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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Dec 22. 2022

강황도(薑黃道)의 길

나의 카레 일지

(작은나무 작가님의 <카레를 만들면 생각나는 사람>의 멜로디를 받은 변주곡입니다)






내 기억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에서부터 카레에 대한 내 진심은 이어져왔다. 저녁 식사 반찬으로, 도시락으로, 캠핑 음식으로, 자취 음식으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먹어도 즐겁게 먹을 수 있었던 카레. 소고기 안심을 넣어도, 불고기감을 넣어도, 심지어 돼지고기를 넣거나 그냥 양파, 감자, 당근만 넣어도 충분히 맛을 내었다. 정말이지 이가 노랗게 되고 두 뺨이 노랗게 물들 때까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마치 종교처럼.


각 가정의 카레는 무슨 재료를 쓰느냐 보다, 오히려 썰어둔 재료의 크기, 육수를 쓰느냐의 여부, 물과 카레 가루의 배합에 따라 더 달라졌는데, 저 마다 엄마손 표 김치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만큼, 카레 역시 울 엄마가 해준 것에 대한 짙은 향수를 품곤 했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전 세계의 모든 카레에 평등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 "카레가 아니라 커리죠!" 라고 하는 자의식 과잉의 광고 카피에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자칭 '커리'를 차별대우하지는 않았다. '커리'든 '카레'든, 일본식 '카레'든 한국식 '카레'든 상관없이, 매콤 짭짤한 동시에 눅진눅진 기름지고, 거기에 MSG까지 듬뿍 넣어 온갖 야채와 함께 푸욱 끓여 낸 국물을 싫어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특정국가의 과자를 카피해 놓고도 그 나라 두 대도시를 괴멸시켰던 폭격기의 이름을 딴 호쾌한 과자 'B-29' 역시, 그가 가진 카레맛 때문에 오랫동안 애정했었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이 밥을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궁금해했는데, 저녁을 뭘 먹었는지 물어왔을 때 내 대답의 십중팔구는 카레였다. "오늘은 뭐 해 먹었니?", "카레요.", "오늘 저녁은 뭐니?", "카레요." 이런 한심한 문답이 며칠간 반복되자 어머니는 한탄하듯 내뱉었다. "넌.. 참... 치매는 안 걸려서 좋겠다." 그때 나이 갓 스물 하나였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카레 가루 하나 가지고 별 실험을 - 카레 볶음밥, 카레 우동, 드라이 카레, 카레 닭조림 등 - 다 해봤었지만, 역시 카레의 왕도는 뜨근한 국물을 갓 지은 흰쌀밥에 비벼 먹는 것이었다. 여기에 총각김치 하나 정도가 추가되면 금상첨화다. 깍두기나 뭣하면 단무지도 그럭저럭 봐줄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완벽한 커플은 총각김치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간혹 식초+간장 베이스의 소스를 만들어 곁들여 먹기도 했었는데, 내게는 총각김치 만한 게 없었다. 총각김치 정도의 존재감이 없다면 카레의 강력한 향신료를 이겨내기 힘든 것이다.


그래. 당신은 평생을 두고 카레에게 충성을 바쳐왔느냐.. 하고 묻는다면, 잠시동안 카레와 소원했던 시절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문제집과 참고서를 가방 가득 싸들고 다니던 고딩 시절. 당시에 들고 다녔던 스텐 반찬통의 밀봉능력은 지금껏처럼 훌륭하지 않았어서 몇 번 책들을 노랗게 물들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가오에 죽고 가오에 사는 대한민국 고딩이 창피하게 도시락 가방을 따로 들고 다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충성심을 잠시 접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지. ‘카레가 두뇌에 그렇게 좋다더라’, ‘인도 사람들은 카레를 먹어서 구구단을 19단까지 외운다더라’ 하는 등의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도, 사랑과 미움은 종잇장 한 장 차이라더니, 한번 참고서를 노랗게 물들인 카레에 대한 실망은, 그보다 노란 참고서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당했던 트라우마는, 카레에 대한 연심의 회복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냉담을 마치고 다시 카레의 품에 안기게 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우릴 둘러싸고 있는 이 사회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망가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 절망과 분노로 정신없이 들이키는 술이 몸에 좋을 리는 없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셔서 매일 같이 토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다시 앉아 술을 마셨으며, 토하다 토하다 녹색물(아마도 췌장액이 아닐지)이 나온 적도 서너 번에 한 번꼴로 있었고, 한번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시면 적어도 3일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었는데, 몸도 몸이었지만 술 마시고 저지른 행각이 부끄러워 쥐며느리처럼 쭈구리고 있어야 했다. 제 아무리 20대 초반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몇 달 후 40근의 고깃덩이가 떨어져 나가고 허리가 26인치가 되었으며, 알콜성 급성 당뇨로 인해 매번 식은땀과 현기증으로, 헛구역질로 고생했을 때, 가끔 화장실에서 스쳐 본 내 얼굴은 그야말로 괴물딱지 같았다. 사람 외모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때 내 모습은 그냥 “씨발럼의 세상아. 망해라!”였다. 기층민중을 등쳐먹는 자본가도, 그들을 위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군, 관, 정부도,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농락하는 사람들도, 전 세계를 희롱하는 미국도, 이딴 세상을 그냥 방치해두는 하느님도, 부처님도, 옥황상제, 천하대장군, 내 친구 ET 모두 싹 다 망해라!!


그날도 써클실인지 학생회관 어디인지 소파에 누워있었는데, 술에 꼴아본 사람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전날 밤 과음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구역질이 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지구의 자전을 몸소 느끼는 것처럼 머릿속이 빙글빙글 계속 도는 느낌이 그 한 가지고, 위장에서 발효된 알콜의 썩은 냄새가 날숨으로 내뱉어져서 들숨으로 다시 들어마시게 되는 경우가 다른 한 가지. 그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겪으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슬쩍 본 시계는 이미 등교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을 증오하고 있더라도 술에 꼴아진 채 소파에 누워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냅다 전시할 만큼 변죽이 좋지는 못했다. 그래서 팔걸이를 잡고 등받이를 밀어 끄응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정경대 후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더니 나만 빼고 세상은 다 멀쩡했다. 눈부시게 환했다.


걸음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숨을 한 모금 쉴 때마다, 메슥거리는 오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렇게 쏟아내고도 또 나올 게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녹색물이 또 나오려 하는 건지, 서늘한 가을 아침에도 식은땀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이 상태로 전철을 잡아 타는 건 불가능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입으로 걸음을 셌다. 다음 신호등까지는 몇 걸음일까, 하면서. 그러면서 가능하면 내 날숨을 들어마시지 않기 위해 숨을 내쉴 때마다 고개를 돌렸다. 상상해 보라. 어느 가을 아침, 어느 대학가에, 세 걸음 걷다가 쉬고 네 걸음 걷다가 쉬는,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숨 쉴 때마다 고개를 도리도리 하는 남자를. 30년 전에 이런 사람을 목격한 분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싶다.



조금 큰 길이 나오자, 저 앞에 문을 연 분식집이 보였다. 호돌이 분식집. 가끔 콩나물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침부터 문을 여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메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카레라이스'. 아... 저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왠지 모르게. 한 발자국 옮기는데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여전히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머리에는 식은땀이, 호흡에선 짙은 알콜 썩는 냄새가 났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아.. 아니다.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어 뛰쳐나가려는 순간 음식이 때마침 나왔는데, 당근, 감자, 양파, 완두콩만 들어있던 샛노란 카레가, 시꺼먼 먹물을 흰 두루마리 위에 일필휘지로 부욱 그어내는 듯이 내 술냄새를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술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앞에는 그냥 카레, 한 그릇의 카레라이스만 오롯이 있었다.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처럼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웬만한 냄새는 순식간에 덮어 버리는, 아마도 동급최강으로 꼿꼿하게 자기 존재감을 내세우는 음식. 처음에는 국물만 좀 몇 숟갈 퍼먹고 말려고 했으나 어느새 그릇 바닥을 박박 긁고 있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고 나니 허리가 펴졌다. 끄윽~하고 트림이 나왔다. 술냄새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오직 매콤 구수한 카레향만이 내 호흡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점점 개운해졌다. 전철역까지 걸어갈 수도, 전철을 타고 집에 갈 수도, 아니 이 정도면 오늘 밤에도 한 잔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 카레는, 팥빙수와 함께, 내 평생의 해장 동반자가 되었다.  




이후로도 카레에 대한 신앙은 꾸준하다. 한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는 을지로 3가 역 입구의 <동경우동> 집에서 카레라이스나 카레 우동을 우선적으로 소개하곤 했는데,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는 치트키였다. 아내와 배낭여행을 다닐 때에도 세계 곳곳 어디나 깔려 있는 카레 요리를 먹고 다음 날 또 동네를 휘젓고 다닐 힘을 비축하곤 했다. 지구촌 모든 음식이 모여 있는 밴쿠버에서도 카레를 먹는다. 사해동포주의 카레 러버인 나에게 밴쿠버는 카레의 백화점과 같다. 일식집에 가서는 햄버그 카레나 카레 돈카츠를, 인도식당에서는 버터치킨과 팔락 파니에를, 집에서는 나만의 닭갈비 레시피나, 프라이드치킨, 오삼불고기 요리에도 오뚜기 카레가루를 넣어 먹는다.  


언젠가 또 카레 국물이 새어 나와 가방 속 책이 젖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두 번 다시 카레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노란 물이 든 책을 말리고 있는 나에게 혹시라도 카레의 신이 나타나 '카레... 좋아하세요?'라고 내 충성을 재확인하는 질문을 한다면, 벌떡 일어나 카레신의 양 어깨를 잡고 방언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Inoue Takehiko, IT Planning, Slam Dunk, 1996 





노라조, 카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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