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악의 하루(2016)> 다시 읽기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한 남자의 독백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훗카이도의 조용한 항구도시 루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 낡고 조용한 동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어젯밤 고향 루모이의 꿈을 꾸었다. (…) 꿈 덕분에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 꿈, 이야기… 곧 장면이 바뀌고 한 여자가 말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 아닌 듯 모호하고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여자가 빈 주전자를 커피잔에 따르는 그 순간 모두 연기였음이 분명해진다. ‘진짜 라는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남자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여행하고 있다. 화려한 도심을 벗어나 어김없이 ‘낡고 조용한 동네’다. 길을 찾아 골목을 헤매는 남자에게 어느 집 대문 앞의 노인이 말을 건다. 그녀는 실은 아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녀가 진실이라고 믿는 세계 속에서.
남자는 계속 길을 헤매던 중 또다른 한 여자를 만난다. 남자가 자신을 ‘거짓말을 만드는 직업’으로 소개하자, 여자는 자신도 같은 직종이라고 소개한다. 소설가와 배우다. 거짓말,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자 앞선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진다.
어린시절의 기억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꿈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야기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연기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어떤 기억들은 꿈만큼이나 불분명하고 때로는 이야기 마냥 주관적이다. 동시에 어떤 이야기들은 현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연기란 일면의 진실 없이 성립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고 무엇을 거짓이라 이름붙이는가. 일부만 드러난 진실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는가, 진실과 거짓을 우리는 진정 구분지을 수 있는가.
그 진실과 거짓 사이 아슬아슬한 외줄 위를 <최악의 하루> 속 ‘은희’가 걷고있다. 그녀가 외줄타기를 수행해내는 동안 과연 어느쪽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아니 애초에 그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것이 가능은 한지 관객들의 혼란스러움은 가중된다.
남자친구 ‘현오’ 그리고 현오와 멀어진 사이 잠시 만났던 ‘운철’ 사이에서 은희는 현오의 여자친구가 되었다가 또 운철과 잠시 만났던 여자가 ‘된다.’ 은희가 어느 한쪽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보다 이처럼 ‘-되기’를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단서는 세 가지를 들어볼 수 있다.
첫째, 은희는 현오와 만날 때에 푼 머리를 하고, 운철을 만날 때에는 묶은 머리를 하고 있다. 모 드라마에서처럼 점을 찍어 다른 사람이 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사소하게나마 현오 그리고 운철과의 만남 사이 다른 모습의 은희가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현오와의 만남과 운철과의 만남은 공간적으로 분리된다. 은희는 촬영중인 현오를 만나기 위해 남산에 올랐고 상승의 방향으로 그와 함께 걸었다. 현오와 다툰 이후 다소간 길을 내려온 은희는 길을 올라온 운철과 만난다. 은희는 그에게 “저는 저기서 내려왔다”며 “이 길로 다시 내려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셋째, 은희는 의외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두 남자 사이에서 그녀가 내뱉는 문장 문장들은 거짓이라기보다 파편화된 진실의 형태를 띄고 있다. 답하기보다 되묻는 방식이다. 응수했지만 상대가 원했던 정보값은 없는 대화들 사이에서 관객들은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 번 은희는 운철과의 대화 속에서 거짓말을 강하게 요청받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운철이 물었다. “만나는 사람 생겼어요?” 그리고, 은희 줌-인. 카메라가 이전에 없이 과장된 무빙으로 대답하는 은희의 얼굴을 가까이서 비춘다. “제가 사람 만나는 기계에요? 그런 일 있고 어떻게 사람을 만나요?” 기분 나쁜 기색에 은철은 물음을 거두지만 은희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말들로 상황을 모면했다.
진짜 라는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그러나 당연스럽게도 은희가 곡예하듯 빚어낸 진실의 퍼즐들은 완성되지 못하고 어긋난다. 머리를 묶는다고 정말로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타자를 연기한다고 해서 본래의 자아가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 각각의 진실들은 은희라는 한 명의 현실 인물로부터 출발하므로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분리된 듯 보였던 상승의 길과 하강의 길이 결국 ‘하나의 길’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남산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내려오는 현오와 올라오는 운철은 마주치고야 만다. 은희를 사이에 두고서.
은희는 그렇게 최악의 하루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운했나? 그 만남은 우연적이라기보다 실은 필연적이었기에 최악의 하루일지언정 불행한 하루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 하루의 끝에서 은희는 그날 오전 길을 찾아줬던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를 만났다. 여전히 ’극중의’ 남산에서.
료헤이 앞에서 은희는 누가 ‘되기’를 시도했을까? 그들은 서툰 영어로 짧은 대화들을 주고 받는다. 흥미롭게도 그 정확하지 않은 언어들은 그들 사이에서 장벽이 되기보다 장벽을 허무는 매개가 된다. 하는 수 없이 ’되기’를 포기해야하는 은희는 외려 자유로워보인다. “요즘 살고 있는게 연극”이라며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둘은 “끝을 알 수 없는 저 너머”를 향해 걷는다. 감추는 언어 대신 비로소 꾸미지 않은 진실한 모습으로. ‘하나의 길’을 벗어나는 그곳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다시 남자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거에요.”
<최악의 하루>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다. 끝과 시작이 료헤이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며 료헤이의 하루와 은희의 하루가 번갈아 보여짐에도 관객들은 서사가 있는 은희의 하루에 훨씬 더 쉽게 매혹된다. 실은 그 매혹 자체가 이야기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에 몰입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질문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이야기, 그러니까 ‘글‘이라는 것은 진실 그리고 거짓과 과연 얼마나 가깝고 먼가? 허구는 오로지 허구로만 머물러야 하는가? 료헤이의 하루 속에서 언젠가 기자의 물음에 그는 답한 적 있다. “글은 글일 뿐”이라고. 정말 그럴까? 던져진 질문에 대해 감독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야기의 끝에서 연극이 들통나고야 말았던 은희의 하루 속에서 찾아야 한다. 감독 역시 이야기로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야기, 글, 연기, … 거짓으로 보이는 일련의 것들이 실은 진실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허구적 구성 안에서 애타게 진실을 좇는 작가의 몸부림은 수많은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도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