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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Jan 14. 2020

어쩌다, 마흔.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2020년이라는 숫자는 완벽하고 빈 틈이 없다. 너란 녀석, 쿠쿠다스처럼 쉽게 부서져버린 내 삶과는 달리 어딘가 단단하고 야무져 보여 무척이나 맘에 든다. 2020년인 올해 드디어 나는 40세, 마흔이 되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순간에 마흔이 될 수 있을까. 이론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신작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제목에서 말해주듯 사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며,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도 표현했듯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져있을 뿐이라고 했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설명한 물리적 지표로서의 시간


또한, 뉴턴의 법칙, 맥스웰의 방정식, 아인슈타인의 공식에서도 시간은 정방향으로만 흘러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어려운 물리적 지표로서의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든 왠지 올해를 시작하는 기분이 좋다. 얼마 만에 또렷하게 인식해보는 새해인가. 육아는 정말 많은 것을 나로부터 단절시켰다. 기분 좋은 설렘이 내면 깊이 숨어있는 무의식을 흔들어 좋은 파동을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감정이 좋다는 건 좋은 신호다. 내가 다시 나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왠지 미래는 이미 예정된 미래보다 나은 미래가 올 것 같다. 제법 괜찮은 엔딩이 아닐까.


영화 인터스텔라의 클라이맥스


양자의 불확실성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알 수는 없으므로 나는 믿기로 했다. 2020년엔 나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꽃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마치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인 쿠퍼가 5차원의 공간 속에서 딸의 방을 찾아가 책을 떨어트린 것처럼 미래의 내가 "브런치를 시작해!!"하고 꿈을 통해 현재의 나에게 알러 준 것만 같다. 그래 생각을 글로 써보자. 지금보다 더 나빠지겠어?





전업맘이라도 괜찮아


육아의 과정은 우울과 기쁨의 요동이었다. 인구통계학적으로 너무나도 무의미한 숫자 1일뿐인 이름 없는 경단녀, 전업맘이  나의 사회적 위치는 나의 자아를 이리 누르고 저리 눌러 아프게 했다. 이제  이상 남성복 디자이너도, 브랜드 매니저도, 패션MD도  아닌 대중이 혐오하는 집에서 애나 키우는 취집  잉여가  것이다. 얼마  남편 지인이 신랑에게 부인 뭐하냐고 물었는데 우리 신랑이 "집에서 놀아."라고 별다른 생각 없이 말했다. 6 30분에 출근해서 8 귀가에 종종 야근도  집안일free 삶을 사는 신랑이 나의 일과를   없으니 말하면 싸움각이겠지. 이렇듯 가정  돌봄 노동은 아무도   없는 그림자 노동이다. 화가 나지만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른 사람 눈엔 팔자 좋은 아줌마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냥 가사도우미에 육아도우미다. 개인마다 기쁨의 원천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옷을 차려입는 것을 좋아했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아이를  봐줄 여유 손이 없다면 절대 인스타  예쁜 엄마들처럼 우아하게 화장하고  입고 필라테스를 하러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육아맘의 현실이며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Btv 속 무료영화 코너에서 영화 <툴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삶은 슈돌이나 동상이몽이 될 수 없다.


매일매일 못생김이 갱신되는 삶


그 속에서도 우울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육아맘이 힘든 건 잠을 못 자고 24시간 준비조가 돼서 아이를 돌보는 일상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활 속에서 점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어가는 고통 때문일 것이다. 거울 속에 지친 얼굴을 마주하며 새삼 내가 지금 몇 살이나 먹었는지, 예전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게 일반적인 사고의 흐름이겠다. 사실 때가 되면 모든 엄마들에겐 전업맘 혹은 워킹맘을 선택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타인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아주 다양한 원인의 조합으로 결정되는데, 남들 다하는 것이라 믿었던 일들이 알고 보면 모두가 다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의 노동의 현장_치우고 정리하고 음식만들기의 무한루프


MYSELF 연구소 INPF입니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패션기업이 서울에 있는 반면, 결혼 후 신랑의 직장이 있고 나의 고향이기도 한 지방으로 내려오길로 결정했던 점과 INPF적인 성격적 특징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MBTI 성격 유형의 한 가지로 여러 특징 중 사람과의 갈등 상황에서의 회피 성향이 커서 동시에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것이 불가능한 성격유형이다. 가장 부자가 될 확률이 낮다는 INPF적인 특징답게 사회적 성공보다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그 작은 우주가 내게 온 뒤 나의 중심은 아들이 되었다. 내 손으로 키우고 싶어 만 3세까지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고 매일매일 놀이터로 출근했으니 말이다. 여전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는 아들과 행복한 유년의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다. INFP유형이 타인의 감정을 잘 캐치하고 헌신적인 면이 있어 엄마로서는 꽤나 장점이 많다. 물론 아들의 사회성을 위한 친목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과거에 은근 성공에 대한 야망이 있었던 귀여운 INPF라 때로는 ENPF의 탈을 쓰기도 한다. 물론 시간제한이 있다. 길면 피곤하고 깊어지는 건 여전히 무섭다.


MBTI 성격 유성 검사의 지표마다의 의미


여보 미안해.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ㅠ.ㅠ


MBTI 유형별 지능과 행복의 상관관계




2019년 나의 재취업 원정기


어느덧 시간은 흘러 5살이 된 아들이 유치원 입학한 날, 나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아르바이트를 계획했다. 모든 육아맘이 그러하듯 하루에 4시간에서 6시간 정도의 일이라면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 알바몬이나 알바천국을 보면 일자리 자체가 귀한 데다가 시간이 너무 길거나 유동적이다. 육아맘은 출퇴근이 너무 길어서도 안되니 선택이 폭이 정말 좁았다. 물론 아이를 봐줄 사람과 시간도 맞춰야 한다. 이 지점부터가 많은 경력단절 여성들이 재취업을 포기하게 되는 지점이다. '얼마나 번다고'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재취업은 끝이다. 뿐만 아니라 30대 후반인 여자 사람이 다시 사람인이나 잡코리아를 통해 경력 없는 곳에 신입으로 돌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토익이 900이 넘고 영어회화가 가능해도, 크고 작은 경력이 있어도 나이 많은 아줌마에겐 모든 것이 그림의 떡. 이력서를 넣어도 연락도 없다. 경리도 경력 없으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내가 선택한 전공과 직업을 탓해본다. 그것뿐이다. 요즘 스펙 좋은 20대도 힘들다는 노동시장에서 경단녀의 위치는 사실 먹이사슬 저 끝, 바닥에 있으니깐. 담백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 뭐 어때?
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온걸.
해보고 싶을 걸 위해 노력했잖아.
그러면 된 거야.


공익광고에서 본 고용센터도 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도 방문해 보았지만 형식적인 절차와 구직 내용에 조금 실망했다. 멀고도 먼 재취업의 길에서 몇 번을 좌절했지만 인생에 이만한 좌절이 나만 있겠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마 지방이라 더 그런 것 같다. 며칠 밤을 여기저기 구직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동네 화장품 가게의 구인광고를 발견했다. 풀타임이라 비록 시간이 길었지만 39세 경력도 없는 아줌마에겐 이마저도 로또였으니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재취업에 성공한 경단녀가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재취업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슨 일이 되었든 시작부터 해보길 권해본다.

2019년 여름 39살에 재취업한 화장품 가게에서



문제는 아들의 행동에서 엄마의 빈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나를 닮아 예민한 구석이 있는 다섯 살 아들의 행동과 표정에서 단임 선생님과 다른 학부모가 알아차릴 만큼 불안이란 감정은 확연하게 표시가 났다. 아이의 정서는 리트머스 종이와 같아서 주양육자의 정서나 감정의 상태가 그대로 흡수가 된다. 최저시급을 받는 일도 처음엔 적응이 필요하다 보니 새로운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스케줄은 아들의 생활을 흔들어 놓았다. 유치원 갔다 와서 밥 먹고 집에 있으면 엄마가 오는데 그 몇 시간도 아들에겐 무척이나 길었나 보다. 그리고 엄마가 유치원에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아들의 말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생에 첫 수족구에 걸린 것이다. 가장 먼저 수습에 쓰이는 건 엄마의 시간. 일주일은 집에 있어야 하는 전염병엔 연차도 월차도 없는 엄마가 뭘 할 수 있을까? 예상하겠지만 나의 재취업 원정기는 그렇게 3개월 만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재취업에 집착했을까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돌봄의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은 잉여가 되는 세상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깐. 내가 전업맘이라는 포지셔닝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전업맘은 능력 없는 여자들이 하는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다. 사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우리 사회가 심어놓은 전업맘에 대한 프레임인지도 모르겠다. 전업맘은 집에서 노는 사람.

삶이란 시지프스의 형벌과 유사하다

그림자 같은 돌봄의 노동은 나를 내려놓는 수행의 길과 닮은 구석이 있다.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나는 매일 가족들이 떠나간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준비했다. 그렇게 한 명의 그림자노동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물론 신랑도 새벽 6시 30분에 집을 나서 저녁 8시가 넘어 들어오니 하루하루 전쟁일 것이다.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 역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은 아닐 테니깐. 나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했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그다음 문제였으니깐. 지금의 상황은 나의 선택이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한 가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가사에 소비하는 대신에 표시가 나는 경제활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건, 굳이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꽤나 복잡하고 특히 행복은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여전히 somebody가 되고 싶은, 그런 청춘의 마음이 남아있는 것 일까. 결핍감 때문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인생에 무엇인가 더 채워 넣고 싶은 것들이 많다.

메스로우의 욕구 5단계

물론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 우리 가정이 외벌이로 유지될 수 없음에 있다. 현재 우리 가정은 아파트 대출금을 빼고 나면 생활비가 월에 200만 원 정도인데 아들이 어려 사교육비 지출이 없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만하다.(라고 쓰고 숨만 쉬고 산다라고 읽는다.) 소득은 민감한 부분이란 생각이 들어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맞벌이를 고민하는 전업맘도 이와 비슷할 거라 생각해 공개했다. 곧 본격적인 교육이 들어가는 시점이 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 싼 곳으로 이사를 가든, 나도 돈을 벌어야 한다.





나는 행복한 고구마


긍정의 아이콘,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중에서

돌아보면 나는 늘 내가 고구마인걸 들키면 어쩌나 싶어 아등바등 살았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부모 등 모든 것을  줄을 세워 내가 어디쯤에 있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인삼을 부러워했던 거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좋은 건 이제 고구마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어쩌다 마흔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기본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한다. 당장 원하는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 재취업의 고민이 사라질 만큼 부유해질 수도 없으니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좀 더 효율적으로 집안을 관리하고 아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며 틈틈이 책도 읽고 영어공부도 하고 이렇게 새로운 딴짓을 해볼 뿐이겠지.


그럼 어때!

2020년 나는 행복한 고구마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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