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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Apr 22. 2022

도복로 사기사건의 전말

바보라서 당하는게 아니다. 사기는 과학이다.



때는 2016년.도복로 36세. 그는 식당을 운영했다.

그의 매장은 날이 갈수록 장사가 잘 됐다.

늘 하던 돈걱정은 없어졌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업무량에 치여서 아내와 아이 얼굴 보는 일도 너무 어려워졌다.

아니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래 복로가 하는 일은 전통적인 평균의 삶의 흐름을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첫째 아들이 태어나기  전날까지도 가게에서 설거지를 도와주던 복로의 아내 봉숙이는 첫째가 태어나고 나선 복로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 해 졌다.

어쩌면 바로 그때, 봉숙은 속으로 조용히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조건 없는 결혼을 한 것을.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이 신생아를 키우는 것이다.

봉숙은 늘 삶이 버거웠다. 텅 빈 집에서 혼자서 미친 듯이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낯선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봉숙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복로는 그 점을 채 헤아릴 수 없었다.

이따금 주방에서 야채나 고기를 다듬으며 품에 갓 태어난 생명체를 안고서 집으로 돌아온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날. 그 순간, 마음속 가득 차오르던 갖가지 감정을 뚫고 미지근한 두려움이 솟아오르던 감각을 생각하면서 아내가 지금 얼마나 두렵고 힘겨울지 짐작만 해 볼 따름이었다.

그는 그저 매일 아이를 보는 힘겨움과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는 한편, 아이를 보는 기쁨을 갈망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느꼈다.


봉숙은 남편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면 통유리로 된 거실 창문으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풀쩍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마저 치밀어 올랐다.

복로와 봉숙은 함께 있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싸움의 시간은 되려 부쩍 늘었다.

가족 모두가 힘든 날들이 지속되었다.

복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고심한 끝에 오판을 내린다.

"한 달에 2-3백만 벌어도 좋으니까 저녁에 가족들을 볼 수 있는 삶을 선택할래"

복로는 성업하던 가게를 그렇게 그만뒀다.

그리고 그동안 가져온 사업적인 신념을 모두 져 버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복로는 이전의 가게에 비하면 임대료가 한참 저렴한 허름한 건물을 통째로 렌트했다.

직전까지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은 허름했지만 복로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어디서든 돈 2-3백 버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복로보다 나이가 7살이나 더 많은 건물은 손댈 곳 투성이었지만 복로는 그 점을 외면하고 최소한의 시공만 할 작정이었다.


그 생각은 철거를 하던 도중 치켜든 해머에 "쿵-"하고 깨져버린 천정과 함께 무녀 졌다.

깨진 천정의 석고보드 구멍 사이로 바퀴벌레가 쏟아져 내린 것이 아닌가!

어두운 실내 속 작업등의 강렬한 스폿 라이트에 비친 자욱한 먼지가 휘날리고 이내 머리와 목덜미에서 소름 끼치는 것들이 느껴졌다.

"으아아 아-!"

복로는 허겁지겁 팔다리를 휘저으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놀라서 쳐다봤지만 상관하지 않고 웃옷을 홀랑 벗어 탈탈 털었다.

얼마 뒤 진정한 복로는 한참 동안 어둠 속에 잠긴 건물을 노려보고 있다가 입구 쪽에 있는 나무로 벽을 만든 화단을 홧김에 발로 차 버렸다.

파삭  소리와 함께 썩은 나무가 부서지고 흙더미가 쏟아지는데 거기서도 집에서 곤히 자는 복로의 아기 손바닥만큼의 크기는 될 법한 바퀴벌레들이 기어 나와 스르륵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복로는 며칠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 손만 대면 그곳엔 바퀴 무리가 튀어나왔다.

원래 계획대로 시공하고 방역업체를 불러 약을 치면 바퀴는 출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미 복로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해 버렸다.저 많은 사체는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바퀴벌레들을 보고 눈과 속이 뒤집힌 복로의 머릿속에는 <접시나 냄비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바퀴벌레>라는 상황극이 끝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netfilix original stop motion animation"the house"

옥상에 높이 선6m에 달하는 십자가 탑을 4인치 그라인더로 잘라서 폐기한 날이었다.

 밤. 복로는 꿈을 꾸었다.

완성된 가게에 복로는 홀로 앉아 있었다.

쏟아져 들어오던 햇볕에 그늘이 생겨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입구 쪽에 검고 왜소한 형체가 가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흰자가 거의 없는 검고 작고 동그란 눈을 가진 노파.

검은 두건을 쓴 노파는 검은 아기 보자기로 젖도 안 뗐을법한 하얗고 작은아기를 업고 있었다.

초점없는 눈빛,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노파는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복로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치밀어 오를 때 즈음. 노파는 달리기 시작했다.

노파는 좌측 모퉁이를 돌아 가게의 측면에 설치된 18m길이의 테라스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내달렸다.

테라스를 따라 만든 긴 창문으로 노파의 질주를 놀라서 바라보는 복로의 동그란 눈과 질주하는 노파의 흰자가 없는 검은 눈이 찰나지간 마주쳤다.

아뿔싸!그 순간 복로는 노파가 뒷마당에 있는 지하실 입구로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지하실에는 복로가 감춰둔 시체들이 마대자루 여럿에 싸여 천정에 쇠사슬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복로는 서둘러 쫓아갔다.

복로가 옆문을 열고 뛰쳐 나가 지하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노파는 다다다 뛰어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손잡이를 잡고 복로를 빤히 쳐다 보았다.

노파는 복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뛰었던 속도가 무색하리만치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고 그 열린 문틈으로부터 검은 파도 같은 벌레떼가 일렁이며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꿈의 심상처럼 그 건물은 뭔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꿈속에서 본 노파의 저주였을까..? 

아니면 부러뜨린 십자가탑의 저주였을까..

복로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일부분 상실해 버렸다.

그는 부분철거 및 덧씌움 시공이란 초기 계획을 머릿속 한켠으로 치워 버리고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나가 혼자서 건물을 철거했다.

그 속에 들었던 숱한 바퀴를 모두 제거했음은 물론이다.

미쳐버린 복로는 그 모든 것을 홀로 했는데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철거부터 시공까지 업체에게 맡기는 것은 건물을 사는 것만큼이나 금액단위가 컸고 외벽 철거업체에게 의뢰하니 업계 성수기라 건물이 너무 작다고 거절당했었으며, 사무소를 통해 인력을 쓰려니 일이 고되다고 도망가버리거나 일을 거절했다.이곳이 아니라도 일할곳이 많은 업계 성수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다 혼자 해 버렸다.

7인치 그라인더로 9미터의 벽을 잘라내고, 7미터나 되는 옥상 십자가를 잘라내고 6개의 간판을 철거하고 3개의 가건물을 분해했으며 혼자 설치한 어설픈 고소작업대를 안전장구도 없이 오르내리며  가로8m. 세로18m, 높이10m짜리 건물내 외부를 몽땅 다 철거해 버렸다.

복로는 성업하던 식당을 그만두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늘 자신의 직원들에게 창업 시 절대로 해선 안될 일이라고 당부했던 금기들을 스스로 차근차근 시행해 나가고 있었다.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천정을 모조리 다 털어버렸던 날. 복로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새어 나오는 음성으로 봉숙에게 말했었다.

"나.... 아무래도 나 지금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 같아... 왜 그랬을까? 지금이라도 이 가게를 다시 재임대하든지 해야 할 거 같은데.. 어쩌지.."

왜 그랬을까? 복로는 상황은 가호지세와 같고 이젠 도무지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복로가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철거한 폐기물은 약 40여 톤 정도..

이제 그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했다.

폐기물 수거업체를 불러 폐기하면 좀 비싸도 간단한 일이지만 전문업체들에게 숱한 거절과 약속 불이행을 당해 본 복로는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기물이 빈자리만큼 다시 자재들을 사 와야 할 것 아닌가.

철거가 끝나고 폐기물을 정리한 날 저녁.

복로는 저녁밥을 먹으며 봉숙에게 말했다.

"여보. 나 한 6개월쯤 사용할 중고 트럭이 한대 필요해"

아내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럼 얼른 사요"

"그래. 내일 아침에 사러 가야겠어"

"차를 그렇게 사도 되는 거야?"

"널린 게 중고 찬데 못 살건 뭐야?"

복로의 이런 생각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복로의 첫차는 낡디 낡은 싸구려 자동차였다.

그는 그 차를 일터에 앉아 전화로 주문했다.

그에게 차란 오로지 이동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차종을 묻지도 않았다.

"x원에서 추천해 주실만 한 거 하나 부탁드려요"

복로가 제시한 가격에서 살 수 있을만한 차란 극히 제한적이었고, 복로가 건너 건너 소개받은 중고차 판매업자는 그날 밤 그에게 차를 배달해 줬다.

복로는 그 차를 몇 년간 잔고장 한번 없이 잘 타다가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가 다음으로 샀던 차는 트럭이었다.

일 때문에 트럭의 필요성을 느꼈던 다음날 아침, 복로는 집앞 횡단보도 전봇대앞에 비치된 벼룩시장이란 무료일간지를 쑥 뽑아, 버스정류장에 앉아 빨간줄을 몇개 친 다음,그 중에서 어느 중고차업자가 올려놓은 차를 그날 오후에 구매했다.

그 트럭은 연식이나 기능 대비 30% 정도 저렴하게 구매했기에 다 쓰고 되팔 때는 오히려 그만큼의 차익을 얻었다.

복로에게 중고차와 중고차 거래란 그런 개념이었다.

오직 필요에 의한 도구. 필요할 땐 사고 필요 없어지면 다시 파는.. 요즘으로 치면 공유 자전거와 비슷할까?


복로는 그런 관념으로 한두 시간 물건을 검색하고  연식이 좀 된 500만 원짜리 중고 트럭 하나를 골라 전화를 걸었다.

틀림없이 책상에 발을 꼬아 얹고 담배를 입에 꼬나문듯한 자세일 것만 같은 목소리가 걸쭉하게 내뱉었다.

"네. 있으니까 오세요."

목소리가 불러준 주소는 북청구의 아파트형 중고차 매장이었다.

이름은 <오토 랜드>

얼마 만에 쉬기로 한 날인가! 복로는 왠지 신이 났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파랗고 높은 가을 날씨가 마음을 설레게 했고 때문에 아내 그리고 첫째와 동행하기로 했다.

"별 이상 없으면 얼른 사고 밥 먹으러 가요"

세 사람은 차를 몰아 중고차 매장으로 갔다.


<북청 오토 랜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초대형 매장의 규모에 압도당하며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살펴보니 커다란 포돌이 로고 옆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적혀 있다.

<중고차 판매원으로부터 납치, 감금, 폭행, 협박, 공갈, 등을 당하거나 강매를 강요당할 시에는 거래를 멈추고 즉시 112로 전화하세요>

복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봉숙에게 이야기했다.

"대체 어떤 바보들이 저런 경우를 당하길래 저런 현수막이 붙어 있는 거야? 참 세상은 넓어"

어라? 그런데 그런 바보 멍청이들은 복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나 보다.

층마다 경찰서에서 내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신이시여 저 멍청이들을 구원해 주소서'  

복로는 가련한 멍청이들을 위해 짧게 기도를 올리고  혀를 차며 그 현수막들을 흘려버리곤 약속한 4층의 3번 입구에서  판매자에게 전화를 했다.

"4층이시라고요? 아니 왜 4층으로 가셨어요? 저는 1층 3번 입구라고 말씀드렸는데?"

판매자가 황당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니 분명히 4층이라고 했었는데? 아니란다. 그렇게 말씀드린 적이 없단다.

다퉈봤자 의미 없는 일.

복로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곤 핸드폰의 메모를 열어 약속 장소를 확인해 봤다.

<4층. 3번 입구에서 전화할 것>

뭔가 착오가 있었겠거니 복로는 1층으로 가서 주차를 하려 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몇 바퀴를 더디게 돌아 1층엔 손님 차를 주차할 공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복로는 2층으로 올라가 다시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복잡한 미로 같은 건물을 헤매다 겨우 1층의 3번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복로는 남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메마른 음성으로 묻는다.

"제가 지금 1층 3번 출구인데 안 보이시는데요?"

복로는 남자와 인상착의를 교환하고 남자의 모습을 찾아 3번 출구 근방을 헤맸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아니. 사장님! 사장님! 지금 혹시 어디세요?"

"1층 3번 출구입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시냐고요. 계신 건물 이름이요",,

"오토 랜드인데요?"

남자는 한숨을 푹푹 쉬더니 짜증을 꾹꾹 눌러 담은듯한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사장님.. 오토 랜드가 아니라 오토월드에서 뵙기로 하지 않았어요? 지금 왜 거기 가셔서 나.. 참.."

"네? 오토월드요?"

"지금 계신 오토 랜드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어요."

"오토 랜드라고 하셨는데.."

"그럴 리가~"

"잠시만요"

복로는 다시 메모장을 열어 확인해 본다.

<오토 랜드 4층 3번 출구입구에서 전화할 것 - 영길 상사>

이쯤 되니 피곤한 마찰을 피하고 싶은 마음보다 짜증이 더 치밀어 오른다.

"아까 제가 메모를 해 놓은 게 있어요. 분명히 오토 랜드 4층 3번 출구라고 하셨다고요."

남자는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고 잠시 옥신각신하고 있노라니 남자가 태세를 급전환한다.

"제가 손님이 워낙 많아서 잘못 말씀드렸었을 수는 있어요. 매장이 두 개라.. 그럴 수 있는 부분은 있어요. 근데 내가 분명히 오토월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어쩌면 여기서 거래를 멈추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로는 15분 더 차를 달리는 것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매물을 검색하고 전화를 돌리고 다시 내일로 일을 늦추는 것이 더 싫어 한번 더 참기로 했다.

"오토월드 1층 3번 출구인 거죠?"

"네."

"지금 얼른 갈게요"

다시 미로를 빙빙 돌며 헤매어 2층으로 올라가 차를 빼서 1층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다가 아직도 아침 출근길 차량이 가득한 도로를 더디게 지나 15분 거리라는 오토월드를 30분이 걸려서 도착한 복로일행.

복로가 다시 어렵게 주차를 하고 1층 3번 출구를 찾아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다.

받아보니 역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숨을 헐떡이며 말을 내뱉는다.

"사장님. 영길 상사 강대리입니다. 제가 지금 사장님 지시받고 오토 랜드 1층 3번 출구 앞에 도착했어요. 지금 어디 계세요?"

부아가 치밀어 올라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한다.

"제가 오토 월드로 간다고 했잖아요. 지금 왔다구요"

남자는 자세가 낮은 어조로 싹싹하게 말한다.

"아... 이걸 어떻게 해.. 저희가 전화 끊고 생각해 보니까 사장님한테 잘못 말씀드렸나 싶어서 죄송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얼른 달려왔는데.. 15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다시 얼른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복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거절했다.

이 거래는 하면 안 되는 거래란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저 그냥 다른 물건 사겠습니다."

복로가 거절하자 남자는 더욱 곤궁한 어조로 읍소를 하기 시작한다.

"사장님 제발 좀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이 계약 날리면 사장님한테 조인트 까여요. 제가 오토월드로 번개처럼 달려갈 테니 어떻게 사정 한 번만 봐주십시오.."

복로는 맘이 약해졌다. 보통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거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이 싹싹한 남자가  치를 곤욕을 상상하게 했다.

결국 복로는 한 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남자는 15분만 기다려 달라고 재차 읍소했고  30분이 지나자 그제야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남자는 자기가 입사한지 얼마 안 됐고 미련한 편이라 복로가 있는 주창장 번호를 못 찾았겠다며 재차 전화를 해 왔고 다시 20여분을 더 지체했다.

결국 8시에 집을 나서 9시에 오토 랜드에 도착했는데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크고 뚱뚱한 몸이 잘 드러나는 바짝 달라붙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험상궂은 남자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명함을  내민다.

<영길 상사 영업 판매부 대리 강한구>

"강한굽니다. x연식 흰색 포터 차량 xx원짜리 보고 연락 주신 분이시죠?"

복로가 수긍하자 강한구가 재차 말한다.

"저희가 오토월드에 저희 차량들은 보관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제가 확인해 보니까 그 차량은 여기 오토월드가 아니라 오토시티라는 매장에 있더라고요. 차부터 보러 가시죠."

"오토시티? 거긴 또 어딥니까? 뭐 이런 식입니까? 다시 또 이동하라구요?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요?"

복로가 짜증이 섞인 말투로 따지려 들자 강한구가 진정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가 업체도 크고 이 업계가 부동산 공동중개처럼 공동판매도 하는지라 차고가 여러 곳이에요."

복로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삼키고 다시 한번 참기로 결정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투자했이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는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행은  강한구가 알려준 주소를 찍고 40분 거리에 있는 오토시티라는 매장으로 다시 이동했다.

여기서 매물을 확인하고 사면 이 고생도 끝나리라 복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토시티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뛰어와서 꾸벅  인사한다.

흡사 모아이 석상처럼 생긴 덩치가 큰 남자다.

강한구가 모아이 석상을 재촉했다.

"어~박주임! 우리 지금 서둘러야 돼! 여기 손님들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셨어. 차량 점검은 한번 더 했어?"

"네 이미 점검 다 했지 말입니다"

수분을 모두 잃어 바싹 말라버린 듯한 탁하고 갈라지는듯한 목소리로 모아이 석상 아니, 박주임이 대답했다.

일행은 서둘러 차량으로 갔다.

강한구가 물었다.

"이 차량 맞으시죠?"

사진에서 봤던 그 장소.

사진에서 봤던 그 번호의 차량이 맞다.

복로는 여러 가지를 꼼꼼히 체크하곤 안도했다.

오전을 통째로 날린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이게 삼성전자 대리점에서 쓰던 트럭이라 깨끗해요."

강한구가 따라 붙으며 설명한다.

그 말대로 차량은 화물차라는 특성이 무색하리만치 깨끗했고 연식이 좀 됐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제 계약만 하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화창한 가을의 오후 햇살을 가족가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제가 이 차 구매할게요"

강한구는 웃음을 가득 띈 얼굴로  계약서부터 쓰자고 하며 몇 걸음 휘적휘적 걸어가다가 갑자기 난처한 표정으로 뒤돌아 보며 말한다.

"아.. 근데 저희가 오토시티에는 사무실이 없어요. 이 차가 공동판매차량이라.. 오토월드랑 오토 랜드에는 있는데  여기선 오토 랜드가 가깝거든요. 거기로 가셔야겠습니다."

이젠, 복로가 애써서 달래서 인내심 깊게 참아주던 봉숙이가 지쳐 쓰러질듯한 기색이다.

아들도 아기띠에 매달려 있는 게 지쳐서 칭얼대고 있었다.

봉숙은 분노가 가득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누가 일을 이딴 식으로 해. 이래서 신차를 사야 되는 거야. 여보."

복로는 난색을 표하며 봉숙을 한번 더 설득한다.

"여보 나 여기에 시간을 더 뺏길 순 없어.

지금 못 참고 파투를 내버리면 어젯밤부터의 일을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야 해. 그리고 이제껏 투자한 시간도 가치가 사라져 버린다고. 뭣보다 저 차는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최상의 차인 거 같아. 난 몇 개월 쓰고 다시 팔 차에 이 이상의 돈을 쓰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때 강한구가 솜씨 좋게 끼어든다.

"사장님 지금 아기도 너무 힘들어 보이고 사모님도 지쳐 보이시는데 먼저 보내는 게 어떨까요? 지금 1시가 넘었으니 랜드에서 계약서 쓰고 다시 시티로 다시 넘어오면 아무리 빨라도 오후 3시는 될 테고.. 어차피 트럭을 몰고 가셔야 하는데 의미 없이 시간 보내시는 것보단 한 사람만 조금 더 힘든 게 나을 거 같은데요"

박주임이 추임새를 넣는다.

"아유~ 애기가 너무 힘들 거 같아요. 이거 참 죄송합니다. 여러 가지 착오가 생겨서 어쩌다 보니..아가야 엄마랑 집에가서 먼저 쉬고 있어~"


3시라면 오늘 하루는 그냥 이걸로 다 날린 셈이다.

가을날 가족 나들이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더 버티기 힘들었던 봉숙은 한번 더 화를 삼키곤 먼저 가겠다며 떠나 버렸다.

안쓰러움과 미안함 아쉬움을 담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복로는 강한구의 차에 몸을 싣고 오토 랜드로 떠났다.


강한구일행과 복로는 처음 약속장소인 4층이 아닌 5층에 있는 커다란 사무실로 갔다.

마치 은행이라도 된 양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앉아서 계약서를 써 대고 있다.

강한구는 접수대에 있는 경리사원에게 다가가 짐짓 피곤하다는 듯 한손으로는 엄지와 검지로 양쪽 눈을 꼬집으며  다른 한손으로는 건방진 태도로 손을 내민다.

"미스킴 아까  말했던 계약서 좀 빨리 줘봐."

사탕을 입으로 굴리는 미스킴이 성의 없이 계약서 파일을 건네자 강한구는 돌아섬과 동시에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을 띄며 말한다.

"사장님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곧 끝이에요"

강한구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쓰인 계약서를 설명하며 군데군데 사인을 받았다.

주절주절 뭔가 말을 많이 하는데 복로에겐 잘 들리지 않았다.

어서 이 계약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강한구가 수십가지 약정일일히 안내는데 그중 이런 항목이 있었다.

"매수자 일방의 사정으로 계약을 파기할 시 계약금은 돌려 드리지 않습니다. 반면 매도자의 사정으로 계약이 파기될 시 배액 배상이고요. 동의하세요?"

"오늘 사 갈 건데 웬 계약금입니까? 전액 입금할 예정이에요"

복로가 대답했더니 강한구는 그저 의례적인 조항일 뿐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며 그 부분에 따로 사인을 청했다.

복로는 그 외에도 몇 항목 사인을 더 하고 계약서를 한번 더 점검한 뒤 강한구에게 건넸다.

강한구는 복사를 하고 오겠다며 잠시 사라졌고 복로는 앉아서 스마트 뱅킹으로 차량대금 6백만원을 전액 이체했다.

옆에 있던 박주임이 입금을 확인해 주었고, 곧 다시 나타난 강한구가 봉투 하나를 복로에게 건넸다.

"이건 사장님 계약서고요. 자! 이제 다 해결됐으니 서둘러 차 인수하러 가시죠! 가족들과 저녁은 같이 드셔야죠~"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또 차에 타서 오토시티로 달려가는 내내 강한구는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고 묻지도 않는 수다를 떨어댔다.

박주임도 옆에서 끼어들어 쉴 새 없이 쓸데없는 질문과 수다를 늘어놓았다.

복로는 그저 피곤할 따름이라 오후 네시의 따분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두 사람의 질문과 걸어오는 대화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한편 머릿속으로 내일부터 해야 할 작업들을 구상해 보고 있었다.

'이 남자들 생긴 것 답지 않게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복로는 머리가 지끈거려 멀티태스킹으로 행하던 생각들을 멈추고 아내에게 곧 갈 예정이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아뿔싸! 핸드폰 배터리가 3%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복로의 폰은 배터리 성능이 떨어진 오래된 폰이었고 어젯밤 충전을 하지 않았는 데다가 낮시간 허송세월을 하며 검색이나 전화통화.. 차에서 귀여운 아기의 동영상을 찍어댄 통에 배터리가 거의 다 소모되어 버린 것이다.

강한구에게 차 안에 배터리 충전기가 있냐고 물으니 강한구가 룸미러로 눈알을 몇번 굴리며 쳐다 보다니 핸드폰 기종 뭐냐고 물었다.

"안드로이드예요"

"저희는 다 아이폰을 쓰고 있어서요~"

괜찮다. 얼른 차를 몰고 집으로 가면 될 일이다.

기약 없이 기다릴 아내에게 전화하는 게 우선이다.

복로는 지체 없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통화가 끝난 직후 핸드폰에 암흑이 찾아왔다.

이까짓 네모난 작은 상자가 뭐라고 어딘가 신체의 한 부분의 기능이 정지된 듯한 답답함이 엄습해 왔다.

어라 여긴 또 어디야?왜 이리 멀어? 이쯤이면 다 와 가지 않? 복로가 창밖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자 때마침 보조석의 박주임이 몸을 돌려 묻는다.

"사장님 가서 차량 한번 더 확인하시고 잔금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

복로의 머릿속에 깜깜한 공허가 찾아들었다.

꺼진 텔레비전 화면처럼 잠시 멈춰 있던 복로의 까만 머릿속에 하얀색 한 줄의 의문이 둥실 떠 올랐다.

-이건 대체 무슨 개소리?-

"잔금요? 아까 전액 다 입금했잖아요"

"네? 아까 입금해 주신건 계약금이죠."

"계약금이라고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계약서에 뻔히 차량대금 6백만 원 정 적혀있었잖아요"

"무슨 소리세요? 계약금 6백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잔금 1,000만 원이라고 적혀 있던 거 못 보셨어요? 계약서를 확인해 보세요."

복로가 손에 쥐고 있던 계약서를 황급히 꺼내보자 어처구니 없게도 그건 다른 사람의 계약서다.

계약금은 가장 윗줄에 크게 적혀 있고 잔금과 최종금액은 다른 칸에 작게 적혀 있는 희한한 계약서다.

분명히 아까 내가 쓴 계약서는 이렇지 않았다.

틀림없다.이건 나를 속이려고 만든 가짜 계약서다.

복로의 머릿속엔 이미 빨간 경고등이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사기야.이건 사기라고.그래 이게 아까 현수막에 써 져 있던 그 사기인가보다.나 지금 사기 당하고 있는거야.아니 이미 당해 버렸다구.'

그렇게 생각한 복로는 다급히 생각을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금 다른 사람 계약서를 줘 놓고 뭘 확인해요?"

강한구는 인상을 쓰며 으슥한 공장지대의 그늘 담벼락 아래로 차를 세우더니 계약서를 빼앗아 확인해 보곤 쌍욕을 내뱉었다.

"아니 미스킴 이 ㅂㅅ같은 ㄴ이. 사장님 죄송해요. 우리 경리가 옆에 사람 계약서를 넣어 놨어.아 놔 이거.. 다시 사장님거 그 계약서 가지러 가시죠.

일단 오후 퇴근시간의 정체를 뚫고 다시 그곳으로 갈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복로는 분노를 삼켰다. 

의미가 없을지라도 사실관계를 따져 볼 참이었다.

"아니. 그전에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차량 가격이 6백만 원이었잖아요"

"그것도 계약금을 보신 거예요. 그 차량은 공매차량이고요. 공매차량은 계약금과 잔금 그리고 총액을 다 따로 기재하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구요. 사장님이 잘못 보시곤 왜 저희한테 화를 내십니까?"

공매? 공매는 또 뭐란 말인가.. 경매는 알아도 공매는 들어 본 바가 없다.

아니 그것보다 그런 법조항이 세상에 있을리도 없다.

"그럼 그 매물 게시물 다시 봅시다"

"사장님이 온다고 약속해서 그 매물 내렸어요.자꾸 다른 사람들이 그거 보고 오면 안되니까"

아뿔사 그럴수 있겠다.확인할 방법을 없애기 위해 매물도 삭제했을 법하다.

그리고 어쩌랴 핸드폰은 이미 명을 다했고 복로로썬 확인할 방법이 없는걸..

 심지어 복로는 이 하잘것없는 시비를 더 이어 갈 기력이 없었다.

복로는 기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다 필요 없고 됐어요. 그냥 이 거래 안 할 테니까 입금한 거 환불해 주시죠"

말이 환불요구지 사실은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셈이다.

강한구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까 강조하며 말씀드렸듯이 매수자 일방의 사정으로 인해 계약이 취소되면 계약금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아쉽게도 계약조건을 제대로 인지 못한 건 사장님이시잖아요. 사장님 사정으로 인한 계약 파기니 6백만 원은 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하----"

복로는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복로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황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6백을 떼이고 물러서서 민사소송을 할 것인가? 아니다. 상황에 대한 증거가 없지 않은가!

핸드폰이 없으니 전화로 조언이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이대로 다시 매장으로 돌아간들 계약서나 복로가 보았던 해당 매물의 인터넷 정보는 충분히 날조가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가 그 모든 것을 증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 보였다.

훗날 복로는 이 시점에서 처음 오토 랜드에 갔을 때 보았던 현수막을 떠올려 내어 몸을 돌려 달아나 112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자신을 탓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설령 핸드폰에 배터리가 있어 어딘지도 모를 자신의 위치정보로 112에 전화를 했다면 그곳은 경찰 현수막에 적혀 있던 <납치/ 감금/ 폭행>이 일어나기 딱 좋은 으슥하고 인적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당시의 복로는 그 생각을 떠 올리지도 못했다. 가뜩이나 지쳐 버린 머리가 도무지 쉴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두 덩어리들은 으슥한 공장지대 인적없는 편의점 앞에 서서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쉴 새 없이 선택을 종용하는 한편.

자기들도 오늘 하루 이 거래에 치중하며 시간 다 날렸는데 사장님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우린 어쩌냐는 적반하장의 원망까지 해 댔다.

박주임은 이따금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가서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 보자"며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쳐 댔는데 이때 복로가 오토 랜드의 사무실로 돌아가 계약서를 확인해 보자고 했으면 어땠을까?

틀림없이 복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날조된 계약서를 들이밀었을 테다.

인질이 된 돈 6백만 원. 증명할 방법이 없는 이미 날조되었을 것이 뻔한 계약서.

그리고 이미 삭제되었거나 날조되었을게 뻔 허위매물 게시글.

입증할 방법이 없는 막막한 상황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복로는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그 옆에서 두 남자가 찰싹 달라 붙어서 사장님 타령.. 아니 급기야 박주임은 형님 타령을 해 대며 복로의 정신을 압박해 왔다.

이따금은 언성을 높여 협박하고 이따금은 낮은 어조로 구슬리는 한편, 강한구는 틈틈이 전화통화를 해 대며 이 상황을 자기들의 사장이라는 장 사장이라는 작자와 공동 차주라는 이사장이란 사람에게 쉴 새 없이 전했는데, 강한구가 전하는 말들로 판단되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존재인) 이 두 사람은 각각의 역할 분담이 달랐다.

강한구 일당의 사장인 장형구 사장은 고객님의 사정을 딱히 여겨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는 온건파였고,

반면 공동 차주인 이사장은 계약서대로 위약금징수를 강행하겠다는 강경파였다.

이사장은 끝없이 전화가 와서 "같은 매물을 보고 와서 지금 당장이라도 사가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빨리 결정하라. 잔금 치를 돈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 팔겠다" 성화를 부렸다.

돈이야 있다. 하지만 그 매물에 그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터의 신차가격은 1,800~2천만원이다.

이들이 가상으로 설정한 가격인 1,600만원에200만 원만 더 주면 신차를 뽑을 수 있기 때문에  연식 오래된 차를 그 값에 구매하수는 없는 일이었다.


돈이란 인질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되는 상황극의 압박.

보이지 않는 가상의 존재 두 명과 눈에 보이는 두 사람까지 총 네 사람의 거침없는 압박이 쉴 새 없이 복로의 정신을 두들겨 댔다.

당시의 복로는 몰랐지만 복로는 그 어느 지점 어딘가에서 정신줄을 완전히 놔 버렸다.

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복로의 이성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복로의 육체를 벗어나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이성은 국민학교 언젠가 만들었던 종이컵 실전화  마냥  한줄기 가냘픈 실로 자신의 판단을 미약하게 전할뿐.

달리 복로의 육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복로는 돈이 인질이 되었고 자신은 네고시에이터로서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인질은 돈이 아니라 복로 그 자신이었다.



결국 복로는 이성적 해결을 할 상황을 놓쳐버리고 스스로 수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순간 복로의 머리는 어벤저스에서 타임 스톤을 이용해서 타노스와의 승부에 대한 6,112,409,193 가능성을 헤아리던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바쁘게 돌아가, 기껏 약 수십가지의 가능성을 헤아려 봤고, 고심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그 차는 지금 와서 대기 중이란 사람에게 팔고, 당신네 장형구 사장이 가진 차량 중에서 내가 입금한 6백만 원으로 살 수 있을만한 차를 물색해 주세요. 그 차를 구매하겠습니다"

강한구가 전화로 장 사장에게 새로운 매물을 물색하는 동안 박주임은 이젠 위로의 말을 쉴 새 없이 건넸다.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낫다.

-그나마 잘한 생각이다.

-우리도 이런 착오로 계약금을 먹으면 다리 뻗고 못 잔다.

-요즘 트럭 매물이 귀하다.그러다 보니 이런일이 벌어진다.

-공매차량은 법이 어쩌고 저쩌고..

박주임의 헛소리가 쉴새없이 귓전을 강타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여전히 답이 없는 시뮬레이션이 리플레이되고 있고 멍하게 응시하는 저기 서산 너머로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참 통화한 강한구는 여섯 개의 매물을 추려 줬다.

32만 km를 주행한 92년식 기아 봉고트럭이 620만 원..

22만 km를 주행한 99년식 포터가 700만 원..

17만 km를 주행한 06년식 봉고가 850만 원..

나머지 물건도 대동소이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사기라는 걸 이성은 인지했고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복로는 이미 뇌가 마비된 상태.  

강한구와 박주임이 보여주는 쓰레기차량들이 서 있는 으슥한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이따금씩 가닥 없는 신음만 토해 낼 뿐이었다.

"어쩌실 겁니까 사장님! 이젠 결정을 하셔야 한다구요"

"맞아요! 형님 더는 시간을 끌 수가 없다구요"

"서둘러야 한다구요!"

복로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말했다.

"아무리 계약금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네요. 그래도 좀 납득할만한 물건이라도  다시 한번 물색해 주세요"

"아니! 형님! 계약금이 인질이라뇨!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다니고 있는데! 다 형님 사정 딱해서 방법을 구해 드리려는 거 아녜요!"

박주임이  모아이 석상의 두꺼운 콧등을 찡그리며 소리를 빽-지르며 발끈하는데 강한구가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야! 박주임! 오죽 답답하면 그러시겠어. 내가 한번 더 알아볼게"

지금껏도 그랬듯 뻔한 수법이다. 복로도 이 식상한 수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것들이 아주 놀고 있네'

복로의 이성이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복로의 이성은 이미 유체 이탈하여 허공에 뜬 채로 그저 복로와 강한구 일당을 관조하는 상태.

이성이 전하는 바르고 현명한 메시지는 복로의 뇌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성의 메시지는 그저 복로의 의식밖에서 웅앵거려 대고 있었고 뇌는 그저 버벅거리며 원시적인 방어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복로는 그저 달아나고 싶었다.



이미 새까만 어둠이 내린 공장지대 골목에서 지쳐 앉아 있노라니 강한구가 한참의 통화를 마치고 말을 전했다.

"사장님 딱 두 개 더 있어요. 한대는 이사장 물건이고 05년식 14만짜리 포터 890만 원이고요. 또 한대는 우리 장 사장님 물건인데 09년식 97,000km짜리 기아 봉고예요 원래 1,200만 원짜린데 우리 사장님 물건이라 이거 하시면 1,100 정도로 해 드리겠답니다. "

복로의 미련한 뇌가 회전한다.

봉고의 신차가격은 대충 1,600만원정도다.

하지만 그딴건 이미 머리한켠에 저 멀리 치워 져 있었다.

극한의 기아에 시달린 사람앞에 던져진 음식물 쓰레기중에서 선택을 강요받듯.

열악하나마 주어진 것 조건안에서 헤맬 따름이었다.

그래도 200차이라면 키로수 짧고 연식 짧은 봉고가 낫다.

하물며 지금껏 보았던 폐차급 트럭들의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생각하면 가장 가성비가 높지 않은가!

복로는 주저 없이 포터는 필요 없고 봉고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이제껏 북평과 북청을 헤매다가 이번엔 다시 주악으로 이동했다.

'하... 참.. 씨발 하루가 왜 이렇게 기냐..'

지친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어딘가 한구석을 뒤지면 마약이나 시체가 한구 나올법한 자동차 상사에 도착해서 본 봉고는 지금껏 본 쓰레기들과는 달리 겉깨끗했다.

복로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이차가 안배되어 있었음을 직감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복로는 봉고를 계약하자며 이끄는 강한구의 뒤를 쫓아 어딘가 조선족 마피아가 등장했던 영화에서 본듯한 어둡고 퇴폐적인 사무실로 들어가 들으나 마나한 차량 설명을 들었다.


박주임이 꿀럭대는 소리가 나는 뒤집어 얹는 구형 생수통에 뜨거운 물을 따라 믹스커피를 내 오고, 처음 보는 인상 더러운 대머리 아저씨가 눈을 짝짝이로 찌푸리며 노려보는 와중에 강한구는 설명에 열심이다.

'야! 도복로 이거 거의 전손차량이잖아'

이성의 외침이 저 멀리서 작고 둔탁하게 들리는 것을 인지했는데 뇌는 달리 말한다.

"이거 뭐. 굴러는 가죠?"

"아유 그럼요. 굴러만갑니까? 잘 나가죠.고객님~저희가 철저히 상품 작업 다 거친 겁니다요~"

'야! 5백만 원만 더 주면 신차를 살 수 있는 가격이야! 이거 사기야.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해!'

이성은 분명하게 다시 한번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지만 뇌는 그것을 인지하고도 다른 행동을 한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잔금 이체 버튼을 누른다.

저 멀리서 이성의 단말마가 들려 오는듯 하다.

복로의 본능은 투덜거렸다.

쟤는 아까부터 왜 저럴까..이 정도면 괜찮은 차야.보다 난 지금 집에 가고 싶다구.

그렇게 5백만 원을 추가 입금하고 복로는 풀려 날수 있었다.

아침 8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퇴폐적인 사무실의 먼지 쌓인 커다란 시계를 보니 시간은 밤 10시다.

'아내는 자고 있겠지. 아니다. 전화도 못했으니 걱정하고 있겠구나'

희미한 이성적 사고가 비로소 떠 올랐다.

그러고 보니 큰일이긴 하다.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을 집에서 마냥 기다리는 것만큼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것이 어디 있던가...

그 순간.복로는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처럼 강렬한 갈증을 느꼈다.

가족의 얼굴과 음성, 따뜻한 목욕물을 갈망했다.

뜨거운 물에 한참을 샤워하고 나면 비로소 정신이 들 것만 같았다.

"저희 보험은 내일 24시까지 유지되니까 지금은 안심하고 운전하셔도 돼요. 내일 점심 지나서 명의 이전하고 연락드릴 테니까 그 뒤에 개인 보험 가입하시면 돼요."

강한구의 말을 뒤로하고 복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쓰레기 같은 계약서를 대충 구겨서 움켜쥐고 마지막 힘을 짜내 계단을 내려오는데  강한구와 박주임이 거머리처럼 들러붙는다.

그들의 험상궂은 얼굴엔 징그러운 웃음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박주임이 징그러운 웃음을 공기와 함께 스읍-하고 빨아먹더니 말을 내뱉었다.

"형님 다른 건 아니고.. 저희 두 사람 오늘 다른 일정 다 취소하고 형님 계약금 방어해 드리려고 오늘 하루 다 날렸지 않습니까.."

강한구가 말을 받았다.

"저희는 직원이라 저희한테는 남는 것도 없어요. 박주임이나 저나 이미 퇴근시간이 5시간이나 지났어요. 어디서 소주 한잔이라도 하게 좀 도와주십시오"

징그러운 놈들.. 복로는 속으로 흘리며 주머니 속의 5만 원짜리 하나를 꺼내 박주임.. 아니 모아이 석상의 두툼한 손을 당겨 와 탁- 하고 얹어 주었다.

"됐죠? 이제 좀 가세요"

강한구가 쓰읍 침을 들이키며 헤헤 웃더니 말한다.

"사장님~그래도 저희가 시급이 만원이 넘는데.. 둘이 열 시간입니다요. 어떻게 좀.. 안될까요"

정말 징그러운 놈들이다.

복로는 다시 오만 원을 꺼내어 강한구의 손을 당겨 눈을 바라보며 쥐어 주었다.

"이젠 빨리 가서 소주 두 잔 드쇼"

저기 허공에 쓰러진 자세로 둥둥 떠 있는 이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고함을 내 질렀다.

'야--------------------!!'

거 참 시끄럽다.조용히 하라구.

난 지금 이 흉측한것들과 떨어질 수만 있다면 1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도 더 쓸수 있을것만 같단 말이야.

10만 원을 더 뜯어 내고서야 비로소 징그러운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

복로는 한결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카랑카랑- 카랑카랑- 트럭답지 않은 어딘가 끝이 뾰족한 시동음을 토해내며 봉고의 엔진이 탈탈탈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들을 우로 꺾어 주차선을 빠져나오는데 저기 멀리서 함박웃음을 가득 띈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이 깊이 허리를 숙인다.

복로는 중고매매상 입구를  나서 우회전을 하고 한 500미터쯤 달려갔다.

거의 전손에 가까운 차량이라서 그런지 차가 펄쩍 펄쩍 널을 뛴다.

저기 뒷쪽 트럭의 허리와 발치께에서 정체불명의 둔탁한 비명들려온다.

덜컹-덜컹-덜커덩-덜컹

사기를 당해서 큰돈을 날렸지만 아무래도 좋다.

이런 X차라도 폐기물을 처리하고 새로운 자재를 사다 나르는 화물차 본연의 역할은 잘 수행하리라.

아무래도 좋아.

단지 지금은 봉숙이와 우리 아기의 얼굴 그리고 따뜻한 물이 필요할 뿐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래 아무래도 좋다구..

복로는 창문을 열었다.

순간 차가운 가을밤 공기가 훅-하고 들어오며 저 멀리 허공에서 연처럼 떠서 끌려오던 이성이 몸속으로 쑥---- 하고 빨려 들어왔다.

복로는 순간 급 브레이크를 밟았다.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좋을리가 없잖아!

하루종 이성이 허공에 떠서 외쳐대던 소리들이 급물살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그제야 모든 퍼즐들이 딱딱 맞춰지기 시작했다.

등골을 타고 뜨거운 열기가 목뒤로 다시 머리꼭지로 올라왔다.

자기 손으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쓰고 잔금까지 다 이체시켜 버린 상황.

더는 수습할 길이 없는 것이 자명했다.

"헉!.. 어쩌지.. 나 사기당했어!"

복로는 그제서야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 길로 그대로 차를 달려 그곳에서 가까운 친구의 집으로 갔다.

봉숙이와의 통화가 가장 우선. 그다음은  상황 파악이 급했다.

어쩐 일이냐는 친구의 질문에 복로는 외쳤다.

"나 지금 사기당했어. 충전기! 그리고 니 전화기! 그리고 인터넷!"

봉숙이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먼저 자라는 말을 전하고 복로는 서둘러 중고차 사기 사례를 검색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계가 펼쳐졌다.

어떤 뉴스에서는 절뚝거리며 도망가는 손님을 차를 타고 느릿하게 쫓아가는 중고차 판매원이 차창밖으로 야구배트를 흔들며 "너 일로 와봐 좀 맞게!"웃으며 외쳤다.서너 명에게 감금당해서 발가벗겨져 매를 맞은 피해자, 달아나가다 잡혀 으슥한 골목에서 몰매를 맞는 피해자도 있었다. 지어 중고차 사기를 당해 자살한 피해자들도 여럿이었다.

복로의 상상을 초월하는 케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례들을 보다보니 하루종일 복로가 당한 것은 양반 대접이었다

이성이 돌아온 후. 돌아오는 내내 차에서 돌이켜 본 것처럼 이들의 행각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철저히 계획적이고 매조직적이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번복하며 뺑뺑이를 돌리던 것도 호구와 호구의 일행을 지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고, 일행으로부터 호구를 분리한 것과 그 이후로 쉬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해 댄 것도 호구의 이성을 원심분리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들이 차를 세우고 대체 어쩔 거냐고 선택을 종용하던 곳은 항상 인적이 없고 으슥하고 어두운 곳이었고  핸드폰이 배터리가 없다는 것은 몰랐겠지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만 해도 질문을 하고 대화를 걸어왔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루의 기억이 인터넷 속의 사기 사례들과 거의 완벽히 일치했다.



2

복로는 황망한 표정의 친구에게 얼른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가진 것을 판단했다

감정에 둔한 복로가 딱히 인식하지 못했을 뿐.

복로는 자신이 하루종일 공포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복로가 당한 것은 어쩌면 일종의 감금이었다. 형법 350조 공갈죄를 적용할 여지가 충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자신의 주장 외에는 증명할 방법은 전무했다

복로가 가진 것은 오직 두가지 뿐이었다.

한가지는 허위매물의 게시글이었다.

이미 내렸다는 강한구의 말과는 달리 참 다행이게도 복로가 최초로 봤던 인터넷 매물은 아직 그 상태 그대로 있었고 복로는 그것을 빠짐없이 캡처했다

다만 복로가 산 것은 전혀 다른 차량이라 이 증거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복로가 가진 또 다른 한가지는 시간이었다

상황은 수습할 도리 없이 흘러가 버렸지만, 척박하나마 주어진 조건안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포지션을 빨리 선점해야 했다.

복로는 집의 지하주차장에 차량을 대충 주차하고 올라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있었다.

복로는 셔츠를 벗어 러닝셔츠만 입고 가을밤 도로변에 서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평소 음주를 즐기지만 주량은 턱없이 약한 복로의 안색은 피로와 알콜이 혼합되어 순식간에 더 안 좋아졌고 체온은 빠르게 내려가 처음에는 이 나중엔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최초 진술이 중요하다고 했다.

복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고차 사기꾼들의 행태를 고려하여 말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고  그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고 자신이 구성한 프레임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복로는 다시 셔츠를 입고 철거를 하는 동안 여기저기 다쳐 아직 피가 생생하게 맺힌 팔이 드러나도록 팔을 걷었다.

아까 낮에 골목에서 박주임이 뒤돌아 섰을 때  박주임의 큰 덩치에 부딪쳐 벽에 긁힌 바람에 상처가 벌어져 맺힌 핏방울이 선명했다.

나름의 준비를 마친 복로는 가까운 지구대에 전화를 걸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이야기했다.

"저... 지금 허위매물에 속아서 찾아간 중고차 업자들에게 아침 9시부터 지금까지 감금당해 있었고 공갈을 당해서 억지로 차량을 강매당하고 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지구대의 경찰관들이 순식간에 달려와 덜덜 떨고있는 복로를 부축해 순찰차에 태워 지구대로 데려갔다.

추위에 덜덜 떨다 보니 말도 덜덜 떨려서 나왔고 손과 팔에 맺힌 피를 본 경찰관들이 겁에 질려 떠는듯한 복로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인스턴트 녹차를 타 주고 담요도 덮어주었다.

복로는 자신이 허위매물에 속아서  중고차 판매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두 명의 험상궂고 난폭한 인물들에게 하루 종일 감금상태로 끌려다닌 끝에, 강압적으로 전손에 가까운 폐급 차량을 신차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입하게 되었고 마지막까지도 어두컴컴한 주차장으로 일당이 쫓아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통에 겁을 먹고 가지고 있던 현금을 모두 줄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경찰관들은 해당 진술을 전산에 올리겠으나 익일 다시 해당 관할 경찰서에 가서 접수해야 함을 당부했다.

차량 대금을 이체하고 계약서를 쓴 지 두 시간 만에 경찰에 가서 진술했으니 복로의 주장은 보다 신빙성을 가질지도 모른다

복로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해가 뜨자마자 차를 달려 어제 본 최초의 차량이 있던 곳으로 갔다.

다행히 아니 당연하게도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이 이미 다른 사람이 사 끌고 가버렸다던 차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복로는 그 차량의 사진을 모두 찍고 가까운 PC에서 금일 확인한 차량의 사진과 어제 친구 집에서 캡처한 매물사진과 매물정보를 프린트 한 다음 관할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경찰서에서 사건을 접수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중고차 사기 전담반 형사가 내려왔다.

형사는 복로의 진술을 기록하고 복로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입을 "쩝"하고 소리 내어 다신 다음 다시 힘을 주어 입을 닫았다.

형사는 잠시 고개를 숙여 진술서를 보며 손가락을 튕겨 볼펜을 몇 번 돌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복로에게 물었다.

"제가 저희 반에서.. 저 혼자서요.. 저 혼잡니다. 내 참.. 암튼 저 혼자 한 달에 접수받는 중고차 사기 사례가 몇 건 정도인 줄 아십니까?"

복로가 알턱이 있나. 그저 고개를 저었다.

"대충 한 300~400건 정도입니다. 이게 한 달 접수건수예요. 일 년이면 한 4천 건 되겠죠? 하루로 치면 한 열 건에서 열댓 건.. 지금 도복로씨 가시고 나면, 제가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저한테 한 아홉 명에서 십 수명은 더 찾아와서 똑같은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네.."

형사가 다시 묻는다.

"근데요..일년동안 그 많은 사기꾼들 중에서 몇 놈 잡아넣는지 아십니까?"

역시 알턱이 없었다.

형사는 이번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답했다.

"한 7~80명 잡아넣으면 많아요"

형사는 진술서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딱하다는 표정과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을 뱉었다.

"대부분 증거가 없거든요. 피해자분 처럼...아니..심지어 지금 피해자 분은 더  심하다구요.자기 손으로 사인 다 하고, 응? 대금 다 이체하고.. 응?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요? 사정은 딱한데 이게 이게 이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이 내용들을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뭣보다 전혀 다른 차를 샀잖아요. 금액이 달라서 허위다. 이렇게 허위매물 신고도 어려운 게 실제로 차가 있기 때문에 이건 본인 주장일 뿐이에요. 증거 없잖아! 그 새끼들 뭐 인정하겠어요? 형사 얼굴만 쳐다봐도 반사적으로 오리발부터 내미는 새끼들인데.. 씨발새끼들.."

형사는 한참 한숨을 푹푹 내쉬었는데 복로가 질문했다.

"정말 아무 방법이 없어요?"

형사 도복로를 잠시 빤--히 쳐다보다가 답했다.

"하나 있긴 있죠. 그 새끼들이 -제가 속여서 습니다. 허위매물이었습니- 지가 지 입으로 자백하는 걸 녹취를 따면 돼요."

복로는 답답했다.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건 쥐들이 모여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방법을 토론하는 셈이잖아요. 누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해요?"

"그게 문제죠. 누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겠냐 하는 거.. 그러니까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거지..뭐..고소장 이거 접수되면 일단 조사야 받겠지만 잡지도 못해요."

형사의 무책임한 말이 끝나고 나서 복로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찰서 밖으로 나가 녹음 버튼을 누르고 강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종료 됐으니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 뜻밖에도 강한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웃는 음성이었다

"네~ 고객님 어쩐 일이십니까?"

복로는 호구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그들의 오픈마인드에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는 한편 감사하며 되는대로 거짓말을 했다.

"어제 제가 얼마인지 물어본 그 승용차량 있죠?"

"아 네 그 차량이요? 왜요 관심이 있으세요?"

"내가 집에 돌아가서 와이프한테 이야기했더니 우리도 차 바꿀 때가 됐다고 그 차를 사는 게 어떤가 하더라고. 근데 내가 잘 생각이 안 나서 그런데 그 차 정확히 얼마였죠?"

"네 고객님 잠시만요.. 보자.. 보자.. 네 x만원입니다. 어떻게 가격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좀 비싼 거 같아요.. 쩝.. 우리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내가  어제 솔직히 좀 눈탱이 맞은 건 맞잖아.. 내가 어제 집에 가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근데 이제 와서 어쩌겠어.. 그래서 생각난 게 그 차란 말이죠. 그 차를 내가 추가로 살 테니 내가 눈탱이 맞은 만큼만 좀 깎아줘요.x만원 말고 y만원에 달라구요"

"아니.. 차 한 대 더 사시겠다는 건 좋은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정당하게 이뤄진 거래에서.. 고객님이 스스로 선택하신 거 아녜요. 지금..."

"아니 강한구 대리. 당신이랑 박주임이 어제 나 허위매물로 꼬드겨서 이상한 계약서 쓰고, 나한테는 남의 계약서 하나 던져 주고  하루 종일 사람 끌고 다닌 게 맞잖아요. 당신들 차, 당신들이 운전해서 나 끌고 다니며 차 보여준 거 아녜요?"

"허위매물이라뇨.허위매물은 실제로 없어야 허위매물인데 고객님 직접 보셨잖아.객님이 다른거 선택하신거고..뭐 하루 종일 같이 다닌 건 맞는데..우리가 봉사한거지..아니 그걸 어떻게.."

복로는 조바심이 나서 강한구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당신 어제 그 포터 가격이 1,600이라더니 아직도 그대로 600에 올라와 있던데? 당신 주장처럼 잔금 따로 최종 가격 따로 올라와 있지 않고 최종 가격이 600이던데 이건 뭐야? 이게 허위매물 아냐? 허위매물은 징역 3년인 거 알아요? 몰라요? 그뿐이야? 아침에 가 보니 그 차 그대로 있는거 내가 북천경찰서 강형사랑 같이 현장 확인했다구요.당신이 어제 나한테 했던 말 내가 녹취 다 해 놨다구!어제 내가 폰질하는거 봤어요? 못 봤지? 왜 그랬을까? 녹쥐한다고 못한거지"

여기서 강한구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복로는 이 기세를 몰아 부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뒤에서 누가 복로를 툭툭 친다.

복로가 배정받은 형사였는데 어느새 따라와서 등뒤에서 듣고 있었나 보다.

형사는 담배를 낀 손을 휘두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아니 아니 아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조금 전에는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방법이 생각났나 싶어서 "그럼 어떤식으로 말해요?" 복로가 묻자 형사가 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

"글쎄..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지"

그럴 줄 알았다. 복로는 형사로부터 몸을 돌리고 기세를 몰아붙이기로 맘먹었다.

"내가 지금은 북청 경찰서에서 전화하는 거예요. 이미 소장 접수했고, 지금 옆에 중고차 사기 전담반 강xx형사 책상에서 그 허위매물 화면 같이 보고 있다고."

"아.. 아니.. 뭐 그런.."

강한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수화기 너머로 누가 욕설을 내뱉더니 "악!" 하는 강한구의 신음소리가 이어진 뒤,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장님. 저랑 이야기해요"

이건 또 누구일까?

복로는 여러 이름들을 떠 올려 보았다.

전날의 거래에는 여러 개의 업체와 여러 명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1. 인터넷 매물을 올린 업체는 진영상사

    소유주는 박충식

2. 연락이 닿은 해당 거래업체는 영길 상사

    업체 사장은 장형구

3. 계약한 봉고의 경우 업체는 대박 상사

    소유주는 신중수

4. 차량대금을 입금한 계좌 주인은 장형석   

    

"당신은 또 누구십니까? 장 사장 아니 장형구 씨? 이사장? 박충식? 신중수? 아니면 장형석 씨? 누구냐고요."

허스키한 음성의 남자는 흔들림 없이 말을 받는다.

"그게 다 누구예요? 저는 몰라요. 저는 최강국입니다. 이 친구들한테 사무실 일부를 공유해주고 임차료 받는 사무실 주인이에요. 같이 사무실 쓰다 보니 정으로 아니면 업계 선배로써 가끔 이런 일도 중재해 주곤 한다고요. 지금도 옆에서 보니까 또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싶어서 제가 나선 거라고요."

복로는 이게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의 관리자임이 분명했다.

복로는 남자를 한번 추궁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아요?다급히 전화를 뺏은 사람이 자신은 아무 상관없는 중재자라고 하면 어떤 바보가 속아요?"

'바로 너 같은 놈이야 이 멍청한 놈아'

복로의 이성이 잠시 끼어들어 복로를 꾸짖었다. 한최강국이 재차 주장한다.

"못 믿으면 마시고요. 근데 어쩌겠어요 난 아닌데. 쟤들이 아직 초짜라 서툴러요. 그래서 오해도 생긴다고요. 저한테 사정 한번 말해요"

복로는 헛수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간략히 주장하는 바를 전했는데 거기에 한 가지 거짓을 섞어 넣었다.

"그 두 사람 덩치랑 얼굴 좀 보세요. 팔뚝의 문신하고.. 겁이 나서 끌려 다닌 거라고요. 강압적으로 벽에 밀치기까지 해서 팔 다 긁혀서 맺힌 피가 아직도 맺혀 있다고요.나 이제 병원 가서 진단서도 뗄거야."

남자는 하~하고 탄성을 내뱉고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그래요.그렇다 칩시다. 근데 그걸 다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복로는 대답했다.

"내가 어제 폰 한번 안 꺼낸거  박주임은 알 거라고.. 내가 왜 그랬을까요? 아.. 이거 잘못하면 납치당하거나 감금당해서 매 맞겠구나 겁이 나서 녹취를 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서 강한구 씨가 떠들었던 말만으로도 허위매물은 충분히 입증이 된다고요. 강한구랑 박주임이 나한테 다그치며 언성 높이는 것도 내가 다 추려내서  지금 옆에 있는 형사님한테 증거물로 다 제출했고 공갈죄로 고소했으니까. 조사받으러 와서 한번 들을 수 있으면 들어 보던가."

최강국은 갑자기 빠른 말투로 대꾸한다.

"사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그리로 갈 테니 만나서 얘기 시다"

"난 당신들 무섭고 겁나니까 경찰 입회하에 만날테니 북청 경찰서로 오세요"

최강국은 북청 경찰서로 오라는 복로의 요구를 거절했다.

자기도 중고차 판매업을 하고 있는데 관할서에 얼굴 내밀어 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복로는 끝내 경찰서에서의 만남을 주장했고 최강국은 물러서지 않아 결국 다른 지역의 경찰서 옆 카페에서 만나기로 합의를 봤다.

형사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만나서 뭐 어떻게 하실 계획인데요? 그 새끼들 형사한테 조사받으면서도 오리발만 내미는데 피해자분이 할 수 있는 게 사실 없어요. 그래도 우리한테 불려와서 취조라도 당하는게 그나마 혼쭐이라도 내는 거라고요"

형사가 딴엔 걱정을 해준답시고 이야기했지만 무의미한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형사는 이 사건을 수습할 방법이 없으며,  처벌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복로가 가진 것은 빠른 대처로 인한 시간적 여유뿐이었다.

차를 인도한 지 불과 12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런 급작스런 정황을 접하게 했으니 이 사기꾼 조직을 어느 정도 당황하게 만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을 이용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형사를 뒤로 하고 복로는 차를 몰아 카페를 향해 달렸다.

차를 달리는 도중에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복로는 자신이 강한구와 모아이를 두려워했고 그들이 가하는 공포에 억지 계약서를 썼다고 방향을 잡았는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겁도 없이 혼자 간다는 것은 설정에서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복로는 중간에 합류한 친구 삼진이와 함께 미지의  남자 최강국을 만나러 달려갔다.




부다 다다다-

복로가 삼진이와 함께 서 있는 카페 앞으로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포르셰 한대가 주차되더니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덩치가 좋은 남자가 내렸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어왔다.

"도복로 사장님?"

"네. 접니다. 근데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비스듬히 서서 비릿하게 웃으며 되 묻는다.

"도 사장님은 왜 오셨는데요?"

"변호사 선임하고 소송하고 조사받는다고 출석하고 일은 번거로울 것이고, 돈은 묶여 있을 거고 차는 처치곤란일 텐데 '중재자'님께서 그런 복잡한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제시할까 싶은 기대감으로 나왔습니다"

최강욱은 스산히 웃음을 흘리며 손바닥을 들어 카페 문을 가리켰다.

"자. 그럼 일단 들어가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시다"

최강욱은 자리에 앉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 사장님. 일단 녹취한 음성이랑 제출했다는 사진부터 좀 보여주시죠?"

"왜요?"

"제가 상황을 파악해야지 도 사장님을 도와 드리던가 하지.. 상황도 모르고 어떻게 도와줘요?"

복로는 실소했다. 도와준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기만의 언어다.

물론 녹취록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바로 시치미를 떼기보다는 핸드폰을 열어 음성메시지 함을 열었다.

목록 중 하나의 버튼을 누르려던 복로는 고개를 들어 최강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요. 헌법 12조 2항이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고소인이 아니라 피고소인이고 수사기관이 영장을 발부받아 핸드폰을 압수해가도 내가 그 비번을 풀어줄 의무는 없어요. 핸드폰을 해제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건 수사기관 몫이거든요. 수사기관과 피의자의 관계도 그런데 하물며 피해자가 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 줘야 할 이유가 없죠. 내가 당신한테 이걸 보여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거지.."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마당에 뭔 삭막한 말을 그렇게 하시고 그래.. 이거 보세요. 도사장님 그래서 지금 원하시는 게 뭔데요?"

"원하는 거요?"

복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답한다.

"강한구가 말했던 명의이전 시점인 점심이 지나지 않았으니 명의이전은 아직일 거 아녜요. 차량 다시 가져가시고 전액 환불해 주세요"

잠시 침묵하던 최강국은 뜻밖에도 흔쾌히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차량 다시 가져가고 전액 환불하라 이야기할게요"

경직된 얼굴로 커피만 들이켜던 삼진이가 다행이라며 웃으며 복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최강국은 핸드폰으로 강한구 일당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전화연결을 시도하는 시늉을 하던 최강국은 강한구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제안했다.

"애들이 전화를 안 받는데 일단 차고지로 이동합시다. 트럭 몰고 오세요. 어차피 거기서 환불해야 하니까. 나는 이동하면서 한구하고 통화할게요"

복로는 불안했다.최강국 틀림없이 명의이전을 서두르라고 지시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행은 각자의 차량으로 이동해서 주의 중고차 상사로 이동했다.

두어 개의 건널목을 지나는 동안 복로는 덜거덕 거리며 탈수기처럼 흔들리는 구형 봉고를 운전하여 최강국의 차량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아뿔싸..최강국의 포르셰는 몇번의 칼치기를 거듭하더니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복로는 주안의 상사에 도착하여 컨테이너 박스 수십 개를 쌓아 만든 사무실 밑으로 가 최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세요?"

"사무실에서 명의이전이 됐는지 확인 중이에요. 내려갈 테니 기다리세요"

"어제 그 사무실입니까? 제가 올라갈게요"

지금 벌어지고 있을 개수작을 막기위해 바짝 따라붙으려는 복로를 최강국이 밀어낸다.

"어제 그 사무실 아니에요. 밑에서 기다리세요. 지금 자동차 등록사업소에서 회신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수십개에 달하는 컨테이너 사무실들을 어떻게 다 뒤질텐가..

복로 삼진과 함께 서서 40여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순간 명의 이전이 이뤄지고 있으리 답답함에 최강국에게 전화를 걸어도 최강국은 계속 통화 중이다.

속을 태우며 따가운 가을볕 아래에 서 있노라니 컨테이너 옆에 설치된 철제 계단으로 탕-탕-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최강국이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느린 걸음으로 내려왔다.

최강국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참..어쩐답니까. 경리가 명의이전을 이미 해 버렸다는데."

그럴 리가 없다. 웃기는 소리다. 우리가 기다리는 사이에 명의이전을 완료한 것이 분명하다.

"그럼 다시 명의이전 해 가세요."

"명의 이전이 됐으면 이젠 도 사장님 찬데 그건 어렵죠~참 나.. 안타깝네 어째 이런 일이.."

"명의 이전비 제가 부담할 테니까 다시 명의 이전해 가고 잔액 환불하라고 하세요"

"그게 어렵다니까요. 사실 외형적으로 보면 정상적인 계약이 성사가 된 건데.. 이제 와서 뭘 우째요?"

복로는 지체 없이 답했다.

"어쩌긴요. 법대로 하면 되지. 내가 증거가 없나 뭐가 없나. 허위매물 올린 놈하고 강한구한테 경찰 조사받을 준비 하라고 전하세요."

최강국이 담배를 땅에 패대기쳤다.

진청바지 밑의 반짝거리는 와인 빛깔의 구두가 담배를 짜증스럽게 비벼 밟았다.

그 모습을 흘리며 삼진의 소매를 잡고 돌아서는데 최강국이 언성을 높여 외친다.

"여봐요! 도 사장님!"

복로가 뒤 돌아보니 최강국이 상기된 표정으로 씹어 뱉는다.

"아니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고소해서 뭐 어쩌겠다고요!"

복로가 몸을 돌려 추궁했다.

"당신이 허위매물 올린 진영상사 박충식이지?

아니면 어제 내내 전화로 강한구하고 박주임 시켜서 뒤로 공갈 사주한 영길 상사 장형구인가?"

최강국이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상을 쓰더니 씹어 뱉었다.

"내참! 여봐요! 도. 사. 장. 님!"

"당신도 경찰 조사받을 준비 하시죠"

복로가 재차 몸을 돌리려 하자 최강국이 말을 누그러뜨리며 매달린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는 중재하려는 거예요. 장형구는 사무실 임대료 받을 때나 한 번씩 보는 사람이라고요! 나는 그냥 양쪽 다 도와주고 싶은 거라고요. 아니 그렇게 가서 행여라도 강한구 박철수 저 하잘것없는 인생들 콩밥 먹이면 피차간에 좋을게 뭐라고.. 내참 인생 그렇게 살지 좀 맙시다!"

복로도 이대로 돌아가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패거리가 모여서 다른 궁리를 하기 전에, 혹은 자신이 짜 놓은 프레임의 빈틈이 보이거나 부서지기 전에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그럼 한번 중재해 보세요"

"일단 사과부터 하라고 제가 애들 불렀습니다. 잠시만요"

최강국은 전화를 꺼내 강한구에게 전화를 걸더니 상사 출입구 쪽을 향해서 소리를 빽-질렀다.

"빨리 튀어와!"

저 멀리서 험상궂은 덩치 둘이 어울리지 않게 양손을 포개고 쭈뼛거리며 등장했다.

복로는 삼진이의 뒤로 숨어서 겁에 질린 듯이 덜덜 떨면서 말했다.

"최...최 사장님 저 두 사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 주세요"

"아니 사과부터 받으시라고 부른겁니다."

"내가 저 두 사람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세요? 난 사람들이 너무너무 무섭다고요!"

뒷걸음질 치는 복로를 보며 최강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표정이다.

옳거니 너는 다 알고 있구나.내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복로는 연신 두려움을 호소했다.

"최 사장님이 가서 사과는 필요 없고 차 가져가고 돈 가져오라고 전해 주세요"

사기꾼 일당 셋과 대치해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복로는 끝까지 두려움을 호소하며 두사람의 접근을 원천차단했다.

최강국은 한숨을 내쉬더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강한구와 모아이에게 다가가 섰다.

최강국 앞에선 두 사람은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보였다.

두 손과 두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상체와 고개는 푹 수그리고 뭔가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는다.

최강국이 돌아와 말을 전한다.

"진짜 죄송하다고 사과드리고 싶답니다."

"사과 안 해도 되고 그냥  차 다시 가져가고 돈 가져오라고 전하세요"

"쟤들은 개털이에요. 밑바닥 직원일 뿐이 권한도, 돈도 없다고요"

"빈털터리라도 일단 어제 나한테서 삥 뜯어간 10만 원은 있을테니 그거라도 가져오라고 하세요"

최강국은 그건 또 무슨 말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최강욱과 모아이 석상에게로 돌아가 주먹으로 두 사람의 가슴팍을 툭툭 친다.

몸을 휘청거리던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오만 원짜리를 하나씩 꺼내서 최강국에게 건넸다.

"아.. 양아치 새끼들.. ."

최강국이 조금 민망하다는 듯이 꾸깃한 10만 원을 탁탁 털어서 복로에게 전했다.

복로는 돈을 대충 쑤셔 넣고 말을 이었다.

"이제 권한 있는 영길 상사 장형구한테 차 다시 가져가고 돈 가져오라고 전해 주세요. 이제 중재자인 최 사장님은 그동안 애써 주셨으니 이제 들어가 쉬시고요. 당사자인 장형구하고 내가 직접 말할 테니까 장형구 전화번호만 알려 주십시오."

최강국은 상황이 그렇게 되면 강한구와 박철수가 죽는다며 자기선에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답했고 복로는 두 사람에게 감방과 환불 중에 하나 고르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복로가 보노라니 저 멀리서 최강국은 담배를 피워대고 둘은 열중 쉬어 자세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따름이다.

잠시 후 최강국이 돌아와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차는 어쩔 수가 없다네요. 쟤들 다 밑에 시다예요.통장에 돈도 없다구요.장형구 그 새끼는 짤 없는 놈이라.. 쟤들 감방 가던 말던 신경도 안 쓴다고.. 나니까 저 새끼들 불쌍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그렇게 두 사람 인생이 신경 쓰이시면 최 사장님이 해결해 주시든가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난 제삼자인데"

제삼자가 대체 뭐가 이렇게 안달이 나서 몇 시간을 땡볕에서 시달리고 있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최강국이 뻔히 다 알면서도 복로가 정한 설정을 따라올 수밖에 없듯이 복로도 최강국의 설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복로는 그 설정에 따라 협상을 시도하기로 맘먹었다.

"그럼 중재자인 사장님이 봉고를 사 가 주시면 되겠네요. 얼마의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최강국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3백만 원에 매입하는 걸로 하고 끝내시죠"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복로는 다시 법대로 하겠노라 호언했다.

최강국이 그럼 법대로 하시라며 언성을 높이고 복로는 그러겠노라고 몸을 돌리고 최강국이 다시 복로를 붙잡고.. 

허위매물 벌금은 통상적으로 3백밖에 안되는데 그렇게 손해를 볼 수 없다며 금액을 내리고 복로는 허위매물 벌금은 최대3천만원이라며  금액을 올리고..

최강국은 까짓거 강한구 박철수 두 인간 말종들 그냥 감방보내버리자고 으름장을 놓고 복로는 알겠다고 돌아서고..

최강국이 다시 그걸 붙잡아 금액을 조금 올리고 복로는 그걸 거절하고 금액을 더 올리고..

최강국은 허위매물 3번 적발되면 사업자가 날아가는데 아직 한번밖에 안 걸렸으니 상관없다고 으름장 놓으며 금액을 버티고..

복로는 그러면 허위매물 적발 당하시라며 몸을 돌리고..

최강국이 다시 그걸 붙잡아 금액을 올리고..

복로가 사업자 날아가는거 아니냐며 금액을 더 올리고,,

최강국이 까짓거 사업자 날아간다고 해도 바지 사장 하나 세워서 새 사업자 내면 그만이라며 금액을 내리고..

복로는 그러라며 몸을 돌리고..다시 최강국이 붙잡고..

두 사람은 그걸 몇 번이나 더 반복했다.

저 멀리 강한구와 모아이석상이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고 삼진이는 우직하게 복로의 옆에 서 있었다.


11시 30분쯤부터 시작한 주안 상사 마당에서의 협상은 어느덧 4시간이 지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최강국의 사나운 눈매에도 피곤이 잔뜩 어려 있었다.

도복로는 더 심했다.

어느덧 33시간째 뜬눈으로 심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강행군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흡사 자신이 시간의 사막  민달팽이라도 된듯했다. 

복로의 마음이 이미 바싹 말라버렸다.

삼진이만 우직하고 믿음직스럽게 묵묵히 서서 말없이 복로의 정신을 부여 잡고 있어줄 따름이었다.

복로는 지쳐서 마지막 협상금액을 이야기했다.

"내가 인생 수업했다 치고 수업료로 3백은 손해를 볼 테니까 800으로 합시다. 나도 더는 안돼요."

최강국이 한 번만 더 이야기해 보겠다고 저쪽으로 가서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과 대화를 하고 마침내 돌아왔다.

최강국이 석양을 마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도 사장님. 내가 5 백주고 차를 사고 저 개털들 통장에 있는 돈 다 긁어모으면 3백이 나와요.

내가 쟤들한테 3백받고 사장님한테 8백 드릴게 됐어요?"

복로는 두말없이 그러자고 대답했다.

문득 보니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 둘은 최강국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복로는 생각을 흘리며 최강국의 포르셰에 올라탔다.

최강국은 오토랜드로 차를 몰았다.

차량 매매 계약서를 다시 쓰고, 강한구와 박철수에 대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합의서에 사인을 한 뒤 최강국으로부터 8백만 원이 입금되었음을 확인한 복로는 삼진과 함께 오토랜드 앞 도로변으로 내려왔다.

시간이 어느덧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35시간이나 잠을 못 잤지만 머리만 멍 할 뿐 잠은 오지 않았다.

삼진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해결했으니 다행이야."

"그건 그래. 인터넷 사례들 보니까 이 정도면 선방한 거 같아."

두 사람 앞으로 택시가 한대 섰다.

복로가 목적지를 얘기하고 등받이에 지친 머리를 기대자  백미러로 뒤를 흘끔거리던 택시기사가 비릿한 웃음을 띄고 묻는다.

"손님 중고차 사기당하셨죠?"

복로와 삼진이 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택시기사가 답한다.

"내가 원래 이쪽에 자주와요. 오토시티, 오토 랜드, 오토월드 이쪽엔 항상 손님이 있다고. 왠 줄 알아요?"

"왜요?"

"손님처럼 사기당하고 차 없어서 택시 사람들이 항상 있거든. 차 사갈 거라고 맨몸으로 왔다가 허위매물인 거 알고 도망가는 사람들, 위약금이랍시고 돈 뜯기고 쫓겨나는 사람들, 심지어 감금당해 있다가 끝까지 버텨서 풀려난 사람도 있고요. 암튼 그쪽에서 태우는 손님들 표정은 다 손님하고 똑같다고. 물어보면 100%야"

택시기사가 혀를 쯧쯧-차면서 말을 잇는다.

"내가 밑에서 일하는 딜러 놈들도 많이 태우는데, 얘들 이야기 들어보면 내가 이거 택시 운전 왜 하나 싶을 때가 많아. 여기서 잔뼈가 굵어서 사업자 낸 놈들이 갈 곳 없는 양아치들 거둬 들여서 2인 1조 3인 1조로 묶어서 호구들 후리면 한 달에 수입이 수억이에요. 다 여기로 오잖아.중고차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복로는 한숨을 길게 내 쉬며 창문 밖을 바라봤다.

때마침 택시의 라디오에서 트롯가수 나훈아의 <공>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복로는 택시기사에게 볼륨을 좀 높여 달라고 부탁하고 노래를 들었다.

그날 그 순간 복로의 마음에 그 노래가 깊이 와닿았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 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띠리 리 띠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 띠리리

띠리 리 띠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 띠리리


복로는 멍하게 노래를 듣다가 큭큭대며 웃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만에 빠져 살았던지를

스스로를 얼마나 몰랐던지를 새삼 깨달았다.

복로는 그동안 스스로 겸손하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꽤나 오만했었음을 처음으로 알아챘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 우여곡절 끝에 한 사업을 나름의 궤도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는 복로에게 칭찬만을 건넸고,

사업을 크게 하는 콧대 높은 사업가들도 복로에게는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추켜 세워주는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아내는  복로를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복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무의식이 얼마나 오만해져 있었는지를, 또 자신의 본질은  얼마나 허술하고 어리석은지를 새삼 깨우쳤다.

복로는 잠시 킥킥대며 웃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난 참 바보야"

삼진이가 조용히 어깨를 두들겨 줬다.

"누구나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


그날 복로는 바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네 시간 정도에 이르는 짧은 취침시간 동안 복로는 무언가 악몽을 꾸었고 잠에서 허겁지겁 깨어나 일어났다.

어두운 주방으로 가서 찬물을 들이켜고 방으로 돌아와 오렌지빛 전구가 든 뽀얀 밀크 글라스의 전등을 켜고 잠든 아내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복로의 시선은 아내의 지친 얼굴과 귀를 덮고 넘어간 머리칼 그리고 그 옆에 색색거리는 귀여운 숨소리를 내며 기저귀를 차고 잠든 어린 아들의 얼굴을 지나  아내의 잠옷에 이르렀다.

참 오래된 잠옷이다. 얼마나 오래 입었는지 낡아서 고무줄이 늘어나 있고 작은 구멍이 한두 군데 나 있다.

난 왜 잠옷한벌 사 주지 않은걸까? 복로는 조용히 자책했다.

그러고 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흔한 명품 하나 가져 본 적이 없는 우리 봉숙이.  

그 낡은 잠옷이 그날따라 참 아프게 복로의 눈에 담겼다.

복로는 잠을 더 청할 수 없었다.

내 아내는 저리도 근검절약하며 살아주지 않았던가.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복로는 수많은 고소장들과 판례, 그리고 법조인들의 블로그를 뒤져가며 고소장을 두장 작성했다.

합의서를 써 준건 영길 상사 강한구와 모아이 석상 둘뿐이다.

복로에겐 아직 두 개의 이름이 더 있었다.

최초의 허위매물을 인터넷에 올린 진영상사 박충식이었다.

그나마 증거라 할만한 자료를 가진 유일한 관계자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소장은 공갈죄 명목으로 공갈을 사주한 영길 상사 장형구를 상대로 썼다.


복로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두 개의 소장을 스테이플러로 누르고는 봉숙이, 뽀뇨와 함께 9시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도록 경찰서로 향했다.

소장력을 발휘 할 확률은 낮았다. 

복로는 이 소장이라는 어설픈 미끼로,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먹이사슬 최상위에 위치해 있을 최강국을 어떻게 자극하고 아 올릴고민하며 차를 몰았다.

경찰서 주차장에서 최강국에게 전화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잠을 못 잔 것은 비단 복로만이 아니었나 보다.

신호를 받고 멈춰 선 복로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두 개 도착했다.

최강국이다.

<사장님 어제 일도 있고 해서 2011년식 포터 7만짜리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가격은 1,100만 원입니다만 사장님께는 특별히 1천만 원에 모시겠습니다. 연식도 짧고 키로수도 짧습니다.이런 매물 없습니다. 연락 한번 주세요>

도대체 복로를 얼마나 바보 같고 만만하게 본 걸까.

아니면 잃어버린 큰 수익을 만회하기 위해 더 촘촘한 그물을 엮어서 먹잇감에게 던지는 걸까?그게 무엇이든 대단한 놈이다.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복로는 지체하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고 자신이 가진 구멍이 투성이의 성근 그물을 최강국을 향해 던졌다.

"최 사장님 매물 사진이랑 스펙 봤는데 제가 이거 구매하고 싶어요"

최강국이 흐흐 웃으며 화답한다.

"진짜 괜찮은 매물이에요. 연식도 4년밖에 안 됐고 화물차 키로수 그렇게 짧은 잘 없다고요"

복로가 길어질듯한 최강국의 말을 잘랐다.

"저 근데요. 제가 돈이 한 3백 모자라요. 그래서 지금 돈 마련하러 가는 길인데 그 매물 좀 잡아주세요"

"하하.. 네 뭐 연락 주십시오"

"최 사장님.그거 다른 사람한테 팔면 안 돼요. 내가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일 괘씸한 놈이 둘 있더라고요. 허위매물 올린 진영상사 박충식이하고 피도 눈물도 없다는 모지리 두 놈 사장 장형구가 있지 않겠어요. 결국 내가 합의서 써 준 두 놈은 애초에 죄가 없더라고.. 다 뒤에서 사주한 장형구가 주범이지. 걔들 고소하러 지금 북청 경찰서에 왔어요. 합의금 받고 돈 마련해서 내가 최 사장님한테 그 차 꼭 살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 팔면 안 돼요."

최강국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로 외친다.

"아니 어제 합의서에 싸인해 놓고 뭔 개소리예요!!?"

"합의서 다시 한번 잘 봐요. 내가 고소취하 합의 해준건 영길 상사 강한구하고 박철수 둘 뿐인데?"

복로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꺼 버렸다.

한 10분 정도 꺼 놨다가 다시 켜니 십 수통의 부재중 전화 목록과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다.

"박충식도 장형구도 다 나하고 얽혀 있는 놈들이라구요. 그런 식으로 하시면 곤란해요.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전화 주세요"

복로가 어느 시점에서 전화를 걸지 고민을 하는데 최강국이 다시 전화가 온다.

복로는 신호를 한참 기다린 뒤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왜요?"

최강국이 분노에 가득찬 거친 음성으로 외친다!

"어디예요 지금?내가 지금 당장 튀어갈려니까!어딨냐고!"

"북청 경찰서 주차장인데요? 북청 경찰서는 껄끄러워서 못 오신다며? 그냥 담에 만납시다."

최강국은 다급히 대꾸한다.

"안 껄끄러워. 안 껄끄럽다고요.15분 뒤에 거기 주차장서 봅시다"

잠시 후 인상이 완전히 구겨진 최강국이 도착했다.

그는 무슨 지은 죄가 그리도 많았는지 복로를 경찰서 맞은편 카페로 데려 가려고 애를 썼고 복로는 버텼다.

경찰서 주차장도 껄끄러워 하는 최강국과 지겨운 밀당 끝에 복로경찰서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둘은 그곳에서 다시 협상을 시작했다.

중재자, 제삼자 좋아하네.

최강국과 복로의 협상은 이번에는 세 시간이 걸렸다.

복로는 잔금 3백만 원을 박충식과 장형구에 대한 합의금으로 요구했다.

최강국은 중재자 역할을 연기하다가 가끔은 평정심을 무너뜨리고 분노의 외침을 내지르고 옆에 있는 전봇대를 주먹으로 치고 피가 흐르는 손을 손수건으로 감싸고 줄 담배를 피워대고 가슴을 탕탕치며 허공에다가 왁 씨발!소리치고 길에 놓인 물통을 향해 발차기를 날리고, 복로는 고소장이 든 두툼한 봉투를 들고 경찰서 입구와 최강국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마침내.최강국이 마지막 협상금액을 불렀다.

"3백은 절대 안 되고.. 270 합시다. 어제는 3백만 원 인생 수업료로 낸다며? 최소한 30만 원 정도는 인생 수업료로 지불해도 괜찮잖아!? 이것도 합의 안 하면 콱 그냥 씨발 고소해 보라고! 누가 이기는지 한번 보게"

복로는 최강국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헤아리며 잠시 고민했다.

30만 원이면 이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가진 증거에 비하면 최대한의 피해를 복구했다고 자위한 복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지금 입금하세요"

최강국은 핸드폰을 꺼내 입금을 마친 뒤, 허탈한 웃음을 픽- 흘렸다.

"담배나 한 대 핍시다~"

한결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최강국이 복로에게 담배를 건넸다.


최강국은 허탈한 음성으로 피식 웃으며 복로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중고차 짬밥 15년인데 아저씨 같은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어. 솔직히 말해 줄게요. 다시는 중고차 매장 특히 이쪽 동네는 기웃거리면 마세요. 뭐 이번 일 겪었으니 잘 아시겠지~여긴 다 이렇다구."

복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심증을 확인하기 위해 캐 묻지는 않았다.

최강국이 복로가 정한 설정을 침범하지 않았듯 복로도 최강국이 설정한 중재자의 설정을 침범하지 않았다.

"또 합의서 쓰셔야죠?"

복로가 펜을 꺼내자 최강국이 힘없이 손사래를 치며 몸을 돌렸다.

"됐어요. 됐어..그냥 여기서 찢어 집시다"


도복로의 길고 길었던 50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13시간은 덜미를 잡힌채 끌려 다니고 37시간은 실수를 복구하기 위해 쉼없이 달렸다.

37시간동안, 시간당 30만원의 손해를 복구한 셈이니 결과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반면 13시간동안 시간당 85만원을 손실봤으니..역시 잃는건 쉽고 얻는건 참 어렵다.

아무려면 어떠랴..이젠 정말 인생 수업을 한셈 치자.

복로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근 카페에서 기다리던 봉숙과 아들에게 돌아갔다.

비로소 마음이 가벼웠다.

복로는 그날 무척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화창한 가을 날씨의 거리를 가족과 함께 거닐었다.

석양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청 경찰서 중고차 사기 전담반 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청 경찰서 김형삽니다. 거 중고차 사기당하신 거 그거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제가 알아서 해결했어요"

"엥? 뭘 어떻게 알아서 해결을 해요?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그 차 다시 걔들이 사 갔고 나는 다 돌려받았어요"

"아니!대체 어떻게요?"

형사는 놀란 눈치였다.

"알아서요"

형사는 아주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복로에게 화를 냈다.

"아니!복로씨! 그 망할 놈의 차를 그놈들한테 다시 넘기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 새끼들 그 차로 다시 다른 선량한 사람 등쳐먹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텐데 그렇게 맘대로 처리하시면 어떻게 해요?"

복로는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 그래서 분노를 담아 쏘아 붙였다.

"아저씨! 실제로 범죄 피해를 당해서 찾아간 피해자에겐 방법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작 알아서 해결하니 아직 생기지도 않은 범죄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피해자를 걱정하며, 실존하는 피해자를 탓하는건 무슨 경우입니까?  때문에 다른 선량한 피해자가 생기면 어쩌냐고 하셨어요?

그럼 나는 악랄한 피해자여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습니까?방법 없댔잖아요. 그래서 스스로 해결했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그럼 내가 내 피 같은 돈 들여서 범죄 가능성을 예방하라는건가요? 

렇다면 저한테 그런 말씀 마시고요. 

오늘 당장 형사님이 가서 그 가격으로 그 차를 사세요.

아니 몇대 더 사세요.

형사님 돈으로 다른 피해자 생기는걸 방지하시라구요!"

형사는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했고, 복로는 전화를 냅다 끊어 버렸다.


석양을 받아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들이 몸과 마음에 쌓인 피곤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복로는 아들을 꼬옥 안았다.

피로가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철거와 시공 따위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그저 쉬고 싶었다

집으로 가 소중한 아기를 안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 이 피곤이 조금은 덜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 시후면 복로는 젖은 머리칼 사이로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식탁에 앉아 봉숙이와 함께 따뜻한 밥을 지어먹고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지친 몸을 누일 것이다.

내일은 새 핸드폰과 봉숙이의 잠옷을 한벌 살 작정이다.


*본문에 기재된 사람의 이름, 지명, 관공서 또는 업체의 명칭은 모두 가상의 명칭입니다.  


몇달이 지나서 복로는 아래와 같은 책 소개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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