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보내는 찬사

난 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더라 #1 - 영양솥밥

by 동선

내가 성취한 걸 바탕으로 내 가치를 판정받는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왔고, 그 당시의 한국사회 분위기 역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었죠.

그 와중에도, 그 성취라는 게 오롯이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 거여야 한다고 믿었기에,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가 아니었는데도 단지 모의고사 성적에 맞춰 들어간 대학교가 내내 콤플렉스였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콤플렉스가 절 더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남들보다 단편영화를 찍고 싶었고, 남들보다 빨리 취업을 하고 싶었고, 남들보다 더 빨리 데뷔를 해서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혹시 나도 천재일지도 모르니까, 그럼 나도 27살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는 흰소리를 하면서 말이죠. 25살에 장편 데뷔를 하고 28살에 실베스타 스탤론 주연의 블록버스터 연출을 한 '대니 캐논' 감독이나, 24살에 만든 데뷔작으로 누벨 이마주의 기수가 되어버린 '레오스 까락스' 감독처럼 되고 싶기도 했고. 뭐.. 어때요. 꿈은 크게 가져도,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지인의 지인의 소개로, 재학 중에 작은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뭐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건 뻔하죠. 복사하고, 배달하고, 가끔은 회의에 참여하기도. 물론 대부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하면서 일 잘한다고 칭찬도 듣다 보니 나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같더라구요. 덤으로 돈도 벌고 말이죠. 학교 다니면서 알바 형태로 일을 하는 거다 보니까 무척 소액이었지만, 그래도 놀러 온 친구들에게 사무실 앞 놀부 부대찌개 정도는 쏠 형편은 되었습니다. 어른 흉내 내면서.


학교 수업도 과제도 빠지지 않게 하면서 직장 생활도 하다 보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었죠. 사실 직장에서는, 아직 신출내기 학생이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어요. 스텝들을 섭외하거나 작품 예산을 짤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획서를 만들거나 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무리 바쁘게 날 몰아붙여도 조급증이 가시질 않았었죠. 조급증이 가시질 않으니 더 바쁜 척을 하고 다니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군대. 졸업할 때까지 미뤄두긴 했는데, 그건 뭐, 사실 가기 싫고 무서워서 미뤄둔 연유가 가장 컸지만, 그래도 군대 가기 전에 뭔가를 만들어두지 않으면, 제대 후에도 사람들이 날 찾을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남겨두지 않는다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이젠 기억도 안 납니다, 무슨 기념일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껀수가 하나 생긴 건지, 동기를 만났는지, 아님 선배를 만났던 건지. 종로 근처의 어딘가였어요. 누가 점심을 사주겠다고 했고 그게 영양솥밥이었는데, 거기에 무슨 토핑이 들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전복이었나, 아니면 굴이었던가? 기억에 있는 건 그냥, 무척 색색들이 화려한 음식이 내 앞으로 전해졌다는 것. 뚜껑을 열자 포근한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었다는 것. '와!' 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는 것. 그리고 왠지 마음이 울렁거렸다는 것.


설탕 / 버터 조합을 싫어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디저트 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거든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속에서 잘 안 받는 것도 있고, 먹고 나면 묵지륵 더부룩한 느낌이 불편하기도 했구요. 그래서인지 생일에 케이크를 먹는 일도 거의 없었죠. 어릴 적엔 "생일 케이크보다 돈까스!" 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고, '내 생일은 그냥 간만에 모여서 술 먹는 구실일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케이크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대신 먹어주는 거였어요. 그런 알록달록 화려한 음식들이, 사실 일반인들이 먹는 한국의 정찬에는 별로 없었잖아요. 그동안 우리가 음식에서 얻는 시각적 만족감은 주로 디저트의 역할이었는데, 그런데 솥밥을 만나게 된 거였어요. 화려한 색상과 따뜻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눈앞에 나만의 솥 하나 가득이라는 형태로 만나게 된... 그래서 마음이 울렁였던 것 같아요. 난데없는 격려, 혹은 축하를 들은 것 같아서.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열심히 살았다고.


지난 홋카이도 여행 중에 부슬비를 맞으며 걷다가 우연히 만난 '교토 구죠파 미소마요' 주먹밥을 보며, 갑자기 영양솥밥을 처음 먹었던 그날이 생각나더군요. 입대를 앞두고 불안해하던 날들, 변변한 작품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서 조급해하던 날들 속에서, 그래도 그동안 잘해왔다는 격려를 들었던 그날이. 그래서, 캐나다로 돌아가면 꼭 솥밥을 해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요리를 잘한다거나 음식 만들기에 숙련이 되어있다고 자부하기엔 너무 허접한 실력이지만, 그래도 만들어 놓으면 꼬박꼬박 맛있게 먹어주는 동거인을 둔 사람으로서 음식을 만드는 게 지겹다거나 힘들다거나 하진 않은 편입니다. 물론, '오늘 뭐 먹지?'라는 전 세계 주부들의 공통적인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있는 입장은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일단 뭘 하기로 결정했으면 차분히 계획을 세운 다음 후딱후딱 해 치워 버리는 편입니다. 재료를 사러 가는 일만큼은 무척 귀찮아서 가능한 한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를 적극 활용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매주 식자재 쇼핑을 할 때 솥밥을 위해 산 건 연근 하나였어요. 제 생각에 솥밥처럼 뚜껑을 닫은 채 뜸을 충분히 들여 먹어야 하는 음식에서 다양한 식감을 계획할 때는, 재료부터 익는 속도가 다른 재료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거든요. 중간에 재료를 넣었다 뺐다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엉 밥, 연근 밥, 곤드레 밥, 전복 밥, 콩나물 밥 등, 주변에서 쉽게 먹는 솥밥 재료들은 대개 한참 끓이고 장시간 뜸을 들여도 형태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재료들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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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근을 잘게 썰어서 식초물에 잠시 담가 세척을 합니다. 보통 줄기 형태로 온전하게 파는 연근들은 씻을 게 별로 없긴 하던데.. 그래도 기분상 ㅎㅎㅎ. 아! 그보다 먼저 건표고를 물에 불립니다. 한 2시간 전부터 불려둬야 되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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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메인 단백질 토핑은 낙지볶음입니다. 여행 다녀와서 처음 솥밥을 했을 때는 연어 데리야키를 해서 밥에 올려 먹었는데 생각보다 잔가시가 너무 많아 귀찮더라구요.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냉동고 바닥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낙지를 우연히 발견한 탓이 크겠죠. 낙지 요리는 재빨리 볶는 게 핵심이니 충분히 해동을 합니다. 맥주 안주로 샀다가 낙지 옆에서 사이좋게 화석이 되어가고 있던 껍질콩도 구출해서 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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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해동된 껍질콩 하나하나 다 까둡니다. 가장 귀찮았던 작업이었어요. 다음부터는 미리 까놓은 냉동콩을 사리라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당근. 무나 감자보다는 단단하지만 아무래도 밥에 넣으면 크기가 많이 줄어들거든요. 그래서 조금 굵게 다져서 다른 재료들과 같이 준비해 둡니다.


이날 가장 큰 실수는 현미를 미리 불리지 않고 밥을 했다는 거였는데요. 다른 야채도 있고 해서 뜸 들이는 시간을 길게 하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결과적으로 현미는 여전히 딸깍거리더라구요 (그래도 맛있게 잘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이다음부터는 그냥 백미 만으로 밥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팁 중 하나가, 지난번 했을 때 누룽지를 먹다가 이를 좀 다쳤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딱딱한 누룽지가 안 생기도록 밥솥 아래에 참기름을 살짝 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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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밥에 들어가는 기본양념은 즉석 육수 (사진엔 없어요), 진간장, 요리용 맛술, 그리고 설탕 조금입니다. 일본에서는 버터를 많이 넣기도 하던데.. 전 그건 못 하겠더라구요. 야채를 더 넣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단맛이 좀 모자를 수 있겠다 싶어서, 재빨리 양파를 채 썰어 볶아서 추가했습니다. 그러곤 취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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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밥을 하는 동안 무 편, 마늘 편, 양파 다진 것, 생강가루 조금, 고춧가루 조금, 간장, 맛술, 설탕 등을 넣어서 낙지를 볶습니다. 아시겠지만 낙지 볶는 건 정말 타이밍의 승부입니다. 질겨지는 거 한 순간이잖아요. 이렇게 시간관리가 예민한 음식을 만들 때 누가 말 걸면 버럭 화가 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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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비해 즉석 교자만두를 굽는 건 불 붓고 뚜껑 덮기만 하면 지가 알아서 되는 거라, 혹시 낙지가 망할까 봐 대비용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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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슈퍼에서 파는 맛밤을 서빙 직전에 밥에 뿌려 2분 정도 데운 후 같이 먹습니다. 전 생밤을 재료로 요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더라구요. 갈비찜을 할 때에도 밤이 안 녹고 형태를 유지했던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요즘은 저렇게 맛밤을 딱 한 번 먹을 만큼만 담아서 파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요. 토핑으로 넣는 밤에는 간이 밸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양념장... 너무 흔해서 사진도 안 찍어두고 그랬는데, 이 날은 집에 파가 다 떨어져서, 그냥 양파를 잘게 다져서 넣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두 재료의 향은 엄연히 다르지만 그냥 흐린 눈을 해서 먹는 걸로. 다진 마늘, 다진 양파,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설탕 조금, 후추 조금.. 뭐 이렇게 해서 미리 만들어 뒀습니다 - 숙성해서 맛을 내야 하기 때문에 미리 만들어서 상온에 잠시라도 두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날은 낙지볶음이 생각보다 맛있게 나와서 양념장은 결국 남더라구요. 또 일주일 정도 냉장고에 쓸쓸하게 있다가 버리기 직전에 아내가 연두부와 함께 도시락 싸갔다는.


암튼 이렇게 해서 만든 솥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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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고생을 하다가, 이제야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를 본인이 다니고 싶은 학교에서 하게 된 조카를 만나면, 꼭 영양 솥밥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정이 안 되면 주먹밥이라도 하나 사주기라도 해야지 하며 검색을 해보니, 한국 편의점에는 아직 이런 영양 솥밥이 햇반 스타일로만 나오고 주먹밥은 안 나온 것 같더군요. 요즘은 김밥 종류도 다양하게 나오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이런 솥밥이야 말로 대량생산이 얼마든지 가능한 걸 텐데 말이죠. 들어가는 재료들에 사람들의 취향이 많이 갈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지 유통 관리나 판매단가 설정에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왠지 단 음식은 싫어하지만 하루 정도는 화려하게 생긴 음식으로 축하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편의점 PV 상품 기획 업무를 하시는 분이 이 글을 읽게 되신다면 한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뜩이나 혼밥, 혼술이 많은 때인데, 뭔가를 빨리 이루려고 조급하게 뛰어다니는 청춘들에게 닭 가슴살 같은 것도 좋지만 이런 걸로 영양 챙길 옵션이 하나 더 늘어나면 좋지 않으려나요.


아! 그리고 요즘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가치를 다른 사람한테 판단받는 게, 행복하게 사는데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하고 말이죠. 결국 자신이 찾아가는 거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