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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Jul 29. 2021

줄어드는 은행잔고 바라보기

한국 밖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모두 이런 세 가지 고민을 할 거야. 나 역시 이민 오기 전에 같은 걱정을 했었고… 인종차별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뭐하고 먹고 살 것인가? 언어는 어떻게 익숙해질 것인가… 이런 거 말이지. 그런데, 하하. 이민 온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은 좀 줄긴 하더라.


먼저 '차별'에 대해 말하자면, 어느 정도 (차별당하는데) 자신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한국에서 30여년간 살면서, 나이가 어려서, 비실비실해 보여서, (살이 찌면 살이 쪘다는 이유로), 직급이 낮아서, 지방 출신이라서, 경차를 몰고 다녀서... 등등, 사실 엄청나게 다양한 이유로 차별당하면서 자라왔잖냐. 그리고, 그때마다 일일이 바르르 떤다든지, 혹은 자기 자신을 억지로 크게 보이려고 애쓴다는 게 어리석다는 걸 30줄이 넘으면서 깨닫기도 했고… 나보다 키 작고 여성인 아내의 경우는 더 심하기도 했겠지. 


근데, 어느 날 문득, 차별을 당하는 것보다, 차별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괴물이 되어가는 게 더 무서운 일 이라고 생각되더라구. 그래서인지, 애초에 이민을 결정할 때 차별에 관한 건 우리에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 


그 다음으로는 언어와 생계… 이건 사실, 그 어떤 이민 1세대가 완전히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나 싶다. 


아무튼, 누구나 이런 걱정들을 할 텐데, 그런 두려움을 접어두고 이민을 실행에 옮기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아. 최악의 경우에도 굶어 죽지는 않을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이 있는지 (예를 들어, 공부를 하는 동안 한국의 가족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든지), 아예 아무 생각 없이 맨땅에 헤딩을 즐기는 사람이든지… 뭐, 나 같은 경우는 굳이 끼어 맞추자면 후자에 가까운 경우였는데. 그렇다고 상황을 즐길만한 배짱이 있었던 건 아니었거든. 오히려 수많은 최악의 상황에 대해 답이 안 나오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 봤자, 결국은 언제나.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말 뿐이었어. 


아무튼 교민사회에서는 몇 가지 고전 취급을 받는 우스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민자의 직업은 도착 첫날 공항에 픽업 나온 사람의 직업에 달려있다"라는 말이야. 한인 이민 사회가 중국인이나 다른 민족 등에 비해 역사나 규모가 작은 데다가, 교민 간에 소통도 아주 한정되어 있어서 고급 취업 정보를 나누는데 제한되어 있던 경우가 많았거든.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선 잘 몰라서 뭐라고 직업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리가 없었어. 게다가 이민자들 경우, 한국을 떠나면서 가족이나 경력 등 포기하고 온 게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스스로 자기 현재 상황이, 현재 직업이 비교적 괜찮은 거라고 끊임없이 자기 세뇌를 걸지 않으면 서글퍼지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지금은, 부모들과 함께 들어온 이민 1.5세대들이 다양한 직업군에서 자리를 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이민자들이 갖는 직업들은 몇 가지로 축약되어 있었어. ‘일식집 운영’, ‘한식집 운영’, ‘식당과 같은 한인 비즈니스 취업’, ‘그로써리 (작은 잡화점) 운영’, ‘쇼핑몰 내에서 담배가게나 복권 키오스크 운영’, ‘시골에서 모텔 운영’, ‘갓 들어온 이민자나 유학생 등을 도와주는 정착 서비스, 혹은 보습 학원 운영’ 등.


근데, 이런 직업들을 살펴보면 영어로 복잡한 소통이 필요 없거나, 차후에 현지 회사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경력을 성장시킬 가능성이 적은 편이거든. 사실 2000년 대 초 당시에는 자식들 영어교육 때문에 이민을 결정한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 학비조차도 유학생 신분으로 오는 것보다 영주권을 얻고 오는 것이 싸다는 관점에서 이민 비자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노후는 고국에서 가족친지들과 보내겠다고 계획했던 사람들에게, 애초 부터 ‘현지 경력 성장’은 구직 과정에서 고려대상이 아니 었을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그 당시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한인 이민자, 유학생 가구들 대상으로 의류나 가구, 식기, 보습학원, 컴퓨터 서비스와 같은 생활 비즈니스를 직접 운영을 해도 아주 번창했었으니까, 굳이 골치 아프게 영어를 쓰는 직업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식당에서 일하면 세금 신고를 할 필요 없는 현금 (팁)으로 수입이 생기니까 (그것도 꽤 괜찮은 - 많은 날은 하루에 $100 ~ $200 현금 - 금액을) 이걸 쉽게 손에서 놓아 버리기 힘든 거지.


사실, 내 경우는 이보다 더 심각했다. 일단 완전 개털인 상태로 이민을 와서 골프모임 같은 교민사회 사교모임에 참가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종교모임 같은 것 역시 많이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라 한인사회 내에서 돌고 있던 정보조차 접근이 어려웠어. 물론 2000년대 초반 밴쿠버 는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건 뭐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첫해는 적어도 한국에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아보자며, 밴쿠버의 애니메이션 회사만 들고 팠었으니 쉽게 취직이 될 리가 없었지. 이민 오기 전에는 밴쿠버라는 도시가 북미 제2위의 영상 도시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막상 와서 회사들을 전전해보니 이곳의 애니 메이션 산업도 미국 TV물 하청에 집중하고 있었고 자체 기획을 하는 회사는 아예 없더라구. 게다가, 이곳 하청 회사는 한국 신림동, 봉천동 회사보다 수주물량이 안정적 이지 못해서, 여름이 지나면 실직되어 실업급여를 받고 생활하는 게 아주 시스템화 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 당시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 포맷이 2D에서 3D로 넘어가는 전환기였기 때문에, 2D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들은 차츰 문들을 닫고 있었던 형편이었어. 


애니메이션 회사 취직을 포기한 이후로는 한인 슈퍼 입구에 즐비하게 놓여있었던 한인 신문들이나 무료 지역 정보지, 신문 등을 찾아봤지만.. 그리고 몇 군데는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내 영어실력이 전화로 나를 소개하는 것도 못한다는 사실만 깨닫고 무척 참담한 심정이 되기도 했었지. 주방에서 접시를 닦더라도, 세금, 고용보험 다 제대로 내서 나중에 현지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서 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어이없게도, 좀 멀쩡한 현지 식당에서는 접시 닦는 일도 경력자를 우대하는 걸 보고 멘탈이 털린 적도 있었고.  


하하하. 지금은 웃지만, 그 땐 정말, 가뜩이나 긴장되어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안 나는데, 그나마 나오는 영어도 죄다 엉망이어서, “내가 지금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적이 많았어.


애초에 이민을 올 때에는, 교민사회 대상으로 한국 TV 방송 비디오를 빌려주는 일을 할 계획이었어. 먼저 들어온 선배가 가게 자리까지 다 알아본 상태였고, 나 역시 어릴 적부터 비디오 가게 운영을 해보고 싶었잖아 (제2의 타란티노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착각이었지만). 소박하지만 이렇게 등을 비빌 곳을 마련해 두면, 아내가 먼저 공부를 해서 자리를 잡고, 그 뒤에 내가 공부를 시작해서 다른 직장을 잡고.. 뭐 이런 계획이었어. 


그런데, 당시 미주 교민사회에서 한국 비디오 배급 이라는 게 그렇게나 엄청난 이권 관계가 얽혀 있는지 몰랐다. 모든 한국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당시에 듣기로는 지역 판권에 전직 청와대 관료가 엮여 있다는 루머도 있었거든. 여하튼, 알아봐 둔 가게 자리 근처에서 이미 한국 비디오 대여를 해주던 다른 한인 슈퍼 사장 님의 강력한 반대로, 그 일은 시간만 질질 끌다가 결국 엎어졌고, 그때부터 나의 처절하고 지난한 구직 역사가 시작되었던 거지. 


일단은 (당장 부를 축적하진 못하더라도) 은행계좌가 계속 줄어드는 걸 지켜보는 일은 막아야, 제대로 된 구직활동이나 창업활동도 좀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일단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본답시고, 이 지역 한인 농장도 알아봤는데, 시간당 6불을 주는 대신에 채소는 마음껏 가져가라는 그곳 사장님 말을 듣고 (2003년 당시 최저시급은 8불, 하지만 농업은 예외 업종이었다), 고개를 저어야 하기도 했어.   


 언제 취업이 될지, 아니 내가 과연 취업을 할 자격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니까, 이놈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 자체가 힘들어지더라. 이민 온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캐나다 동전 중 어떤 게 10센트인지 어느 게 5센트인지 구별도 못하는 (생각보다 어렵다, 그거)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기약 없이 은행 잔고만 파먹는 생활 속에서 외식 한번 할 여유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내와도 다툼이 잦아지게 되더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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