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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Oct 10. 2020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하퍼 리 저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2015.




1. 옳음과 바름의 차이

우린 흔히들 "인성이 바르다"라는 표현을 써 예의가 바르거나 됨됨이가 좋은 사람들을 칭찬하곤 한다. 우리들 대부분에 있어서 바르다는 것은 곧 옳다는 것을 뜻하며,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제시해주는 가치 명제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건대 바르다와 옳다는 다른 개념이다. 전자가 규범에 합치하는 삶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개인의 가치관이나 이치에 따른 삶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옮음과 바람의 차이는 필연적이다. 보통은 "옳은" 삶은 곧 "바른" 삶이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던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격언에는 개인과 사회 간의 차이가 있을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 개인의 가치관이 사회적 타당성과 상충하는 경우도 생긴다. 마치 고등학교 수학 시간의 삼각함수 그래프처럼, 옳음과 바름의 곡선은 서로 마주치기도, 떨어지기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충점은 경우에 따라 파도와 같이 개인을 덮치기도 한다. 사회적 타당성이 스스로의 가치관과 너무나도 배치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한 경우 개인은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납득 가능한 정도로 수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우, 개인은 사회라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저항한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파도에 몸을 맡겨 쓸려가기보다는 차라리 부러지겠다고.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한 고통의 과정에서 파도조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투쟁이야말로 한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옳음과 바름이라는 두 선은 서로 수많은 변곡점들을 겪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빚어나간다.


2. 앵무새 죽이기

미국의 하퍼 리 저 [앵무새 죽이기]는 바로 이러한 "옳음"과 "바름"간의 차이를 다룬 소설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20세기 초의 미국은 인종주의에 기반한 편견과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유색인종과 백인간에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믿음으로서 인종차별은 당연한 결과이자 "바른" 결과였다. 백인과 흑인이 함께한다는 것이나 서로가 평등하다는 개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소위 "짐 크로우 법"에 의하여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제도적으로 공인된 불평등이었다. 이에 의해 흑인들은 열등한 환경에서, 열등한 학교를 다니고, 열등한 직업에 종사했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모든 면에서 백인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일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소설의 주인공인 카웃 핀치의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억울하게 기소된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게 된다. 별다른 증거도 없이 단지 "피해자"의 증언만으로 강간으로 기소된 피고인을 변호하는 그는, 비단 검사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의 제도화된 차별 그 자체와도 싸워야 했다. 검사의 비 상식적인 기소와 더불어 그는 그가 평소 사랑하던 이웃과 가족들로부터 어떻게 "흑인 깜둥이"를 변호할 수 있냐며 멸시받기까지 한다. 훌륭한 변호사로서 일평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은, 단지 그가 믿는 법의 정신-실체적 진실해 반해서는 그 누구도 억울하게 처벌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 위해 무고한 한 흑인을 변호했다는 사실에 밀려 더럽고 추잡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 것이다.

 

3. 나 자신의 정의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로스쿨에서 법학도로서 변호사를 목표로 공부해왔던 내게 저자 하퍼 리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네가 믿는 정의가 철저히 유린되고 있을 때, 너는 과연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무고한 희생자를 위해 자신을 던져가며 싸울 수 있냐고 말이다. 변호사로서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포기하고, 편견의 영향에 결국 패소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건을 단지 자신의 소신에 반한다는 이유로 수임 것인가? 이에 관해서 하퍼 리는 말한다. 자신이 어려운 과정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떠한 일에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말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했다]. 시작도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다." p.213





우리는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독립투사들을 존경하며,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국가의 독립과 애국을 위해 헌신하라고 교육받았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과 같이 자신을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던져가며 자신보다 원대한 목적을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질문에는 선뜻 그렇다고 답을 하지 못하겠다. 인인 나는 오늘도 안중근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격언을 마음에 세긴다. 하지만 막상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만 할 때, 내가 과연 위인들과 같이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소설의 말미, 억울하게 기소된 피고인 톰 로빈슨은 결국 주인공의 아버지의 혼신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이 선고된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억울한 판결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하는 와중 총살되고 만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부정의에 저항한들 무엇이 달라지는가?라고. 소설의 주인공도 결국 사형을 언도받고 탈출시도중 무참히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에 저자 하퍼 리는 대답한다. 수많은 저항 하나하나가 모여 큰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이다. 소설의 배경은 대공황이 미국을 강타한 1930년대 중엽이다. 소설로부터 불과 약 30년 후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 반-인종차별 운동은 바로 소설 속 주인공들과 같은 무수한 신념들이 모여 모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4. 마치며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로자 팍스는 "옳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의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그러했듯, 우리 역사의 유관순과 안중근 열사들이 그러했듯,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들이 그러했듯, 우리는 우리의 정의를 위해 진득이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인생은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 온전하게 자기의 것으로 살아냄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류에 순응하여 흘려보내는 인생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하고 이를 위해 싸울 때만이  우리 삶의 가치가 증명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앵무새 죽이기]가 설파하는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이 글은 국방부 제공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양질의 도서를 장병들에게 제공하는 국방부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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