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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Apr 24. 2022

생일 기피증 환자

존재함이 기쁜가요?

냉장고 바닥에 떨어진 달력을 주워서 봤더니 아버지의 생일이 지나갔다.

맙소사! 벌써 1주일이 흘렀다.

그는 서둘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복로도 전화를 더 시도하지 않았다.

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생일을 잊어서 미안하단  장문의 메시지를 한통 발신했다.

메시지를 발신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복로는 갑자기 전화기를 꺼 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답신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도복로도 회신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갑자기 이 검은 화면의 기계어딘가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이 몹시 불편하느껴졌.

마음 한 구석이 까끌거렸다.



언젠가부터 도복로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부모와 연결선을 모른 척- 몸을 흔들어서 떨궈버렸다.

시간이 흐르며 삭았기 때문인지 다행히도  연결선은 힘없이 땅에 떨어졌고 수많은 계절이 지나도록 땅에서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복로는 처음 몇 해동안 못 본 척하며 그 연결선을 곁눈으로 가끔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가끔..  시간이 더 지나서는 아예 곁눈으로도 바라보지 않게 되었.

물론 복로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삶의 2/3은 그 연결선붙잡고 있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복로는 깨달았다.

그동안  연결선은 자신을 일방적으로 상처 주고  있었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복로에게 전해진 그 연결선은 칼보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것이었다.

복로의 거두껍고 무뎌진 손으로도 그 선을 잡고 있으면 아프고 상처가 나 피가 나기 일쑤였다.

오래 잡고 있으면 저릿저릿한 냉기마저 전해져 와  마치 얼어 부서질 것만 같았.

부모와의 연결이 관계의 바닥에 나뒹굴고 있음이 복로의 마음을 편하게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복로도 일 년에 다섯 번쯤은 장갑을 끼고 그 연결선을 주워 들어 접속을 시도한다.

양친의 생일과 명절 두 번과 어버이날이다.

지지직거리는 낮은 파열음만 단속적으로 일어나는 그 가냘픈 접속을 통해 복로는 의례적인 말을 기계적으로 늘어놓고 부모도 그것을 그저 무감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사실 복로는 부모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물론 복로의 부모도 찬가지다.

다른 점은 오직 하나. 자식이 자신을 공경하는 시늉을 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제한적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다.




복로의 부모는 생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자신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자식이 '인간의 도리'를 하는 의식을 치르는 날이다.

모든 의식이 그러하듯, 이 의식에도 따라야 할 순서와 법도가 있다.

반드시. 전날 혹은 당일 아침 중에 축하를 전해야 한다.

조금 늦은 오전이나 점심이 지나서 의식을 치르면  부모는 차가운 냉대로 얼음의 비를 내리고, 이내 낮게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비를 끼얹고, 때론 뜨거운 용암을 토해내 복로의 인격을 모독했다.


언젠가 복로는 어디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받아 본 적이 없으면 줄 수도 없어."

복로는 받아 본 적이 없다.

부모는 자식인 복로는 물론이고 며느리인 봉숙이 손자인 너구리와 도토리생일도 축하해 준 적이 없다.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같이 어린이들에게 중요한 날 역시 마찬가지다.

손자들을 보고 싶어 한 적도 한번 없고 핸드폰에 손자들이나 자식의 사진 한 장 없음은 물론이다.

복로의 첫째인 너구리가 태어났을 때도

복로의 부모는 여행길의 행선지가 겹친 김에 들러 1분 정도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니하고 닮았네"

한마디를 차갑게 던지고 몸을 돌려 즉시 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덕분에 복로의 자식들은 자신의 조부모가 누구인지 그 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틀림없이 복로의 부모에게 생일과 기념일이란 자식이 한낱 부모의 종속물임을 확인하는 날이자.

최소한의 '효'를 상납는 날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신들의 생일과 어버이날과 명절을  '인간의 도리를 다 하는 날'로 정의하고 그날 자신이 받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받지 못하면 모멸감에 몸을 떨며, 가시가 돋은 연결선을 휘둘러 자식을 향해 채찍질을 해 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복로에게 일 년의 다섯 번의 기념일은 그저 그 채찍을 회피하기 위한 날이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말과 선물의 실제 의미는

"내게 모멸감을 주지 마세요"


그 세월이 켜켜이 쌓이면서 도복로는 생일을.. 

아니, 기념일이란 것 자체를 기피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복로는 기념일은 물론이고 생일도 챙겨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생일을 누군가와 모여 축하를 해 본 적이나  기쁨을 느낀 적도 없었고, 

물론 타인의 생일을 기쁘게 축하해 본 적도 없었다.

아마도 복로의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기념일이란 날을 회피하도록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메시지가 전송되고 어두워진 핸드폰을 옆으로 밀어 놓고 복로는 생각에 잠겼다.

대체 부모가 강조하는 '인간의 도리' 즉, <효>란 무엇일까?

<효>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식의 부모를 '받들어 섬긴다'는 것이다.

굉장히 일방적인 관념이다.

복로는 최근에 몇 개의 글을 읽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해 각자의 견해를 밝힌 글들이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글들을 읽고 질문을  생각하며 복로는 자신이 사랑의 필수적인 요소 한 가지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일방이 아닌 양방향으로 오가며 교감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복로에게 '''사랑'과 연관성이 없다.

사랑에서 파생된 것도 아니고 사랑의 표현방법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효도란 강자가 약자에게 사랑을 주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고도, 약자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공물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효(孝)란 노인( )이 자식( )위에 서서 종속시킨 형태의 회의자다.

혹은 나이에 따른 경험이 생존을 관장하던 농경시대 혹은 원시적인 계급사회의 유물이다.


한편 또 생각했다. 축하의 의미를.

축하의 사전 의미는 타인의 좋은 일을 기쁘고 즐거워한다는 뜻. 혹은 그 뜻을 담은 인사다.

맞다. 축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용법으로 쓸 테다.


하지만 농경시대의 유물인 한자를 파자(破字) 해 보면 그 의미와는 다른 뜻이 나온다.

회의자(會意字)로 구성된 祝賀(축하)를 파자하면,

'빈다'는 뜻의 祝(축)은 示, 口, 儿으로 이뤄져 있는데,

신을 모시는 제단(示) 앞에서 입(口)으로 비는 사람(儿)모습을 나타낸 회의자인데,

입이 사람의 위쪽에 위치한 것은 고개를 들어 제단을 우러르는 자세를 뜻한다.

또, 하례한다는 뜻의 賀를 파자하면,

재물을 뜻하는 조개 (貝) 더함(加)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에게 재물을 선물하는 것인데 재물(貝)이 아래쪽에 위치해 있고 더함()이 위에 위치한 것은 재물의 전달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향함을 의미한다.

즉, 한자 자체를 해석하면 축하란,

타인을 위해서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보다 높은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치는 일방의 예법이다.

그야말로 효도의 방법으로써 적절한 인사치레다.

복로가 일상적인 언어임을 알면서도 축하한다는 말을 기피해온 건 그런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창 시절 어버이날 그 말을 접하면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가 존재함이 무에 그리 기껍기에

낳아준 것을 고마워 해야하는 것인?

그는 의문스러웠다.

모든 인간은 자식을 이기심에 의해 낳지 않는!

자기 의지로 태어난 자식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의식 없이 그저 낳은 것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

번식의 최종 목적은 ''DNA존속시키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도복로의 부모 역시 어쩌면 그저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전승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복로에게 그래 왔던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전해받지 못하고  가시가 돋친 일방의 연결선에   자신은 상처받으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무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바쳐야 했던 효도의 의무를 다시 자신의 자식에게 강요하고, 거기서 자신의 상처를 보상받기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도복로는 자식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누군가의 생일이,

자신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복로는 알게 되었다.

또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존재함이 감사하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이 즐겁고,

그 날을 생각하면 설레이고 행복하여,

그 마음을 담아 아이들을 기쁘게 해 주면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또한 기뻤다.


타인의 생일을 기쁘고 즐거워하려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상대의 존재함이,

자신에기껍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야

비로소 타인의 생일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


복로는 부모로부터 자신에게 전승된 그  냉혹하고 가시 돋친 연결선을 자신의 에서 끊어 버렸다.

아래로 내밀어 맞잡은 작은 손에겐,

따스한 마음으로 자아낸 

따뜻한 연결선을 쥐어줄 작정이다.

그가 어디에 있건,

또 그의 아이들이 어디에 있건

마음에 한기가 들 때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온기를.

그 연결선을 통해 언제까지나 느낄 수 있도록.

그 한가닥 한가닥이 모이고 모여

거친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이 되고

때때로 힘들 때면 거기 기대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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