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과 다정함이 지닌 놀라운 힘에 관한 이야기
여행이 끝나면 풍경은 서서히 휘발되지만, 사람의 온도는 갈수록 또렷해질 때가 있다. 이번 타이완 여행이 그랬다. 타이베이 야시장의 활기참이나 맛있는 음식의 풍미보다 내 마음에 더 깊고 선명하게 박힌 건, 가이드를 자처한 친구 H의 ‘놀라운 친절과 다정함’이었다.
올해 초, 타이베이에 거주 중인 H의 제안으로 대학 동기 열네 명이 대만으로 향했다. 공항 입국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마중 나온 H가 보였다. 그녀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의 짐을 보이는 대로 양손 가득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미리 대절해 둔 버스로 우리를 씩씩하게 안내했다.
여행이 시작되기 한참 전, 이미 3박 4일의 동선과 호텔, 버스 렌트, 그리고 예약이 필요한 모든 곳의 리스트가 그녀의 손끝에서 완성되어 있었다. 여행 시작 한 시간 만에, 자칭 MBTI 전문가인 나는 그녀가 분명 'FJ'로 끝나는 성향일 거라 확신했다. 동선 하나하나에 타인의 편안함을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왕머리 바위로 유명한 예류 지질공원에 들렀을 때, 친구들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천 년의 풍화작용이 빚어낸 이집트 여왕의 옆모습 앞에서 친구들은 돌아가며 포즈를 취했다. H는 마치 전담 사진사처럼 친구 하나하나를 가장 근사한 프레임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냐, 거기 서야 더 예뻐. 조금만 왼쪽으로!”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는 그녀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이제 이만하면 됐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H는 기어이 최선의 각도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여행 내내 그녀의 눈은 멋진 풍광이 아닌, 카메라 너머에 비친 친구들의 표정과 조금씩 느려지는 발걸음에 머물렀다. “대만은 옥이 유명하다던데…”, “많이 걸었더니 다리가 좀 뭉치네.” 누군가 허공에 툭 던진 사소한 혼잣말조차 그녀는 흘려 듣는 법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우리는 어느새 보석상 앞에, 혹은 마사지 샵의 베드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열네 명이라는 제각각의 우주가 부딪히지 않게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는 쉴 틈이 없었다. 그녀의 배려는 먼 곳에서 온 친구들을 챙기려는 선의를 넘어 ‘헌신’에 가까웠다. 친구들을 이끄느라 바삐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근 읽기 시작한 윌 구이다라의 저서 ‘놀라운 환대(Unreasonable Hospitality)’라는 책이 떠올랐다.
책이 이야기하는 ‘놀라운 환대’란 상대가 미처 기대도 못한 순간에 건네지는 친절, 심지어 스스로도 몰랐던 결핍을 채워주는 배려의 마음이라고 했다. 사실 읽을 때는 그 말이 관념적으로만 다가왔다. 그런데 타이완에서의 H는 그 문장을 살아있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바로 놀라운 환대야.”라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이전에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깊은 호감을 느꼈다. 마음의 빗장이 활짝 열려 그녀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친구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시간이 흐르며 대만 여행의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친구들의 짐을 양손에 들고 대만의 따뜻한 햇살 속을 걸어가던 H의 뒷모습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히 남는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따스한 햇살을 어깨에 담은 그녀의 뒷모습이 나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놀라운 환대를 베푼 적이 있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