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크리스마스에 대한 내 첫 번째 추억 이야기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내 머릿속 깊숙이 저장된 하나의 기억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유교적인 가풍에, 기독교라면 질색을 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그 어떤 것과도 무관한 공간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들릴 때면 아버지는 늘 시큰둥한 표정으로 “거, 예수는 서양 신인데 크리스마스인가 뭔가 뭐가 대수라고 난리야.”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데 바로 내 기억 속 그해의 겨울, 어머니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우리도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셨다. 아마도 친구 집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나 TV 드라마 속에서 가족들이 오붓하게 연말을 보내는 장면이 꽤 근사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를 하셨지만, 어머니의 ‘행복한 가족의 크리스마스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 욕심 앞에서 아버지의 잔소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힘을 잃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어머니는 동네 빵집에서 가장 큰 케이크를 사 오셨다.
흰 버터크림으로 매끈하게 덮인 케이크 위에는 설탕으로 만든 분홍빛 장미와 연두색 잎사귀, 산타클로스 장식이 올려져 있었고, 초콜릿으로 ‘Merry X-mas’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저녁 식탁에 예쁜 테이블보를 깔고, 정성껏 마련한 음식들을 차려 놓으셨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 보시던 아버지도 결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셨다.
단 한 사람, 오전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다던 큰오빠만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식구들이 모두 식탁에 둘러앉자, 어머니는 마치 비장한 선언을 하듯 말씀하셨다.
"우리도 올해부터는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식구들이 모여서 케이크에 초도 켜고, 소원도 빌 거야.
너희가 올 한 해 착한 일 많이 했으면 산타클로스 선물도 받을 거고.”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말에 언니와 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착한 아이들답게 어머니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 완벽한 식사의 방점을 찍을 촛불 의식을 시작해야 할 시간에, 이 집의 장남인 큰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케이크 위의 초를 켜자고 하셨고, 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듯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기다려.”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뜨셨다.
그 순간, 어머니가 야심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의식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니, 기욱이가 아직 안 왔는데… 이 케이크는 어쩌지….”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놓지 못한 채 초가 꽂힌 케이크를 식탁 옆으로 밀어 두셨다.
몇 시간 전부터 저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들떠 있던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엄마, 그럼 케이크는 언제 먹어?”
어머니는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잠자리에 든 뒤에도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몇 시쯤이었을까. 창밖에서 새벽송을 부르는 교회 신도들의 캐롤이 아련히 들려왔고, 나는 결국 밀려오는 잠과의 사투에서 지고 말았다.
아침이 밝자마자 식탁으로 달려 나갔지만 케이크는 없었다.
“엄마, 케이크 어디 갔어?”
어머니는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식탁 앞에 태연히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오빠를 노려보셨다.
“네 오빠한테 물어보렴.”
오빠는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표정으로, 밤늦게 돌아와 케이크를 먹었는데 술에 취해 초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전날 밤 케이크를 먹겠다고 잠까지 참았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서럽게 운 뒤,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을지 모를 크리스마스 의식인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떠올리며 물었다.
“엄마, 어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안 왔어?”
어머니는 누가 봐도 동네 문구점에서 포장한 게 분명한 선물을 내밀었다.
모처럼 마련했던 크리스마스 의식이 무참히 망쳐진 뒤라서였을까.
어머니의 목소리는 몹시 담담했다.
“단단아, 네 애미가 산타클로스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오빠가 망쳐버린 그 크리스마스 전날의 풍경과, 어머니의 이 솔직한 고백은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족이 함께한 촛불 의식도, 산타클로스의 환상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어떠한가.
어머니의 투박한 선물과 그 안에 담긴 마음, 캐롤이 흐르던 그 따뜻한 밤을 떠올리며 피식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크리스마스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