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선 Dec 15. 2023

It's not your money

정의감인지 자존심인지

예전에 컴퓨터 매장에서 일할 때 몇 번 도둑맞았던 얘길 한 적 있나? 그게, 그 회사에 정말이지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지고 있을 때였거든. 2008년 이래로 오프라인 소매경기는 계속 안 좋아지니까, 노동강도는 말도 못 하게 올라가고, 파트타임 근무자들 시간은 점점 줄고, 회사 복지혜택 역시 줄어들고 있었어. 때문에 주말이면 이력서를 열 통 이상씩 꼬박꼬박 써서 여기저기 돌리고 있었고, 아예 컴퓨터 수리가 아닌 다른 분야로 먹고살려면 어떤 기술을 배워야 할지 고민해야 했었지. 그날밤도 넓은 매장을 나 혼자 지키고 있는데, 어떤 멀쩡하게 생긴 놈이 하나 들어오더니 판매대에 있는 게임을 우루루 자기 가방에 집어 담는 거야. 그러더니 후다다닥 튀더라구. 바로 내 눈앞에서. 와, 정말. 그토록 싫었던 회사인데, 다른 직장만 잡히면 내일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던 회사였는데, 막상 그렇게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그걸 나 개인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대. 아무 생각 없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가게 되더라니까. 결국 도둑놈은 못 잡았지 뭐. 달리기가 느리잖냐. 그리고 지점장한테 사건 보고를 메일로 보냈는데, 다음 날 당장 호출받았잖아. 직무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고. 또 한 번 그런 일이 저지르면 파면될 수 있다는 서약서에 사인하고 그랬었다. 뭐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실 도둑을 쫓아가는 동안 회사 생각은 정말 손톱만치도 안 했어. 니가 감히 내 앞에서... 뭐 이런 식의 자존심이나 오기였던 거였지. 그래서 지점장한테 훈계를 들었을 때에도 억울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 오히려 고맙더라구. 사실 도난으로 인한 회사의 손실은 내가 걱정해야 하는 부분이 아니잖아. 오히려 내 몸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업무 중 노동자의 권리이자 책임 중 하나인 거지. 






요즘은 여기저기서 제법 미움을 받는 단어지만, 우리가 어릴 적엔 정말이지 허구한 날 그 얘기를 듣고 자랐잖냐.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일이 맡겨지면 그 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를 진행하고, 학교를 다닐 때에도 본인이 학교를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몸가짐이나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그래서였나?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오히려 신입사원으로서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 한 마디로 모든 업무에 있어서 과욕이 넘쳤었지. 뭐 그래도 그땐 좋은 동료들과 선배들을 만나서 크게 욕먹지 않고 망가지지 않으면서 일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 내가 또 한 귀여움 하잖냐. 그렇게 사회생활 경험도 있고 하니까, 캐나다에서의 직장생활도 요령 있게 잘할 거라고 과신했던 거지. 아니 근데, 이게 정말 많이 다르더라니까. 소매업으로 현지 경력을 시작해서 더 그랬던 걸까? 예를 들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을 상대할 때가 많았는데, 회사 규정 대로 환불을 거절했다가는 순식간에 대형 사고로 발전하는 경우가 생기거든. 전 세계 진상들은 어디 같은 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오는지, 너랑은 말이 안 통하니 지점장 나오라고 해라, 직원 교육을 뭐 이 따위로 시킨 거냐.. 뭐 이런 뻔한 레퍼토리가 나오면서 말이지. 그렇게 실갱이를 하다 보면 나 역시 회사 규정은 개뿔, 그냥 자존심 대결로 치고받는 경우가 많았어. 환불을 해주면 왠지 악당에게 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다가 나중에 짬이 차고 나서 이런 고객 대응에 대한 교육을 따로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강사가 단호하게 그러더라구. 해달라는 대로 환불해 주라고. 그거 니 돈 아니라고 (It's not your money). 


물론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기는 해. 진상 고객이 퍼뜨리는 나쁜 소문을 상쇄시킬 정도의 회사 홍보를 하려면 마케팅 비용이 얼마나 더 드는지를 분석한 자료가 있더라구. 근데 그 수많은 숫자놀음보다 당시 나에겐 It's not your money 이 말이 더 와닿더라. 30년 넘게 주입받았던 주인의식이 통쾌하게 부서지는 느낌이랄까. 사실 맞는 말이지. 내가 주인이 아닌데 어떻게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겠어. 회사 수익에 맞춰서 커미션을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최고 경영자가 바라보는 시각이랑, 장기판의 졸과 같은 말단 사원이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 다를 텐데, 내가 휘두르는 주인의식이 회사에 꼭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회사로부터 it's not your money라는 얘길 듣고 났더니 진상고객들과 기싸움하느라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이 줄더라. 물론, 고객 서비스 업종이라 생래적인 감정노동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무례한 고객들과 실갱이하는 이유는 꼭 돈 관련 문제가 아니더라도 많잖아), 그래도 일이 많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어. 


밴쿠버 한인 요식업체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업체를 꼽자면 단연 C치킨 프랜차이즈와 S초밥 프랜차이즈라고 할 수 있을 거야. 특히 C치킨 프랜차이즈의 경우 밴쿠버에 '비비큐 치킨'이 들어오기 전부터 한국식 칼칼한 염지 베이스의 후라이드 치킨과 매콤 달콤 소스를 입힌 양념 치킨을 지역사회에 선보였는데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몰았거든. 요즘 이곳 현지인들이 KFC를 Korean Fried Chicken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C치킨의 공로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 게다가 매장 디자인도 다이닝 공간을 최소화해서 큰 비용 부담 없이 새로운 프랜차이즈가 이곳저곳에 들어서는 데에도 일조하고 말이야. 그런데, 얼마 전 어느 지점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어. 전화주문을 받은 걸 손님이 취소했는데, 그 비용을 전화받은 직원에게 부분 부담시켰다는 거야. 어떻게 주인이 손해를 다 부담해야 하는 거냐고. 반값에 그 취소된 음식을 사가라는 식으로. 요즘은 동네 편의점에서도 안 일어나는 일이 밴쿠버 한인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에서 일어나다니. 한국 언론에도 나왔었지, 아마. 


사실 한인 비즈니스만 이런 건 아니야. 어느 대만 이민자가 운영하는 유기농 농장에서도 대만에서 온 워홀이나 유학생들을 착취한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고, 나 역시 처음 구직활동을 할 때 이란계 이민자가 운영하는 컴퓨터 가게에서 부당한 요구를 받아 곧바로 그만둔 적도 있거든. 노동자가 만만해 보이면 여러 가지 탈법행위를 요구하는 건 어느 나라 사장이든 마찬가지라는 거지. BC 주 노동법에는 업무 중에 발생한 손해에 대해 직원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걸 철저히 금지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BC Employment Standards Act and Regulation). 이런 걸 보면, 역시 It's not your money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회사의 비용을 걱정해 주기보다는 약자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을 지켜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분위기 말이야.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지. 어느 회사든 간에 회사 복지만 골라서 빼먹으려고 하는 불량 직원들이 있잖아. 여긴 복지가 좋은 회사들의 경우 일 년에 병가를 3~4주까지 쓸 수가 있는데, 그걸 마치 자기가 쉬고 싶을 때 꾀병을 부려서 마음껏 쓸 수 있는 휴가인 것처럼 활용하는 사람들. 뇌진탕 후유증처럼 의사들도 완쾌를 판정할 수 없는 질병을 활용해서 몇 년씩 장기 병가를 내기도 하고, (장기 병가 중에는 급여의 100%를 못 받으니까) 이후 회사에 복귀해서는 자신의 업무를 도와줄 보조직원 고용을 요청한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야. 그리고 회사에서 그걸 곤란해하면 마치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하는 것처럼 몰고 가기도 하고 말이지. 게다가 이들이 회사 분위기를 망치는 것도 간과할 순 없어. 왠지 날씨 좋은 날에도 (자기처럼 꾀병 부려 회사 째지 않고) 성실하게 출근하는 사람들을 바보처럼 만들거든. 간단하게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업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일을 미뤄, 결국 다른 동료들이 떠맡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야. 


자연스럽게 이런 불량 직원들에 대한 동료들의 평가는 박해질 수밖에 없는데, 근데 따지고 보면 이 역시 It's not your money의 문제라는 거지. 이 사람이 자신의 저조한 업무숙련도를 보상해 줄 보조 직원을 한 명 더 뽑아달라고 하면, 동료 입장에서 그걸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 어차피 쓰라고 만들어 둔 복지제도이고, 그런 변수를 다 고려해서 회사의 비용이나 보험 같은 것도 산정이 되었을 테니까. 또 만일 그런 제도가 없다면 새로 신설하는 것도 나에겐 좋은 일이 될 수 있어. 내가 언젠가 시력을 잃게 되더라도 일을 계속하고 싶을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딱 봐도 그냥 꾀병이고, 게으름이고, 거짓말로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많겠지. 저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면 왠지 정의가 패배하는 느낌도 들 수 있고. 그래도, It's not your money. 회사에서 일하면서 굳이 정의 구현까지 할 필요는 없어. 결국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직업윤리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고, 다 같은 업무능력을 가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 업무능력에 대한 평가와 보상은 회사와 관리자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지, 동료들이 그걸로 상실감이나 패배감 같은 걸 느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  






덧. 


한편, 밴쿠버의 또 다른 성공적인 요식업 프랜차이즈인 S초밥은 재료를 과감하게 아끼지 않고 많이 쓰는 걸로 유명해서 연어회나 매운 참치회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어. 그만큼 매출이 높으니까 재료들은 신선하기 마련이고, 또 신선한 재료 덕분에 손님들이 몰리는 선순환을 가지고 있었지. 당연히 다이닝 홀은 미친 듯이 바빠. 손님으로 가득 찬 좁은 홀을 젊은 청년들이 미끄러지듯이 곡예를 하면서 서빙을 하더라구. 그런데 이렇게 바쁜 한국식당에 가면 종종 서버들이 한국말을 안 하고 영어를 쓴다고 불평하는 손님들을 볼 수가 있어. 영어와 불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캐나다에서 한국말을 안 쓴다는 것에 불만을 갖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할 텐데, 한국말로 서비스를 받는 것은 분명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것임에도 그게 손님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떤 노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쟤네들, 일부러 우리 앞에서 영어 하는 거야."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더라구. 진상은 자신이 진상인 줄 모른다지. 뭐, 만에 하나 일부러 한국말을 안 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도 바쁜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왜 영어만 쓰게 되었는지는 좀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어. 한국말로 서빙을 할 때, 훨씬 더 지독한 진상짓을 겪어와서 그래. 그러느니 차라리 영어를 사용해서 상호 간에 필요한 것만 간단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겠지. 구구절절 추가요구를 받을 가능성도 적고, 처음 본 사람에게 찍찍 반말을 들어야 할 필요도 없잖아. 업종은 다르지만 나 역시 컴퓨터 매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가능하면 영어를 사용하려고 했었어. 굳이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나서서 한국말로 손님을 도와주는 게 오지랖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한국말을 했을 때 고객들의 태도 변화가 너무 뚜렷했거든. 아, 오해방지 차원에서 첨언을 하자면, 내가 겪었던 진상들 중 사실 한국 사람은 10%도 안돼. 영어를 어버버버하는 1세대 이민자 입장에서는 영어 쓰는 진상이 더 악독했던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전체 손님들 중 그런 진상은 또 10% 내외야. 그러니까 한국 식당에 가는 한국 손님들 중에서도 진상은 10% 정도밖에 안 되겠지. 그 10%가 한 사람의 하루를 망가뜨리기 충분해서 문제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겐 당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