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인연을 말하다. (구, 비와 바람의 소나티네)
11. 란, 바람이 좋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보기 좋게 내 손으로 날려 버렸다. 그와 떨어질 궁리를 했던 것이 그를 싫어해서도 아니었고 그와 멀어지거나 아주 떨어지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늘 내 생각과 반대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지난 나의 선택도 그리고 방금 전, 나의 선택에도 나는 확신이 없었다. 이성과 감성의 싸움에서 한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은 기차의 선로처럼 가끔씩 일치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공존해서는 안 되는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부터 하지 마. 네가 염려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는 내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서 저런 말들로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일까? 내가 염려했던 일들은 우리에게 벌써 몇 번이나 있었다는 것을 진정 모르고 있는 것일까?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비치지 않는 그에게 확실히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너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음.. 네가 걱정되는 어떤 것?”
“그러니까, 뭘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그건 너의 생각이잖아. 넌 왜 가끔 너의 생각을 내게 묻는 거야? 너의 생각을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네가 정해둔 모범 답안이 있는 거야?”
“아니.., 단지 네가 늘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니까, 정말 무엇인지 알고 말하는지, 그냥 넘겨짚은 말인지 궁금했어.”
한참 뜸을 들이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던 그는 이번에도 교묘하게 피할 궁리를 하는 모양이다. 대부분 그는 내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내가 하고 싶던 말을 금방 알아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어 좋았지만, 반대로 나는 그의 생각이나 마음 상태를 전혀 알 수가 없어 늘 답답했다. 내게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도 대답을 해달라고 매달리지도 못하게 언제나 그럴 듯했지만 곱씹어보면 김 빠진 탄산음료처럼 허무했다. 그의 주변에서 그의 생각을 묻고 그의 마음을 묻는 나는 미성년자 관람 불과 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주변을 서성거리는 학생 같았다. 그래선 안된다고 고지식한 생각을 하면서도 교복 벗고 오면 들여보내 준다고 하여 벗고 왔는데 들여보내 주지 않아서 바짝 약이 오르거나, 그래도 교복을 벗으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웃기웃해보는 그런 학생 말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나 좋아해?”
“그런 멍청한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해?”
“이게 왜 멍청한 질문이야? 필요하고 들어야 하는 질문이지.”
“아니야. 바보 같아. 마음은 느끼는 거지 시험 문제 풀듯이 묻고 답하는 게 아니라고.”
“어려운 시험문제도 모르면 답을 물어볼 수 있는 거지.”
“싫어. 대답할 수 없어.”
“도대체 왜 못해? 좋다, 싫다, 그냥 말하면 되잖아. 너도 네 마음을 모르는 거 아니야?”
“너의 질문은 연인이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처럼 바보 같아.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출제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정답은 문제를 낸 사람이 더 잘 알겠지. 그러니까, 이제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독일의 날씨가 영국 못지않게 우울해서 철학자가 그리 많다더니, 그와 대화를 할 때 가끔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은 허리 굽은 노인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5살짜리 꼬꼬마와 이야기하는 것 같아 오히려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가끔 그와의 대화를 되짚어 생각해 보면 시를 분석하거나 암호를 해석해야 하는 것처럼 골치가 아팠다. 그의 마음에 확신이 서면 나도 내 마음이 갈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스스로가 정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하고 찝찝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겁도 없이 왜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일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품에 안고 곁을 준단 말인가.
답답했다. 그가 하는 말이 갑갑했고 그의 행동은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답을 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나 역시 내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않고 겉돌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대답을 피할수록 더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미래를 꿈꾸고 싶은 욕심이 파도처럼 울렁거려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현실의 그는 알면 알수록 허황된 꿈을 꾸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내 욕심이 그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끔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날뛰는 나를 방치하면 좋은 기억마저 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잡념이 또 다른 걱정을 낳고 말았다.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그와 더 이상 함께 걷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으로 그의 품에서 잠들었던 그 밤을 기억한다. 생각보다 넓고 포근한 그의 가슴은 별로 왜소하지도 않은 내가 꼭 안기고도 넉넉했다. 따뜻한 품속에서 조심히 새어 나오는 나의 들숨과 날숨처럼 안정감 있게 쓸어주던 그 손길에는 분명 애정이 담겨있었다. 어두운 방 한쪽 구석에 울려 퍼지는 시계 초침 소리는 그와 나의 심장 소리까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은 불꽃처럼 순식간에 타오르고 곧 꺼지는 성냥개비 같았지만, 메마른 겨울 같던 인생에 성냥팔이 소녀의 작은 불과 닮아 있었다. 찰나의 순간으로 사라져도 슬프지 않을 만큼 따뜻했고 나는 행복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차가운 눈밭에 미소 지으며 잠들었던 그 마음에는 이런 심정도 담겨 있었을까? 따뜻한 그 손길은 일정한 속도로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것이 수천 개의 머리카락에 닿으면 수천 개의 세포는 마지막 한 가닥까지 바짝 세워 긴장시켰다. 쭈뼛선 자극은 이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몽롱해지다 그 길 끝에서 잠이 들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나에게 찾아온 이 우연을 이성이 자꾸 타이른다. 언젠가 보낼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고, 잡아선 안된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마음은 자꾸만 미련하게 남고 싶어 했다. 마지못해 머리가 마음에게 단 하루의 밤을 허락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인연 잡고 있어봐야 나만 손해야.’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섭섭했다. 평생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되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에 빠진 듯 착각이 들었다. 마지막인데, 두려울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한여름밤의 연인이라도 된 듯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날 잡은 그의 손을 잡았고 행여나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따라 나도 그를 쓰다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눈, 코, 입 그리고 속눈썹과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모두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내게 사랑이라고, 나는 너무 소중하고 예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화답했다. 내 손길에 그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눈꺼풀 끝으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면 내 심장도 더 큰소리를 내었다. 감은 그의 두 눈은 지상에서 본 적 없는 편안한 미소를 하고 있었고 그 눈이 깜빡일 때 보이는 눈동자는 욕망이나 욕정이 가득 차있는 그것과 달랐다.
“그거 알아? 안경을 벗은 너의 눈망울이 얼마나 예쁜지?”
“응. 알아.”
“정말? 그런 말 많이 들었구나.”
“아니. 지금 너한테 태어나서 처음 들었어.”
늘 걱정하고 고민하느라 소극적이었던 나의 변화에 그는 한껏 긴장을 풀고 우스갯소리까지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가 진짜 연인도 아니고 우연히 만났던 것처럼 우연히 내일 멀어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이런 내 생각들은 확고했지만, 우습게 그의 한마디 농담에도 흔들려 맥을 못 췄다.
“너도 그거 알아? 네가 웃으면 옆에 사람도 이유 없이 행복해지는 거?”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떤 이유가 있겠지.”
“웃음기 없는 너의 눈은 그냥 예쁘지만, 너의 눈이 웃을 땐 어떤 힘이 있어.
그 눈이 울지 않고 더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돼.”
그는 모른다. 지금 나의 입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우울한지.
내게 늘어놓는 꿀 발린 듯 달콤한 그의 말들이 호기심이나 욕정에 의한 가식이 아니란 것쯤은 느껴진다. 하지만, 우린 연인도 아니며 그 흔한 ‘좋아한다.’는 말 조차 그는 내게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도 은연중에 이 길이 끝난 뒤에 올 아쉬움과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에게 나란 사람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만큼 치밀하게 앞뒤를 쟤거나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그에게 나를 맡기는 것은 더럽혀지는 하얀색이 아니라 보듬고 쓰다듬어 투명한 색이 되어가는 하얀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가질 수 없지만 나를 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공사였다.
밤 별들이 하나 둘 가슴으로 스며들자 그의 마음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를 더욱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새벽빛이 창문 틈에 스며들도록 나는 잠에 들 수 없었다. 파란 새벽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곤히 자고 있는 그가 보인다. 눈에 담은 그가 기억에서 잊혀도 지난밤과 지금 이 새벽은 가슴에서 오래도록 기억해주길 바랐다.
작은 마을의 새벽은 또다시 희뿌연 안개로 뒤덮였고 그 사이로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맞은편 바에 앉아 커피를 한잔 시키고 앉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뿌연 안개는 가실 생각을 않고 더욱 묵직하게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떠오른 태양은 달무리 진 밤처럼 운치까지 있었다. 한치의 앞길도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떠나고 싶지 않은 오늘 아침에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 반가운 마음이 더 들었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안개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속으로 빌었다.
‘온종일 이렇게 안개가 지독했으면 좋겠다.’
지독한 안개는 우리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영원할 것 같던 안개도 정오가 되면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는 오늘 기분이 몹시 좋아 보이고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 순식간에 20여 킬로미터를 걸어 산의 정상까지 올랐다. 산 정상에서 바로 아래로 아담한 마을이 하나 보였고 그곳은 오늘 숙소가 있는 곳이었다. 마지막 스퍼트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어제 그 그룹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드디어 만났네.”
“너희 어제 어디 있었던 거야? 어제 숙소에서 기다렸는데....., 끝끝내 안 보이더라?”
“중간에 마을이나 숙소도 없었잖아.”
“맞아. 어제 마지막 바에 있던 주인한테 주변에 알베르게가 있냐고 물었지만 없다고 했어.”
“오늘은 왜 하루 종일 안 보이더니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둘이 어디서 뭘 한 거야? 재미없게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에~ 혹시.........? 너네 어제 둘이.. 으흐흐흐”
몹시 심심한 그들에게 우리는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말았다. 파비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편해진 것보다 내가 몹시 불쾌하여 화가 났다. 여럿이서 우리를 에워싸고 서서 정신없이 질문들을 쏟아내더니 결국엔 비아냥거리거나 놀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처럼 우리의 이야기가 흘러가길 바라거나,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질문이 주춤해졌을 때, 그보다 내가 서둘러 불쾌감을 드러냈다. 나의 모습에 그들은 당황하여 금방 사과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길을 나섰다. 그때부터 짜증이 몰려왔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말을 던지더니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쉽게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그들을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너무 소중해서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었던 우리의 시간을 그들은 보잘 것 없는 흔한 불장난쯤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들은 이안보다도 더 퇴폐적인 소설가들이었다. 게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들의 소설이 아주 없는 사실을 꾸며 낸 것이 아니라는 것에 수치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무언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몰아가는 그들이 돌아가고 우리 사이에 감도는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넌, 언제나 네 멋대로야.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
“무슨 말이야? 갑자기.”
“어제 만났던 그들이 우리가 숙소에 보이지 않으면 저런 소설을 쓰는 게 당연하지.”
“그렇지만, 어제 그 숙소에 짐을 풀자고 한 건 너였잖아.”
“내가 아니어도 넌 어제 그곳에 머물 생각이었잖아.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상상한 그대로 발생해 버린 지금, 너무 당황스럽고 조금 모욕적이기까지 해.”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우리를 전혀 모르는 그들에 의해 우리의 시간들을 나쁘게 포장하지 마.”
“아니. 앞으로도 이런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산티아고까지 가고 싶지 않아. 불편해서 미쳐버릴 거 같거든.”
그는 오늘도 그들과 같은 숙소에 묵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유치한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의 머릿속에서 야설을 쓰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화를 낼 것은 아니었지만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가볍게 이야기를 만들고 떠드는 것에 나는 견디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거나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감수하고 살아야 하는 운명처럼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겨우 인사 몇 번 하고 걸려온 전화도 몇 번 받아준 적도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람에 의해 버려진 여자가 된 일도 있었다. 이번처럼 정말 있었던 일이 소문으로 퍼진 거라면 차라리 참아낼 수 있었다. 지나가도록 기다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알지도 못하는 남자들과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오해를 풀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그들 기억 속에 그런 사람으로 남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에 이제 넌더리가 났다. 지금까지 나를 고민하게 하고 소극적이게 했던 그 아픈 시간들이 이제 겨우 괜찮아지고 있는데, 다시 반복되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그래. 어차피 그와는 이제 곧 헤어질 참이었어.’
그는 내가 단순히 불쾌한 기분에 언짢아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념들이 나 스스로 더욱 숨통을 조이고 있다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좀 진정하고 여기에 앉아 봐. 일단 쟤네들 먼저 보내고 우리는 여기서 생각 좀 해보자.”
“무슨 생각을 하자고? 그래 좋아. 네 말대로 쟤네들 먼저 보낸다 치자, 그러면 그다음엔?
이 길에 사람이라곤 너와 나, 그리고 쟤들이 전부이고 숙소도 뻔한데, 지금 피하면 내일은?
그다음 날도 계속 피하자고?”
“누가 피한대? 불편한 사람 그냥 안 보는 거지.”
“뭐가 그렇게 항상 간단해?”
“너야 말로 왜 세상을 복잡하고 어렵게 살아? 나까지 그렇게 살게 하지 마.”
“그래! 그럼 넌 여기 이 카페에 종일 앉아 있다가 어제처럼 근처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 쉬던가.
나는 지금 길을 떠나고 다음 마을에서 그 사람들과 묵으면 되겠네.
우리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그들은 또 새로운 소설을 쓰겠지.
어떤 이야기든 아름답지 않고 끔찍할 것이고 그들의 퇴폐 소설은 거기서 끝나도록 두는 게 낫겠어.”
“편할 대로 해! 그들과 상관없이 난 힘들어서 일단 쉬어야겠어.”
카페에 앉아 벌써 1시간째 그들 때문에 인상이 굳어 있는 그를 두고 돌아섰다. 처음부터 계획에 있던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싸우고 돌아설 생각은 아니었다. 혼자서 걸어온 1시간이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혹시나 그가 서둘러 뒤따라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오던 길을 연신 돌아보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먼저 숙소에 그 그룹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오늘 길에 맞주친 몇몇은 파비안이 어디 있냐고 묻거나, 그를 보게 되면 알려주겠다며 전혀 반갑지 않은 너스레를 떨었다.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있는 숙소에 자리를 잡고 곧 마을로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그들이 곧 도착했을 때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늘 그랬듯 숙소가 있는 마을은 걸어서 몇십 분이면 온 마을 관광이 끝날만큼 작았다. 작은 이 마을에는 두어 개의 작은 슈퍼와 약국 하나, 몇 개의 바와 식당이 전부였다. 그나마 식당과 바가 있어 굳이 숙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어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몇 주를 들고만 다녀서 색도 벗겨지고 다 부서진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바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수첩에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룹에 있던 몇몇이 나를 알아보았으나, 그들이 말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일부러 의미 없는 글자들을 열심히 끄적여 그들을 쫒아 보냈다. 그러는 동안 벌써 해는 지고 어둠이 깔렸다. 바 안에는 술손님이 늘어 제법 시끄러워졌고 나 역시 와인 한 잔을 받아 들고 밖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려던 참이었다. 문에 달린 방울의 요란스러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파비안이었다. 배낭도 없이 말끔한 차림인 것을 보니 그도 이 마을 숙소에 머물기로 한 모양이다. 샤워를 마치고 물기도 제대로 털지 않은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가쁘게 숨을 고르며 내 앞으로 섰다. 그를 보고 조금 흠칫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밖에 있는 테이블로 옮겼다. 곧 그가 따라와 내 앞에 앉았다.
“누가 앉으래?”
“한 참 찾았어.”
“왜 굳이?”
“왜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정말 그가 나를 찾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만큼 인연도 머물면 머무는 대로 흘러가면 가는 대로 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선택이나 의지로 지나가는 인연을 더 붙잡아 둔다거나 지나간 인연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유치한 내 질문은 듣지도 않고 서운한 기색을 보였다.
“우리 그냥 이제는 같이 걷지 말자.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
“왜 우리가 따로 걸어야 하는지 알려줘.”
“그야....... 너랑 ‘정’ 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것도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게다가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려 놀라웠다. 이렇게 그가 질문해 온 이상 솔직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이란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랑도 좋아하는 것도 아닌 다른 무엇이지만 비슷한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사랑, 애정, 호기심, 우정, 그런 모든 감정을 포함한 어떤 관계에 있는 연대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친근감보다도 포괄적이며 깊고 사랑보다는 사소하지만 통속적이라고 덧붙였다. 영어에도 없는 이 단어를 도저히 영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독일어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왜 싫은 거지?”
“돌리지 않고 말할 게. 난 ‘정’이 많아서 이런 식으로 너와 함께 하다 보면
언젠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생기고 말 거야. 동료였던 네가 어느새 남자가 된 것처럼.”
“지금까진 아니었단 말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구구단을 외기 시작할 때 넌 겨우 기어 다녔을 걸.
넌 그럼 9살이나 많은 나를 이모나 동네 아줌마처럼 느끼지 않았단 말이야?”
“너는 이모처럼 보이지 않는 걸. 처음부터 지금까지 네가 여자가 아닌 적이 없었어.
나이? 그게 뭐? 우리는 그런 숫자보다 더 중요한 많은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했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한국에서 나는 이미 결혼 적령기가 지난 나이야.
젊은 나이에 불장난하듯 스쳐가는 인연을 만드는 일이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은 나이라고!”
“음...., 이제야 좀 알겠네. 그동안 왜 그런 질문들을 했는지.....”
“맞아! 넌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순간순간 네 감정을 따라 즐기면서 살잖아.”
“널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없어.
지금껏 여러 여자 친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 없었고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어. 그런 마음이 든 적도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그게 나빠?”
그와 처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가지게 되었지만, 대화를 할수록 그는 내 마음에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이제 겨우 서로를 알아간 그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나 역시 그에게 그런 확신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전부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내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잔뜩 인상을 쓰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뭇 진지했으며 심각했다.
“나도 모르겠어. 네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단지, 감정을 키우고 관계를 지속하면 끝이 뻔히 보이는 결말을 향해 가는 것만은 확실해.”
“어떤 결말?”
“함께 있는 동안은 좋다고, 좋아 죽겠다 하겠지. 그리고 너는 네 나라로,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가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당연하게 추억이 되어 언젠가 잊히겠지.”
“그렇게 뻔하다는 결론을 난 생각해 본 적 없어.”
“넌 독신주의자에 사랑을 믿지 않고 더구나 네 인생에 결혼이란 건 없다고 확신하고 있잖아.
게다가 넌 어려. 네 말이 지금 너에겐 어울리지만 나는 아니야. 달라.
평범하게 살고 싶어. 무모한 도전 같은 거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특히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
영양가 없이 잔뜩 겁만 집어삼킨 어리석은 상상일 뿐이야.”
“너에게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난 더 이상 너에게 움직일 수 없어.”
“너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어? 내 말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나를 믿으려고도 하지 마.
확신이란 거 누구에게 얻는 게 아니지 않아? 너 자신과 너의 선택을 믿어. 나도 그럴 거야.
너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고 확신도 줄 수 없지만 내 마음은 내가 알아.
지금 이 시간들이 지난 너의 사랑들처럼 슬픈 끝이 되거나 추억이 되지 않을 거란 건 분명해.”
그의 말엔 언제나 오류가 있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확실하다고 말하는 괴변이었다. 갖고 싶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어렵고 힘들수록 위험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망설이고 또 주저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바라는 확신을 줄 수 없지만, 그의 말에는 분명 진심이 있었다. 함께 하는 동안 행복했고,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웃을 수 있다면 함께 하는 미래가 아니더라도 나쁜 결말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애써 설득되고 싶어 졌다. 지금까지 나를 대하는 그는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누구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의 변화가 그로 향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일지라도 아마도 그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지금 불안한 이 시간들이 지난 너의 사랑들처럼 너에게 아픔으로 남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볼 거야. 그런 것들이 너를 행복하게 한다면 말이야.”
그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이 온전히 내게서 기인되었으면 했고 그의 말에 내가 흔들리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나와 그의 선택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는 결코 나를 설득하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참으로 서운했지만, 내 마음을 아는 듯 그는 자신의 결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믿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그가 내민 손을 덥석 잡고야 말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솔직한 그의 생각을 내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의 외모, 배경, 성격, 집안, 직업, 이런 것들을 하나도 보지 않고 오직 순수한 열정만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지금 내게 남은 생에서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삼십이 훌쩍 넘고서 없을 것 같은 이 시간 속에서 한껏 순수한 척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옳은 결정 같은 건 없어. 최선만 있을 뿐이야.’
허울뿐인 옷을 벗어버리고 드러난 알몸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불안함, 답답함, 그리고 복잡함, 그러나 동시에 간절함, 열렬함, 진실도 모습을 드러냈다. 부정적인 것보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설레게 하는 감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 번도 나에게 질문을 한 적이 없던 그도 내게서 원하는 답을 찾은 듯 보였다. 그는 더 이상 그 그룹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같은 날 늦은 오후, 오랜 대화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을 때, 그 시끄러운 그룹원들이 옹기종기 보여 식사와 포도주를 곁들인 수다가 한창이었다. 스페인 청년이 자신의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전해 내려온 특급 요리인 콩 수프를 우리에게 건넸을 때, 파비안도 흔쾌히 고마워하며 그들 무리에 뒤섞였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의 앞으로 뒤로 그 일행들을 마주칠 때 환하게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여전히 독일 청년은 우리 근처에 있었지만 이제는 나보다 더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던 그의 뾰로통함은 어쩌면 나와 같은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내 선택에 남아있던 불안함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거 알아? 너희 보면 엄청 부러워. 마치 십 년도 더 넘게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편해 보여.”
이튿날 오후, 숙소에 도착한 파비안은 그 6명의 그룹원들과 나를 위해 8인분의 리조또를 혼자 만들었다. 모두들 세상에서 제일 맛 좋은 리조또였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에 무거운 포도주까지 더해 15km 이상 걸었던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파비안의 기타로 돌아가면서 흥을 돋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늘 시끄러웠던 그들도 조용하고 진지한 대화를 했다. 웃고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 그가 슬며시 자리를 떴다. 그를 따라나섰고 그는 기다렸던 듯이 숙소 앞 잔디 밭에 나를 앉혔다. 잔디 앞으로는 침엽수가 가득한 숲이었고 그 옆으로는 어둠뿐이었다.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어두운 앞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
반구의 형태로 된 하늘은 셀 수 없는 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을 가로지르는 희뿌연 별빛 다리가 있었다.
“저기 저 하얀 별빛 다리가 밀키 웨이라는 거야. 갤럭시라고도 하는데, 본 적 있어?”
“저게 갤럭시구나. 처음 봤어.”
“예쁘지? 깊은 산중이나 해변가에서만 볼 수 있어.”
그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분야에 아는 것이 많아 또래부터 나이 많은 노인까지 누구와도 자연스럽고 쉽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와도 대화가 잘 통했고 실제로 그가 나보다 9살이나 어린 남자라고 물리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내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은하수를 가리키며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나이 때의 사람들에게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순수가 있었다. 그것은 때 묻지 않은 순결함과 다른 소년의 감수성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해왔던가.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그가 참 좋았다. 그를 그로만 좋아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내가 좋았고 그가 그라서 참으로 좋았다.
아침 일찍 모두들 길을 나섰고 그와 나는 오늘도 늦장을 부렸다. 갈리시아에 들어섰다는 것은 이제 산티아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예정된 이별로 다가서는 것이었다. 혼자 쓸데없이 고군분투하느라 그와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정작 얼마 남지 않았다. 늦게 출발해 놓고 우리는 자주 쉬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둘 중 누구 하나 아프다거나, 산티아고로 도착할 생각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도 한참이나 꾸물거렸는데 30km를 넘게 걸었다. 이미 숙소가 있는 마을을 몇 개나 지나쳤고 다음 숙소까지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지 우린 몰랐다. 해도 어느새 숨을 꼴딱이고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시골 간이역에 앉아 어떡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우리 앞에 섰다.
“너네 순례자야?”
“응! 맞아. 근데 알베르게까지는 얼마나 더 걸어야 해?”
“휴우! 6km는 될 거야. 지금 너희 상태로는 한 시간도 더 걸리겠네.”
그는 다음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봉사자였다. 잔뜩 귀찮은 듯 커다란 한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더니 그는 곧 차를 타고 떠났다. 혹시나 우리를 태워주진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온종일 무척이나 좋았던 날씨도 해가 지나면서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해 질 녘부터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날려주고 땀을 식혀주던 가을바람이 모래와 나뭇잎을 동반한 거친 바람으로 변해 있었다. 날씨에 일가견이 없는 사람도 곧 비가 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갈리시아로 들어서니 언젠가처럼 비가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날씨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곧 비가 제법 내릴 것 같아.”
“바람에 흙먼지가 날려서 앞을 제대로 못 보겠어.”
“내 지팡이를 잡고 뒤로 붙어서 따라와.”
어제처럼 그는 지친 내 앞으로 나섰다. 어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은 그가 그의 지팡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등산객, 우리 같은 순례자들에게 신체의 일부와 같은 지팡이를 그는 내게 내어준 것이다. 시원하게 불어와서 좋았던 바람이 곧 흙먼지까지 불러들여 그새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었는데, 금세 그와 나를 묶어주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와 멀어지겠다고 다짐했다가 번복하고 인연이 아니라고 밀어내더니 내가 또 그 옆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 알다가도 모를 인생, 그것은 바람과 닮아 있었다. 인생이 바람이라면, 우리는 그 바람을 따라 걷는 순례자이다.
“나는 바람이 좋아.”
“응. 알아. 나도 바람이 좋아.”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도 알아?”
“응. 그것도 알아!”
“진짜? 어떻게?”
“몰라. 그냥 알아.”
그에게 나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벌써 길 위 어딘가에 버렸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로 가고 있는 내 마음을 아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가 모르고 있다면 단지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알도록 하고 싶어 졌다.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그 그룹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는 것을 그만두니, 더 이상 그들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에게로 가는 내 마음을 그가 알게 되자, 그는 더 이상 그들을 피하지 않았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내가 싫어하는 어떤 것이 사라지니 그에 따른 마음도 함께 사라졌다. 달콤 쌉쌀해서 좋았던 초콜릿이 쓰기만 하다면 더 이상 초콜릿을 찾지 않겠지.
만약, 나를 좋아하느냐는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면, 나는 분명 ‘왜’냐고 또 물었을 것이다. ‘왜’는 또 다른 ‘왜’를 부르며 확인하려고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질문으로 그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