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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Mar 25. 2022

배트맨의 비참한 최후

"놈은 어둠 속에서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재작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부슬비가 내렸고 저녁이 되자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음침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 처남이 애들물건을 물려주기 위해 안개를 뚫고 달려왔다.

처남 가족과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져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배웅했다.

이별은 길 수록 추한 법.. 가벼운 허그와 짧은 이별의 인사말로 처남 가족과 이별하고

집으로 올라와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 처남이 열심히 날라 주었다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는 작은방을 열어 보았더니 실로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잔뜩 널려진 많은 짐들 중에서 높이 쌓인 동화책 묶음과 두꺼운 이불가방 가득한 애들 옷가지들 뒤에서 놈을 처음 보았다

놈은 책이 만담장 너머로 눈만 빼꼼히 내밀어 우리를 노려 보고 있었다

소름 끼치게도 그놈의 눈알엔 눈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놈은 흰자만이 존재하는 찢어진 눈을 희번 거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헤벌쭉해서는 이것저것 헤집던 둘째가 그 눈을 보고는 자지러지게 놀랐고 후다닥 거실로 도망가서 <호랑이 이불>이라고 부르는 사자 그림이 그려진 담요 밑에 들어가 숨어서 앵앵 울어대기 시작했다.

큰아들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슬그머니 뒤쪽으로 숨어서 두려운 듯 소곤거렸다.


"아빠 나 저거 너무 무서워"


당장 갖다 버리라는 둘째의 아우성을 진정시키고 흐느끼는 녀석을 재우고 나온 늦은밤 나는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체 그 물건을 어찌하면 좋을까..?-

코스트코에서 산 싸구려 위스키를 한잔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어둑한 거실 복도를 걸어가 놈이 있는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녀석은 갑자기 눈부시게 찾아온 빛에도 굴하지 않고 매서운-흰자가 없는- 눈깔을 치켜뜨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놈을 위아래로 훑어 살펴보았다.

입술이 아예 없어 잔인해 보이는 입은 불만스러운 입매를 그리고 있었고, 어금니 질끈 물고 있는지 하악각쪽에 붙은 교근이 제법 불룩한듯 보였다.

미간 깊이 파여서 표정에 단호함을 더해 주데, 정확하게 90도로 꺾은 팔을 겨드랑이에 딱 붙인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자세만큼은 바보처럼 보다.

거기에 이르러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하여 더 살펴보니 목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 폼이 왠지 두려움에 찬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깊이 파인 미간은 왠지 근심 어려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고는 다정히 말을 건넸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그제야 놈의 형태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놈은 자기의 몸 위에 조금의 배려도 없이 몸을 내던지고 갖가지 사고를 쳐버릴 새로운 주인을 두려워 하기에 <유아 카시트>라는 본질에 어울리지 않는 저런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다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다.

놈의 정체는 하다못해 주니어 카시트도 아니고 '유아' 카시트였기 때문이다!

어떤 신비로운 알고리즘이 처남의 장바구니로 이 상품을 인도했는지..아니 그보다 앞서 대체 왜 이런 물건을.. 누가! 왜! 만들었다는 것인지 아무리 이해하려 애써봐도 알 수 없었다.

요즘 어떤 어린이들이.. 그것도 카시트에 앉는 나이의 어린이가 대체 어떤  경로로 배트맨을 본단 말인가!

어두운 고담시 거리를 그림자가 되어 배회하는 음울하고 쓸쓸한 다크히어로가 유아카시트라니!

허옇게 번들거리는 흰자에 작고 귀여운 머리를 기대고 앉으란 말인가!?


한참 그 표정의 의도와 용도를 가늠하려 애쓰다가 부질없다 싶어, 책상 서랍을 뒤져 빨강과 검은색 매직펜을 꺼내서 시술을 시작했다.

빨간펜으론 귀여운 볼터치넣었고, 듬직해 보이길 바라며 입술을 두툼하게 그렸더니 괴이해 보여 입술을 방긋 웃는 입으로 바꿨다.

검은 매직펜으로 웃는 반달눈썹과 웃는 입매를 그렸더니 잉크가 다 됐는지 더는 나오지 않아 얄팍한 네임펜을 꺼내 들곤 눈알을  그려 넣었다.

놀랍게도 더 간사해 보이고 더 소름이 끼쳤다.

나는 크게 후회하며 아내의 네일 리무버로 매직 눈깔을 지워보려 애써보다가 포기해 버렸다.

작은 좌절속에 "지금이라도 갖다 버릴까" 싶은 유혹이 피어났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유혹을 떨쳤다.

산지 몇 달 안되어 반짝이는 신동품을 가치 없이 만드는일을 폐기물 스티커에 돈 쓰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는 수 없이 귀찮음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

스툴을 가져다가 책장 지붕에 먼지 앉아있는 아내의 오래된 반짇고리를 꺼냈다.

내 셔츠 단추를 달았더니 네임펜 눈깔과 크기가 크게 다르지 않아 여전히 소름이 끼서 싹둑 잘라냈다.

단추 봉지를 좀 더 뒤지다 보니 연애 초기에 아내가 홈미싱 커뮤니티를 다니며 어설피 어린이 옷을 만든답시고 사놓은 엽고 왕방울만 한 단추 두 개가 있기에 뱀처럼 간사한 네임펜 눈동자를 꿰뚫어 달아줬다.

다음날 아침.,

놈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  첫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날부터 녀석은 안심하고 배트맨에게 몸을 맡겼고 불끈 쥔 두 주먹의 제법 크고 깊은 구멍에다가 좋아하는 데일리 장난감도 넣고 과자봉지도 꽂고, 나뭇가지나 열매, 낙엽이나 조약돌, 때론  쓰레기를 쑤셔 넣기도 하며 애용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년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둘째는 첫째의 배트맨 시트를 때로는 갈망하였고, 때로는 질시하고,

어떤 날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날름 앉았다가 첫째에게 잔혹하게 응징당하고 서럽게 울기도 했다.

둘째가 아무리 "나도 배트맨 시트에 앉고 싶어"졸라대도 내 손으로 차마 놈을 살 수는 없었던지라 둘째는 속절없이 1여 년간 형에게 숱히 폭행 당했다.


항상 첫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맞아댔기 때문인지 몰라도 둘째는 절치부심보다.

녀석은 무한대의 식탐을 바탕으로 폭풍 성장하여, 허구한 날 밥 안 먹고 뺀질거리며

"난 달콤한 걸 좋아하는 꿀벌이지~" 따위의 헛소리나 해대며 설탕끼 있는 간식만 탐하던 첫째의 키와 덩치를 단숨에 따라잡았다.

언젠가부터 째는 더 이상 자신의 체급이 형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나보다.

녀석은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도리어 형을 울리는 횟수를 점차 늘려 가더니 마침내 오늘 오후에 일을 내고야 말았다.

둘째는 영화 <킬빌>에서 블랙맘바를 눈을 뽑아 끝장내버린 파이메이의 코브라 권법처럼..

혹은  톡 쏘는 벌처럼..

혹은 파리 잡는 개구리처럼..

조막만 한 손을 확-뻗어 단숨에 배트맨의 눈알 두 개를 뽑아버리곤 호탕하게 웃었다!

둘째는 단추 눈깔을 두 손에 얹고 몸을 젖혀가며 신나게 웃어댔다.

눈을 잃은 배트맨도  말없이 웃고만 있고,

나도 배를 잡고 웃고,

그저 첫째만 애달프게 울어댔다.



슬프게도 배트맨은 에 한올의 실만 털처럼 남게 되었다.

놈은 지금 이 순간도 어두운 주차장 불 꺼진 차 안, 서늘한 달빛이 어린 뒷석에 혼자 앉아 소름 끼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아아...

배트맨 카시트여..너무 슬퍼 말아라.

이 세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널 위해 목놓아 애달피 울어주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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