 합니다.  말이 작은 마라톤 행사지, 사실 밴쿠버 시내에서 도로를 막고 벌어지는 행사 중에는 가장 큰 행사예요. 그리고 (더 늙기 전에!!) 아내가 썬런을 뛰고 싶어 하더라구요. "어. 그럼 수고해."라고 짧게 답하고 달아나려고 하는데 금세 붙잡혔습니다. 세월호 5주기 밴쿠버 추념 행사와 비슷한 시기니까 세월호 티셔츠를 입고 뛰면 어떻겠냐고 꼬드기더군요.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지만, "응? 그러면 차라리 마라톤 코스 주변에 세월호 부스를 설치해서 거기서 응원 및 홍보 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뛰지 말고 얌전히 서서?"라고 말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신청 마감일쯤 되자 아내가 다른 제안을 하더군요. 19년을 허투루 같이 살아온 것이 아닌지 절 너무 잘 알았던 거죠. 피니시 라인 근처에 새로 독일식 맥주집이 개장을 했는데, 따끈하게 구워낸 프리첼과 삶은 송아지 소시지를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걸 사주겠다지 뭐예요.








아놔... 도떼기 시장도 그런 도떼기 시장이 없었어요. '조지아 스트리트 (Georgia Street)'라고 하면 그래도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가장 큰 도로인데, 거기에 정말이지 사람들이 꽉 차더라구요. 출발선 옆에는 임시 철골구조물을 만들어두고는 거기서 행사 진행을 하더군요. 그 바로 옆에선 밴드가 공연도 하고 말이죠.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2015)>에서 인상적이었던, 차에 매달린 채 기타를 연주하는 밴드가 딱 생각이 났습니다. (보통 이런 마라톤 행사에서는 평균 기록이 느린 사람들이 나중에 뜁니다) 막 이제 저희 그룹 차례가 되어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조지아를 막 벗어나기도 전에 먹장구름이 끼더니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폭우는 곧바로 우박을 동반하더라구요. 이걸 보고 가만있을 제가 아니잖아요? "이것 봐! 내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하늘도 싫어하잖아!" 아내가 짧게 말하더라구요. "닥쳐." 




사실 전 비 맞는 걸 무척 좋아해요. 그것도 흠뻑 젖을 때까지 맞는 걸 즐깁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가난에 대해 무척이나 컴플렉스를 많이 안고 자라와서 그런 건지, 왠지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는 건 그렇게 좋더라구요. 부자 아빠를 둔 친구도 고위 공무원 아빠를 둔 친구도 나랑 똑같이 젖을 수밖에 없거든요. 왠지 비에 젖어도 꿋꿋이 할 일을 하는 자신이 좀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으이구... ㅋㅋㅋ 겁쟁이들. 이깟 비가 뭐가 그리 무섭다고... 산성비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 나처럼 진작에 대머리가 되면..." 그날도 이렇게 킬킬대면서 쏟아지는 우박 사이로 뛰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더라구요. 대머리가 문제가 아니라 러닝화가 죄다 젖었어요. 질척이기도 질척였지만, 당장 발 살갗이 계속 젖어 불어 오르니 물집이 잡히고 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벌 양말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러고 나니 뒤늦게 옛 격언이 생각나더라구요. "소나기는 피해 가라"



버라드 다리 (Burrard Bridge)


곧이어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었지만, 신발 속에 물이 출렁이는 건 여전했어요. 갑자기 용맹하게 비를 맞아 질주하는 남편을 따라 뛴 아내의 신발도 어지간히 젖었을 테지만, 생각보다 군소리 없이 뛰고 있는 남편이 기특해서인지 이때는 별 불평을 안 하더군요. 비가 그치고 하늘이 밝아지니까 주변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규모가 큰 행사라서 그런지 온 동네 비영리 단체에서 부스를 만들어 응원을 하고 있더군요. 사실, 우리가 뛰던 그룹 사람들은 기록은 상관없이 그야말로 '참가'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라, 조금 뛰다가 길거리 공연 보고, 조금 걷다가 다리 위에서 풍경 감상하고.. 의 반복이었습니다. 저희도 뭐, 10km 기록은 생각도 안 나요.


밴쿠버 노숙인들을 위한 의류 기부함


다운타운 스텐리 공원 해변 도로


뻥 뚫린 '캠비 다리 (Cambie Bridge)' 한복판을 달리며 건널 때는 짜릿하기까지 하더라구요. 낮게 깔린 구름 아래로 밴쿠버 다운타운의 빌딩 숲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에너지가 바닥을 쳤는지 다리 중간 지점에서 맞바람이 불어오니까 완주 의욕이 뚝 떨어졌습니다. 이 근처 가까운 데에도 그럭저럭 먹을만한 맥주집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왠지 젖은 셔츠와 신발이 더 무겁게 느껴졌어요.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으로 빗 속을 질주한 거야. 그냥 처마 밑에서 잠시 숨어있을걸. 어차피 기록경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근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다리는 움직였는지, 어느새 결승점이 시야에 들어오더군요. 쿠도 칸구로의 일드 <키사라즈 캐츠아이 (2002)>를 보면 고교 야구부 출신 주인공들이 구보를 하면서 "맥주, 맥주 ( ビール,  ビール)"를 외치면서 달리는데, 이날 막바지 스퍼트도 거의 그런 식이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따뜻한 프리첼과 시원한 맥주밖에 없었어요.


캠비 다리 (Cambie Bridge)


BC 플레이스


하지만, 도착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양말을 사는 일이었죠. 구멍 숭숭 러닝화는 그럭저럭 신을 수 있을 정도로는 마른 것 같은데, 양말은 도저히 계속 신을 수 없는 상태였거든요. 발에 물집도 많이 잡혔고. 완주 상품 수령은 결승점 옆에 있는 BC 플레이스 안에서 했는데, 뭐... 여러 기업에서 참여한 박람회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완주 상품이라기보다는, 마라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제품 프로모션 장소로 사용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것저것 구경을 하기에는 맥주가 너무 땡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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