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20대들에게 쓰는 편지
얼마 전 신촌에 갔어.
내가 이십 대였던 90년대, 그 거리는 내 하루의 대부분이 머물던 곳이었지.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조금은 변한 듯한 그 거리를 보니 나의 이십 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어.
너는 종종 말하지. 90년대는 낭만의 시대였을 거라고.
아날로그 감성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온기가 오가고, 진한 사랑도 가능했던 그런 시절이었을 거라고 말이야.
취업도 잘 되고, 경쟁도 덜했으니 친구 간의 우정도 요즘보다 훨씬 깊었을 거라고.
맞아. 그땐 그랬지. 요즘보다 사랑도, 우정도 더 진하고 따뜻했던 시대였던 것 같아.
하지만 그 시절엔, 관계가 가까웠던 만큼 서로의 삶에 너무 깊이 관여하기도 했어.
‘프라이버시’라는 말이 없던 때였지.
엄마 친구에게 남자친구의 ‘호구조사’를 당하기도 했고, 옷차림 하나에도 참견이 끊이질 않았어.
너는 아날로그 감성이 좋다고 하지만 휴대폰 없는 세상, 상상할 수 있겠니?
눈이 내리던 날, 친구를 기다리다 서로 다른 장소에 서 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던 적도 있어. 짧은 치마 밑으로 다리가 얼어붙는 줄 알았지.
손을 호호 불며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던 그 마음, 너는 알까?
너에게는 지하철에서 한 줄로 서 있는 시민들의 질서 정연한 모습이 익숙하겠지만,
90년대 지하철은… 음, 말 그대로 ‘야생’이었어.
막 자리가 나서 앉으려 하면 어디선가 날아드는 가방 하나, 그리고 순식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아주머니의 민첩함이라니… 저런 분이 왜 올림픽 육상선수로 나가지 않았을까 안쓰럽기도 했지.
요즘은 도로와 상점마다 CCTV가 깔려 있고, 탁자 위에 지갑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안전한 나라라고 하지. 하지만 그땐 달랐어.
과외비를 소매치기당하거나 잠깐 올려둔 지갑이 사라지는 일도 흔했지.
최근엔 80·90년대 시민 인터뷰를 복원한 영상이 유행이더라.
그 밑엔 너희 세대가 남긴 이런 댓글들이 달려 있었어.
“이때는 사람들이 교양 있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네요.”
하지만 말이야, 어릴 때부터 토론과 발표 교육을 받은 너희 세대가 훨씬 말을 잘해.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아니?
나도 90년대엔 70년대의 이십 대들이 참 부러웠어.
그들의 취업장벽은 종이보다 얇을 것만 같았고 대학 졸업장만 있어도 어디서든 ‘엘리트’ 대접을 받았으니까.
내가 70년대를 부러워했듯, 너희가 90년대를 그리워하는 건 아마 지금의 팍팍한 현실을 잠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 거야.
그 시절엔 모든 게 더 따뜻했을 것 같은 ‘유토피아의 환상’을 품으며 말이지.
하지만 몇 년 후, 너도 돌아보게 될 거야. “그때가 참 행복했구나.” 하고.
그러니까, 이 시간을 즐기렴.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너에게는 그리움의 한 장면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