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보는 창이었던 것이, 이제는 세계가 되어버린

영화에 보내는 연서, 나 그리고 영화

by 우정


사랑에는 기쁨 위로 슬픔이 덧씌워진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어딘가 진득하고 먹먹한 구석이 있다.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


흔해빠진 말임에도 감정의 실체와 부딪힐 때 나는 그 상투적인 문장에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라는 것의 총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영문을 알 수 없이 코 끝이 찌릿해져 올 때 꼭 그렇다.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고야 마는지 쉽게 설명해내기는 어렵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본다. 십오년 전 쯤 나에게 영화는 더 넓은 세계를 보는 창이었다. <화려한 휴가(2007)>, <부러진 화살(2011)>, <남쪽으로 튀어(2012)> (...) 작품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따질만한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좁디좁았던 내 세계를 넘어, 영화는 학교 밖의 드넓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중한 창구였다.


놀랍게도 클라우드에서 발견한 그 날의 사진

그러다 스무살 즈음 대한극장과 서울극장을 드나들게 된다. 우연히 예술영화들을 접한다. 아, <스틸 앨리스(2015)> 였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교수 역 줄리안 무어의 연기에 영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을 헤매었다. 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토록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도 관객의 마음 안에서 무언가 터져나오도록 할 수 있구나. 여지껏 보아온수많은 한국영화들이 그렇지 못했던 것이구나.


그렇게 스무살, 거창함을 담아 영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본다. 금은보화가 담긴 보물상자처럼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긴 작은 영화들, 묵묵하게 그 영화들을 상영해내는 구석구석의 다채로운 예술영화관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자리를 지키는 관객들.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영화는 끊임없이 나를 새로운 영화에게로 데려다주었고, 지역 곳곳의 작은 영화관들을 찾아가는 재미도, 바로 그때에만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영화제들과의 만남도 늘 즐거웠다.


이제는 사라진 서울의 예술영화관, 미로스페이스(2016)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그야말로 틈이 나는대로 영화를 보러다녔다. 어느샌가 영화를 보는 시선 같은 것이 생겼다. 영화를 보고 터져나오는 말들을 글로 정돈해내는 것만큼이나 큰 기쁨이 없었다. 삶이 온통 영화로 충만했다.


그 때, 그 애틋함이 무색하게도 극장의 위기가 찾아왔다. 끝나지 않는 감염병의 시대 속에 ‘영화 같은 것’들은 단박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었고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독립예술영화관을 지키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아마도 숱하게 고민했을 캠페인의 캐치프라이즈는 “영화의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었다” 였다. 영화를 완성시키는건 결국 관객이기에, 물론 그러하다.


우습게도 내게는 문장이 다르게 읽혔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 영화가 있었다”고. 글자글자들이 재조합되어 엉뚱하게도 다른 문장이 마음에 남아버린 것이다. 실은 정말로 나의 모든 순간에는 영화가 있었으니까. 영화와 함께한 삶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져 온 십년의 시간동안 영화는 그 순간순간들을 빼곡히 채웠고, 어떤 영화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때의 정취를 불러일으켰다.


삶이었다. 영화가 곧 삶이 되었다. 한 때 세계를 보는 창이었던 것이, 이제는 나의 세계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내 세계, 내 전부.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잃고 싶지않은 것,

내가 계속하고 싶은 것.


그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기쁨을

오래, 아주 오래도록 지켜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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