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국제환경영화제, 단편영화 <벽 너머에>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던가, 학교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힌 새를 본 적이 있다. 아마 주말이었던지, 교실 안의 아이들 몇몇이 쿵- 소리에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리창 앞에서 참새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생생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작은 한 손에 온 몸이 들어올만큼 조그마한 새가 검지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힘없이 고개를 젖히는 감각이 잔혹하게도 생경했다. 아니, 실은 무서웠다.
와글와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가엾은 새를 묻어줘야 한다며 적당한 흙을 찾아나섰다. 구석진 놀이터 옆 공터, 조그만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묻어줬다.
다친 새를 가여이 여기는 마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길러질 것도 없다. 내가 다치면 아프고, 친구가 다치면 위로하듯, 다친 새에게는 마음 아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그 ‘자연스러움‘은 종종 소거된다. 그런 것 쯤 어쩔 수 없다고,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은 손쉽게 순진하거나 우스운 것으로 치부된다. 실은 ‘여성적‘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단편영화 <벽 너머에>는 두 아이들과 여성 주인공이 다친 새를 향해 기우는 마음을 보란듯이 중심에 세워낸다.
연수는 도시의 소음으로 난청 증세를 겪고 있는 인물이다. 도시의 피해자이자 그럼에도 도시성을 재생산하는 도시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파트 방음벽 설치에 찬성해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에 그녀는 곧바로 긍정하기가 어렵다. 전단지를 보며 고민에 빠진다. 다름아닌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설치된 다른 아파트 방음벽 앞으로 까치 하나가 죽어있다. 그를 바라보는 연수의 눈길 끝에 두 아이들이 비친다. 아이들은 유리벽에 스티커를 붙이며 조심스레 까치를 거두고 있다. ‘휘르르-’ 그 순간 청명한 새소리가 들린다. “호반새다!” 숲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연수는 따라간다. 숲에서 아이들과 연수는 함께 새를 관찰한다.
숲은 아파트와 대조되는 희망의 공간이다. 아파트는 곧 도시를 상징한다. 도시는 방음벽, 유리창 따위로 새들을 죽음으로 내몰 뿐 아니라 그 결과까지 ‘처리’하려 한다. 까치를 묻어주려 하느냐는 연수의 질문에 아이들은 답했다. “그냥 일반쓰레기 봉투에 버려야 한대요. 그냥은 못 묻어요, 땅에.” 도시는 비인간존재들을 터전을 공유하는 이웃으로조차 존중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들이 살아가는 자그만 녹지마저도 개발의 논리로 손쉽게 훼손한다.
그러나 숲에서 새들은 온전한 존재로 존중받는다. 아이들과 연수는 마치 숲의 정령처럼 도시와 인간에 의해 죽은 까치를 애도한다. 도시에서 함께 살고 있는 새들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새들을 관찰할 때에는 인간의 언어를 내려놓고 침묵의 지키는 방식으로 새들에게 예의를 다한다.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 감각을 집중해 귀기울여보면서 섬세히 그들을 눈에 담는다.
애정어린 시선 덕분일까, 화면에 비춰지는 새들의 모습들이 퍽 사랑스럽다. 부리도, 깃털도, 몸도, 다리도 모두 제각기 다른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이 삭막하고도 폭력적인 도시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도시에 이토록 많은 새들이 있었던가, 무심했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언니, 이름이 뭐에요? 호반새 발견한 언니 이름 제 노트에 적어놔도 돼요?” 수많은 인연이 스쳐가듯 사라지고 휘발되는 시대에 조심스레 이름을 묻고 적어두겠다는 말은 이토록 낯설고 귀하다. 새소리에 눈을 반짝이며 서로와 시선을 맞추는 그들은 즐거이 ‘교감’하고 있었다.
새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연스러움’을 도시에서 사라지게 한 것은, 자본과 같이 거대한 그 무엇 뿐만이 아니었다. 도시성을 온몸으로 체화해 끊임없이 재생산해낸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도시의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비인간존재들의 이름을 알아챌 수 있는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또한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얼마나 애정을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떠올려본다.
도시에서 ‘자연스러움’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문을 열고 나가
가장 먼저 보이는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