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깊고 깊은 산골짜기 작은 오두막 한 채, 키가 작고 아담한 오두막의 작은 문이 열리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난쟁이 7명이 우르르 나올 것 같다. 7명의 난쟁이들과 두런두런, 재잘재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있으면 저 멀리 순백의 고운 피부를 갖은 백설 공주가 사과와 버섯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올 것 만 같다. 높게 선 나무들 사이 멀리 보이던 해는 이미 언덕 아래로 드러누웠고 주변 공기도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발견한 동화 속 오두막처럼 예쁜 알베르게에서 벌컥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난쟁이도 백설 공주도 아닌 인상 찌푸린 알베르게 봉사자였다. 희뿌연 우리의 고운 상상을 깨부순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휴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1시간이나 더 늦게 왔네. 내가 중간에 너희를 보지 못했다면 난 기다리지 않았을 거야. 인당 5유로고 잔돈은 없어.”
다소 퉁명스럽고 귀찮아하며 돈을 챙기고 다급하게 숙소 안내를 한다.
“샤워실은 여기, 침대는 아무거나 쓰세요. 열쇠는 따로 없으니 출발 전에 문만 꼭 닫고 가시면 됩니다. ”
“요즘은 하루에 몇몇이나 오나요?”
“그제는 한 명도 없었고 어제는 한 명, 오늘은 당신들 뿐이에요.”
마을과 한참 동 떨어져 있는 숲 속의 작은 알베르게, 다시 그녀와 단둘이 이곳에 남았다.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시설이 모두 깨끗했으며 개인 별장처럼 아늑해 며칠 푹 쉬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샤워나 빨래를 기다릴 필요 없이 여유롭게 씻고 먹고 있으니 별도 달도 찬찬히 빛을 떨군다. 숲이라는 커다란 무대 위로 아스라이 떨어지는 밤 별들이 우리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떠받들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길지 않았던 시간을 살아오면서 대부분 나는 단역이었고 한 번도 불만이나 의문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면, 다수의 단역과 조연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문득, 이 시간에서는 돌연 주역이고 싶어 졌다.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내어주고 단역이 되어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지난 내 시간들이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행복을 깊숙이 느껴본 일도 없었다. 낯설고 어색하지만 썩 기분 좋은 감정이었다.
“지난번에 네가 보여 준 은하수 찾아볼래.”
“나무가 많고 높아서 안 보일걸.”
“그래도 잠깐 보고 올게.”
높은 나무에 가려진 하늘에서 은하수를 찾지 못한 그녀는 문턱에 쪼그려 앉았다. 졸졸졸. 낮에는 들리지 않던 물소리가 살금살금 들려온다. 나무 사이로 슬쩍 달빛이 내리고 그 사이에 풀벌레 소리가 은근히 울려 퍼졌다. 처음 걸었을 때 느꼈던 근육통은 온데간데없고 낭만적인 암연만 남았다. 치열하게 걸어온 하루처럼 지금까지 꾸역꾸역 살아온 시간들까지도 깊은 어둠 속에서 위로받고 있었다.
“음.. 밤 냄새 좋다.”
어딜 가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는 그 모습이 처음 봤을 때는 이상했다. 남들은 가끔씩 하는 딸꾹질을 이삼일에 한 번씩 하는 것처럼 이제 그녀 자체로 익숙해졌다. 바다를 끼고 걷는 동안에는 파도 냄새, 석양을 볼 때는 해가 지는 냄새, 낙엽 위를 걸을 때면 사부작사부작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보다 건조한 낙엽 냄새를 더 좋아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밤이 가진 향기는 안개가 풍기는 향기와 비슷하다고 했다. 밤과 안개의 색은 흑백으로 확연하게 대비되지만 그 향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듣고 있으면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안개는 하얗게 어둠은 까맣게,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같은 답답한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그 속엔 설레는 향기도 느껴진다. 오늘 이 밤이 흩어지면 내일은 어떤 아침의 색일지, 뿌연 안개를 지나면 파란 하늘 일지 분홍색 꽃길이 있을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런 향기가 있었다.
“너는 누군가를 끔찍하게 사랑해 본 적 있어? 가령,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이라든지.”
“바보 같아. 내 목숨을 바쳐 사랑할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내가 목숨을 바치도록 보고만 있을 리 없잖아.”
언젠가 어떤 시집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앞으로의 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관점이 달랐다.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대할 것도 없고 어떤 일이든 굳이 부정적일 이유가 없었다. 그런 나에 비해 그녀는 삶이란 때때로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그늘이 주변을 덮곤 한다고 했다. 환경적인 문제들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힘겨움을 안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두렵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어. 엄마는 그런 나를 항상 꾸짖으셨지. 그런데 말이야. 빨간 머리 앤 셜리에서 보면, 마릴라 아주머니의 꾸지람에도 앤은 늘 상상하잖아. 나도 그랬어. 자주 상상을 하며 가정하곤 했지만, 현실은 대체로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은 오기로 더 힘을 냈던 거 같은데, 나에게는 그런 악바리 근성이 없나 봐. 어느 순간부터 설레는 마음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커졌어. 후회도 많이 하고.”
“만약,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너는 다른 선택을 할까?”
“기억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당연히 다른 선택을 하겠지.”
“기억이 없다면? 같은 선택을 하게 될걸. 언젠가부터 나는 '과거 돌아갈 수 있다면'이란 전제로 상상하는 일을 그만두었어. 무의미한 상상이거든. 어떤 과거로 돌아가도 난 같은 선택을 할 거 같아. 그 선택을 한 그때나 지금 그리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나도 결국 다 같은 사람이니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떤 것을 가지거나, 이루는 것을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가져야 행복할까? 얼마나 이루어야 행복할까? 아픔에도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것처럼 행복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이미 지나온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고 별거 아닌 입시 시험이 고3 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난임 때문에 괴로운 어떤 여자는 아니 넷을 돌보느라 우울증에 걸릴 듯 힘들게 사는 다른 여자가 마냥 부럽기만 할 것이다. 이런저런 세월을 다 지나온 아흔 살 먹은 노인이 봤을 때는 인생을 지나는 수많은 사건 사고 중에 하나로 보이고 외려 저들이 갖은 젊음이 부러울 뿐이겠지. 아픔이나 행복은 짜증 날 만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었다. 그래서 어릴 땐 차라리 그것을 정하는 어떤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런 기준이 정말 있었다면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이 분명 더 많았을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끊임없이 진화해온 것처럼 그 기준도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욕망과 함께 끝없이 높아지고 말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 행복이라는 것이 생겨 날 것이고 오직 단 한 명만이 행복할 수 있는 죽은 사회로 전락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이나 아픔이 상대적인 것은 우리에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넌 네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해?”
이번엔 내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한때는.”
“지금은?”
“글쎄......”
“나는 지금 행복해. 2년 전에 걸었던 이 길을 다시 걷게 되었고, 북쪽 길로 오기 전에 다시 걸었던 프랑스 길에서 실망도 했지만, 덕분에 여기 새로운 길을 알았고 너도 만났잖아.”
“독일로 돌아갔을 때 걱정되는 건 없어?”
“그건 그때 생각하고 그때 느껴야 할 감정이잖아. 머리 아프게 뭐하러 벌써 생각해.”
“네 말대로라면, 나도 지금은 행복한 거네.”
산 중이라 공기가 금방 차가워졌다. 우리는 곧 숙소로 들어갔고 나무로 짜인 2층 침대 아래쪽에 각자 바라보고 누웠다. 그녀가 잠들 때까지 나는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한 기타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깊어지고 나도 곧 잠이 들었다.
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광폭한 소음이 들려왔다. 두꺼운 나무로 된 창문과 문이 덜컹거리고 쾅쾅 울려 퍼졌다. 유리가 깨지고 커다란 무언가 쓰러지는 소음도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눈을 뜨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난폭하게 흔들리는 나무들이 기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굳게 걸어 놓은 창문의 한쪽을 살며시 열고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무언가가 쏜살같이 창문을 덮쳤다. 너무 깜짝 놀란 내가 뒷걸음치자 란이도 놀라 달려왔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대로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문을 열어달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에 주저할 사이도 없이 잠금장치가 풀리자마자 키와 덩치가 제법 큰 사내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눈엔 초점이 없었고 지저분한 머리와 옷차림보다 악취가 먼저 코끝을 자극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숙소의 부엌 쪽으로 달려들어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내는 어디서 어떻게 이곳을 온 사람인지, 그를 어떻게 내보내야 하는지 생각하는 동안 그녀는 가지고 있던 빵을 재빠르게 그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 사내는 갑자기 빵과 함께 그녀를 낚아채 달아나는 것이다. 가까스로 그녀의 다른 쪽 팔을 잡고 문턱에서 그와 싸움이 시작됐다. 그녀를 보낼 수 없는 나와 왜인지 필사적으로 그녀를 사수하는 그 사내와 팽팽히 맞섰다. 그러기도 잠시, 양쪽에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찰나에 그녀가 외쳤다.
“나를 놓고 어서 문 닫을 준비를 해!”
급박한 상황에 여러 가지 생각할 틈 없이 그녀가 말한 대로 그녀의 팔목을 살며시 놓았고 그녀와 그 사내는 동시에 문 앞으로 곤두박질치며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사내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녀는 재빨리 문을 타고 넘어왔고 나는 그대로 문을 걸어 잠갔다. 사내는 문을 사정없이 내려치거나 창문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몇 분을 그러다가 이내 고요해졌지만, 밖은 산내리 바람이 폭우와 뒤섞여 여전히 어수선했다.
매일매일 낯선 곳에서 하루를 머물다 떠나는 게 일상이므로 밖은 더 위험했다. 잔뜩 겁을 삼킨 그녀를 달래며 애써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나 역시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무서웠으나, 나까지 사느란 내색을 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좁은 침대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잠이 들었다.
따뜻한 온기에 눈을 뜨니 활짝 열어 놓은 창과 문을 통해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밤사이에 태풍이라도 다녀갔는지 온갖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굵은 나뭇가지가 꺾여있기도 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청명한 하늘이 지난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침 그녀가 두 손 가득 옷가지를 들고 돌아왔다. 옷가지들은 삭은 나뭇가지와 죽은 낙엽들과 뒤섞여 가관도 아니었다.
“밤새 천둥 번개가 다녀 갔나 봐.
우리 빨래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다 찾아오느라 애먹었어.”
“괜찮아?”
“아? 이거? 내 양말 한 짝은 결국 못 찾았지만, 여분이 하나 있어서 괜찮아.”
“아니. 아니. 어제 그...... 이...... 상한 괴한이.....”
“무슨 소리야? 코까지 골면서 세상모르고 자 놓고선.
나뭇가지가 꺾이고 쓰레기통이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악몽이라도 꾼 거야?”
어느 것 하나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정말 꿈을 꾸었다고 하기에 나는, 내 몸은 생생하게 지난밤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도 내게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 또한 없었다. 한 번 더 그녀에게 어제 일을 확인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바뀌진 않았다.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했다가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지만, 마음 한편이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잊어버려. 가끔은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참 꿈같을 때가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살 부리는 아이가 되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우기는 미치광이가 될 뿐이었다.
“말도 안 되게 지독하게 아파서 꿈만 같은데 현실이고, 너무 달콤해서 녹아버릴 것 같은데 정말 사라지는 꿈일 때가 있더라고. 뭐, 사는 게 가끔은 그렇더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없어진 것도 없었다. 평소처럼 다시 오늘도 서로 나란히 길 위에서 섰다. 그리고 그녀도 나도 내일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다. 그것이 꿈이었든 현실이었든 더 이상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다. 이제야 그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년간 악몽에 시달리고 수면제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야 했던 그 삶의 무게를 이제야 겨우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악몽이 얼마나 그녀를 괴롭히고 수많은 낮과 밤을 좀먹었는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되었다. 평생 악몽이라고는 초콜릿 훔쳐 먹다 엄마에게 종아리를 맞는다거나, 시험에서 낙제하는 꿈이 고작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퍽 귀여운 수준이었다. 악몽으로 수년을 괴로웠던 그녀를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었다. 비로소 미약한 걸음으로 아주 조금 그 마음에 다가 선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그동안 내가 왜 그녀를 쉽게 위로할 수 없었는지를.
“고마워.”
“갑자기 뭐가?”
“내게 너의 지난 아픈 시간들을 공유해주어서 그리고 그런 시간 속에서도 참 잘 자라주어서.”
“그게 나보다 9살이나 어린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하하하하하.”
손발이 오그라들게 닭살 돋는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같거나 비슷한 경험에서 나오는 위로가 머리에서 나온 수십 마디의 연민보다 더 크게 와 닿는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의 위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대감이나 동질감에서 비롯된 위로는 상대로 향하는 문을 더 활짝 열게 하는 힘이 있다. 미미하더라도 유대감은 적이 아닌 온전한 내편으로 인식하여 사람과 사이를 더 가깝게 잡아준다.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던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도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곧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다. 앨리스의 시계 토끼처럼 느린 내 걸음을 늘 보채던 란이의 걸음도 아쉬운 듯 사력을 다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쉬어가려고 노력해도 몇 주 동안 온종일 걷는 것에 최적화된 몸은 어기적 걸어도 사뿐히 나는 것만 같았다.
프랑스 길을 걸을 때는 하루에 30km 이상을 걷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길에 오르는 사람이 많은 만큼 구간별 거리도 짧고 크고 작은 마을 대부분은 순례자용 숙소가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의 컨디션대로 길을 정하고 머무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북쪽 길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보니 작은 마을에는 숙소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 수십 유로를 지불하고 낡은 호텔에 머물고 싶지 않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3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날도 제법 된다. 오늘도 우리는 30km 이상을 걸었다. 가이드북도 없고 가지고 있는 정보는 실제 거리와 차이가 있어 들여다보지 않은 지 오래다. 걷는데 아무리 익숙해져도 하루에 30km 이상을 걷는 날은 오후가 되면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된다. 어쩌다 보니 우린 길을 잃었고 그녀도 나도 비상식량과 물을 일찌감치 먹어 치우고 흉년이 든 논바닥에 축 늘어진 벼 이삭처럼 진이 다 빠지고 말았다. 그녀가 먼저 맨바닥에 주저앉았고 나는 그 옆에 배낭을 던지고 드러누웠다. 아직 해가 있었지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땀에 젖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었다. 도시로 진입한 지 꽤 지났건만 주변에 보이는 것은 스페인의 흔한 가정집뿐이었다.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언덕은 거인 왕국의 초대형 계단쯤으로 보였다. 허기진 탓에 애꿎은 언덕만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파비안! 란!”
그룹으로 함께 다니던 6명 중 한 사람인 마크였다. 그는 우리보다 먼저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이미 씻고 저녁 먹을 곳을 찾으러 다니던 참에 우리와 마주쳤다. 받은 것 하나 없이 얄밉던 그가 지금 우리에겐 구세주가 되었다. 덕분에 잃었던 길의 루트도 찾고 알베르게도 쉽게 찾았다. 그날 우리가 머물렀던 도시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낡은 고성이었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성곽이 도시의 중심을 에워싸고 있었다. 성곽 안으로는 현대식 건물보다 전형적인 스페인식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성을 따라 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고 중앙 광장의 한쪽에서는 거리 음악사의 수준 높은 연주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낭만적인 도시였다. 미로처럼 오밀조밀 늘어진 골목은 술집과 맛 집이 즐비했고 거주민과 관광객 그리고 순례자들이 적당한 비율로 가득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입 안 가득 맛봉오리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와 수많은 나라의 언어가 한데 뒤섞인 웅성거림에서는 사람 냄새가 풍겨왔다. 콩깍지는 비단 눈에만 씌이는 것이 아니라 코에도 씌였고 이곳에서 풍겨오는 사는 냄새는 그 어떤 향기보다도 강력한 페로몬 효과를 유발했다.
“너희와 함께 머물렀던 그다음 날, 나는 그 그룹에서 떨어졌어.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고 운이 좋으면 너희처럼 내게도 인연이 있길 바랐어.”
마크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기대감, 약간의 걱정이 섞여 보였지만, 그 속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에 우린 서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첫인상으로 시작했다는 란이의 말을 그는 농담으로 흘려들었다. 그와 함께 밤늦도록 바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루고(Lugo:스페인 북부 도시)의 밤하늘은 흐리마리하게 달무리가 졌고 바람은 솜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가을이 오고 있었지만 성곽 안에 노란 백열 빛은 모닥불처럼 따뜻했다. 그녀는 두 번째로 얼굴이 발그스름하도록 와인 잔을 비웠다.
성당의 종소리가 아닌 규칙적인 소음 때문에 이튿날 나답지 않게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쉬이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그녀가 자고 있는 위쪽 침대를 슬며시 들여다보니 이미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눈을 비비고 밖으로 나가보니 그녀가 테이블 가득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다시 짐을 싸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도대체 뭐하는 거야?”
“없어.”
“뭐가? 치약이? 칫솔이?”
“아니. 우비가 없어. 배낭을 구석구석 뒤져봐도 없어.”
“잘 찾아 본거 맞아? 계속 비가 오지 않아서 우비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우비가 침낭이랑 배낭 제일 아래쪽에 있어서 침낭을 넣고 뺄 때 가끔씩 배낭 옆에 풀어놓은 적이 있긴 하지만, 삼일 전엔 분명히 있었는데..”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출발하자.”
여름을 제외하고 독일은 비가 자주 온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겹다 싶을 만큼 자주 온다. 웬만한 비에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을 정도다. 대신에 모자가 달린 후드 티나 재킷으로 대충 머리만 가리고 다닌다. 그런데, 지금 내리고 있는 이 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모자 달린 재킷만으로 대충 해결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우비 사러 가자.”
밤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함께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마크를 먼저 보내고 우린 루고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상점은 굳게 닫혀있었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향하고 있었고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겨우 하나 찾은 스포츠용품 전용 상점 입구에는 오늘이 휴일이란 안내가 붙어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도록 사람도 없고 대부분의 상점이 닫혀있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휴일이란 문구를 본 그녀는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죽어버리듯 스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어나. 다 젖어!”
“이미 더 젖고 말 것도 없어.”
“그래도 어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자.”
“기억나? 내가 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에 섞여서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속에 섞여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보이는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계단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의 어깨에서 배낭을 내려주고 마른 수건으로 대충 얼굴과 머리를 닦아 주었다. 곧 괜찮아질 것 같던 그녀의 떨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땀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갈리시아가 제일 싫어. 아니 비가 자주 오는 곳은 어디든 다 싫어.”
“나도 비를 썩 좋아하진 않아.”
“나에게 비는 그냥 물이 아니야. 빗물 모양의 작은 가시나 마찬가지야.”
“괜찮아?”
“처음에 내 머리를 찌르고 다음에는 손등을 찍지. 조금 귀찮을 뿐이지 아프지 않아서 그냥 두면, 일부러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사소한 기억 세포들이 심장을 들쑤셔. 빨리 우비를 사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어.”
“우리 아무래도 오늘도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비가 오지 않는 곳은 어디든 좋아. 나 몸이 너무 아픈 것 같아. 눕고 싶어.”
그녀가 비를 더 맞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계단 앞에 그녀를 두고 근처에 머물만한 숙소를 찾았다. 혹시나 해서 알베르게로 돌아가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이틀 이상은 원칙적으로 안 된다는 매몰찬 거절만 들었다. 그녀가 있던 곳 근처에는 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호텔들뿐이었다. 혼자 있는 그녀가 걱정스러워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니 어떤 아주머니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 아가씨 아파 보이는데?”
“숙소를 찾고 있는데 적당한 곳이 없네요.”
“너네 순례자구나.”
“네. 알베르게에서 이틀 이상 머물 수 없대요. 호텔은 너무 비싸고.......”
“그래? 따라와 봐.”
같은 건물인데 바로 옆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여자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여자를 따라 올라가니 좀 낡았지만, 아담하고 깔끔한 호텔 리셉션이 보였다.
“순례자니까, 조금 싸게 해줄게. 더블 침대도 괜찮지? 싱글베드짜리는 방이 없어.”
그녀는 경황이 없었고 나는 여자의 제안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니 입구에서 그녀가 다소 머뭇거렸다.
“오해하지 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싱글 침대 두 개짜리 방은 없대.”
“나도 대충 들었어. 나 먼저 좀 누울게.”
“우리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는데, 배 안고파?”
“고프지. 그런데 지금 움직일 힘이 없어.”
“어제 먹었던 케밥 어때? 어차피 나는 우비도 있고 금방 다녀올게.”
대답조차 힘든지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화장실로 갔다. 어쩌다 그렇게 루고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밤새 시름시름 앓았지만, 주인 여자에게 받은 종합 감기약 덕분에 아침에는 차도를 보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상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비도 장만했다. 산티아고까지 며칠 남지 않았지만, 산티아고도 갈리시아에 속한 도시이고 계절상 비는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비는 반드시 필요했다. 제대로 된 판초 우의를 구입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쓸 만한 물건이었다.
예쁜 도시도 비 때문에 둘러보지 못 하고 낮 시간에도 호텔방에 머물렀다. 산탄데르에서부터 함께 걸어오는 그녀와 내가 이 정도까지 친밀해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나이도, 사는 곳도, 경험한 것도 참 많이 다른 우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편해졌다. 그녀에게 비는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내게 비는 태어나면서 익숙했고 우리 사이를 이어준 매개체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비는 반복되는 우연이다.
한 번 이상의 우연은 필연이다. 언젠가 동양의 종교와 문화에 관한 다큐와 책을 본 일이 있었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운명론과 인연설. 꽤 흥미로웠지만 전세부터 내세까지 연결된 운명론을 매력적으로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정해진 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논리가 지나치게 비약적이었다. 그런데 확고했던 내 세계관이 그녀를 알기 시작한 후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거나 있을 수 없는 일들의 반복들로 하여금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은 바람이 생겼다. 그녀에게도 비가 더 이상 아픈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녀와 나 사이에 내렸던 비와 빗속을 걸어온 아름다운 우리 시간들이 부정되는 일이 없길 바랐다.
산티아고로 가지 않고 그냥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시간도 그녀도 한 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 되는대로 우린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멜리데(Melide)에 도착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북쪽의 길이 프랑스 길과 합쳐지는 이 도시부터 순례자가 증가할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지막지한 수준일지 미처 몰랐다. 10월 말경이면 이미 카미노도 성수기에서 비수기로 넘어간 시점일 텐데,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담한 알베르게에서의 아늑한 분위기가 수천 년 전의 역사처럼 아득해졌다. 공립 알베르게의 150개가 넘는 침대가 거의 만석이었다. 남은 자리는 단 세 개뿐. 그나마 몸을 뉘일 침대가 남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세 개의 침대는 당연하게 150개의 침대 사이로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150개가 넘는 침대는 우리를 마지막으로 만석이 되었고 숙소 안에 반 이상은 건장한 남자들과 아저씨들이었다. 숙소를 안내받은 지 벌써 한 시간이 되어가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나흘 뒤면 산티아고인데 우리에게 허락된 소중하고 아까운 단 며칠, 마지막 그 시간을 매일 이런 전쟁통 속에서 하루를 정리해야 한다는 현실이 절망스러웠다. 밖에서는 땅을 삼켜버릴 기세로 장대비가 하염없이 퍼붓고 있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벽에 기대 널브러져 버렸다. 비에 젖은 담배가 이렇게 맛이 없긴 처음이었다.
행복한 순간은 얄궂게도 오래 머물러 주는 법이 없다. 행복하다는 감정은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 알갱이들로 몽글몽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흔하고 당연하여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있다가 몽실몽실한 구름 뒤로 눕는 해와 절정의 미모를 뽐낼 때 비로소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넋을 놓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어둠이 퍼지는 것처럼 행복이란 녀석도 그렇다. 사늑하니 그 속에 익숙할 여유도 주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심통스럽고 고약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