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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Dec 21. 2022

카레를 만들면 생각나는 사람

할인받아 싸게 구입해 둔 질 좋은 스테이크 용 소고기가 딱 한 덩이만 남아 애매했다. 구워 봤자 네 가족 입에 채 석 점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야채와 볶아 찹스테이크로 만들까, 카레를 끓일까 고민하다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니 보글보글 따듯하게 끓어오를 카레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된다. 카레 당첨!


고기는 스테이크처럼 센 불로 우선 양 면을 빠르게 익힌 후 허브 솔트로 간을 해 둔다. 레어로 익힌 고기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자른 후 냄비에 물과 담아 끓이고, 고기를 익힌 프라이팬에 올리브 유를 살짝 두르고 굵게 채 썬 양파를 볶아낸다. 양파가 누렇게 익도록 볶아야 캐러멜라이징이 되어 양파의 단 맛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유튜브 선생님의 말씀을 드디어 오늘 실천해 본다. 익은 양파를 자글자글 소고기와 함께 끓고 있는 냄비에 붓고 다시 프라이 팬에 감자와 콩 꼬투리를 살짝 볶은 후 당근, 파프리카와 함께 냄비에 붓고 물을 자박하게 부어 펄펄 끓여낸다.


한국식 노란 카레는 강황 냄새가 강해서 딸아이가 잘 먹지 못해 대신 일본 카레를 애용한다. 네모난 초콜릿 모양으로 굳혀진 카레 네 조각을 냄비에 넣고 걸쭉하게 끓이니 향이 제법이다. 이제 마법을 부릴 시간, 꿀을 딱 한 큰 술만 카레에 넣으면 마법처럼 카레의 풍미가 더해진다. 꿀을 넣고 안 넣고의 차이는 둘째 아이의 숟가락으로 접시 바닥 긁는 소리로 가늠할 수 있다. 카레를 끓일 때 약간의 버터와 꿀을 넣으면 기막힌 맛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 알려 준 이가 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남편과 나는 언제나 다정한 바퀴벌레 한 쌍처럼 붙어 다녔다. 이공계 대학이 대부분 그러했듯 우리 전공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에 시험이 한번 더 있어서 공식적으로 3번의 시험이 있었다. 물론 틈틈이 쪽지 시험도 여러 번 있었다.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는 전공도 많아 공부 시간은 배로 들었다. 우리는 늘 공부에 허덕거렸기에 중앙도서관과 학생 식당이 데이트 장소였다. 하긴 둘이 붙어만 있다면야 장소는 문제 되지 않는 시절이었지...


우리는 그렇게 2년 내내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학생 식당의 메뉴는 저렴한 가격을 고려하더라도 맛과 양 모두 꽤 훌륭했다. 식판을 들고 식권을 내는 곳에는 하얀색 가운을 입은 영양사 언니가 늘 서 있었다. 일 년 365일 가운데 일요일 제외하고 늘 보다 보니 우리 커플과 영양사 언니와는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말괄량이 같이 활달하고 유쾌한 영양사 언니는 가끔 밥을 먹는 우리 자리로 와서 메뉴 맛이 어떤지도 물어보고 조리실에서 따로 계란 프라이를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 퇴근하는 영양사 언니가 그날따라 의상과 메이크업, 헤어에 힘을 팍 주었길래 데이트를 가냐고 물으니 소개팅을 간단다. 우리 커플은 꼭 좋은 남자 물어오라고 파이팅을 외쳤다. 영양사 언니는 몇 달 후 소개팅 남자와 결혼을 했고 호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앞 면에는 오스트레일리아라고 적혀 있고 뒷 면에는 캥거루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열쇠고리 두 쌍을 선물하기도 했던 그 언니는 임신을 하고 출산 휴가를 떠났다.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 역시 착하고 다정한 사람을 만나 곧 2세를 만나는 해피엔딩은 우리 두 사람에게는 더 큰 선물이었다.


학생 식당에서 만난 인연은 또 있다. 당시 나에게 카레는 아주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메뉴였다. 어느 날 학생 식당에서 남편을 따라 다른 메뉴 대신 카레를 택했는데 평소 먹던 카레보다 훨씬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날 이후로 메뉴에 카레가 보이면 남편과 나는 꼭 카레를 사수하곤 했는데 그렇게 몇 달을 먹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레는 특히 조리사님이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아 주었는데 늘 인사만 하던 그 조리사님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던 것이다.


"카레 도대체 비법이 뭔가요? 너무 맛있어요. 조리사님 ㅠ.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는 착한 인상의 조리사님은 주저함 없이 내게 영업비밀을 풀어 주었고 그 비법이 바로 버터와 꿀이었다. 그 후 조리사님은 더욱 친근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선지 한 여름 열기 가득한 조리실에서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노총각 조리사님의 소개팅이 시급하다며 영양사 언니가 걱정을 많이 했지만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조리사님의 결혼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카레를 끓이는 날이면 조리사님은 과연 그 후로 결혼을 했을지, 영양사 언니는 아이를 몇 명을 낳았을지,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대학 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내게 선사한 그 소중한 인연에게서 달콤하고 향긋한 카레맛이 나는 건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맛있어 보이게 찍었는데..그렇게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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