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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Jan 17. 2020

돈이 없어도 자존감을 높일 수 있을까

내 삶의 방향성과 가치


시대의 벽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백석(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당시 문학 엘리트였던 백석이 그의 운명적 사랑이었던 기생 김진향을 위해 쓴 사랑고백 시이다. 양반과 기생이란 신분의 벽은 시대의 통념 상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이었고 백석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설득해 저 멀리 눈 덮인 만주로 도망가 살자하며 그 절절한 마음을 한 편의 시로 담아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지고 싶었던 단 하나. 젊은 시절 백석에겐 사랑이 그것이었나 보다.


그러나 백석의 행복을 위해 헤어짐을 선택한 김진향은 서울에서 요정의 주인이 되어 천문학적인 부를 축척한다. 그리고 평생 번 돈 전부를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라는 절을 짓는 곳에(현재 가치 1300억) 기부하였는데, 길상사가 완성된 후 한 기자가 그녀에게 기부한 그 많은 돈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평생 모은 돈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라며 남북으로 헤어져 안부조차 물을 수 없었던, 그토록 그리워했던 백석을 향한 마음을 표현했다. 자신의 유언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적은 종이를 태워 눈 오는 날에 함께 뿌려 달라고 했다고 하니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 이 시가 시대를 넘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사고 사랑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양반과 기생. 신분, 그것이 뭐라고 이 두 사람은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했을까.



시대의 프레임


100년이 지난 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재벌, 상위 10%, 중산층, 서민, 차상위 등 자본을 기준으로 한 신분제를 살아가고 있다. 가난이 부끄러운 시대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산층 혹은 서민이라는 단어 뒤로 자신을 숨기기 바쁘다. 있어빌리티란 신조어가 생길 만큼 원룸에 살아도 수입 외제차를 타고 인스타그래머블(인스타에 올릴만한)이라 불리는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공간과 소비재에 열광을 하는 시대. 사는 곳이 곧 신분이 되는 시대에서 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는 있을까.


걸래 빤 냄새? 아니 그 있잖아. 지하철 타는 사람들 그 특유의 냄새가 있어. 영화 <기생충> 중에서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가난의 냄새는 존재한다. 나는 제법 나의 가난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엔 좋은 성적으로, 직장생활 중엔 회사의 이름과 연봉으로 나의 가난을 숨겼다. 제법 그럴듯했다. 그럼에도 기택의 냄새가 박사장을 속일 수 없었던 것처럼, 나의 경우 가난의 흔적은 몸에 밴 불안이었는데 중요한 순간에 불쑥하고 나타나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늘 불안했다. 13평 주공아파트로 기억되는 유년시절은 나의 무의식에 언제나 존재했다.


나는 인정받지 못할까 봐 불안했고 성공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좋은 곳에 취업하고 나서도 인정받지 못할까 봐 나 자신을 갈아 넣었다. 돌아보니 연애에 있어서도 마지막은 늘 을의 자리에 있었다. 밀면 밀리는 대로 훅 들어가 버리는 바운더리가 없는 삶은 가난이 내게 남긴 수두자국 같은 흔적이다. 가난의 경험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그리고 주눅의 형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육감으로 파악하는 감각의 영역이라 타인을 조종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빈 틈을 놓치지 않고 하이에나처럼 파고든다. 아닌 척했지만 절대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양태오 디자이너의 인테리어를 보면 세련된 공간에 대한 경험이 녹아있다. 이것은 돈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감각만 있어서 되는 것이다. 돈과 감각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



건강한 자존감 1단계_성공의 역습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2005년 그 당시 명품 브랜드만큼 있기 있는 국내 브랜드에 여성복 디자이너로 면접을 갔던 선배의 경험담에서 입고 온 옷의 브랜드를 보기 위해 윗옷의 상표를 뒤집어 봤다는 이야기와 주소 및 부모님의 직업과 연봉까지 채용에 고려한다는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인구 10만 소도시 출신인 나에겐, 기술로 먹고사는 아버지는 내 꿈을 위해 뛰어넘어야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패션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하고 학습이 아닌 생활 속에서 몸에 익힌 세련된 취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왕이면 그런 사람을 뽑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젊고 의욕이 넘쳤던 20대의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디자이너가 일만 잘하면 되지 부모 경제력이 뭐가 중요해!" 그리고 그 분노 뒤엔 나의 가난이 있었다. 막연했지만 나는 어른의 삶에서 가난이 무엇인지, 사회가 가난을 어떻게 대하는지 조금씩 알 수 있게 되었다.


꽃무늬벽지가 너무 싫어서 내돈으로 도배하고 들어간 2013년 전세집. 우리가 돈이 없지 감각이 없나 :)


미디어가 생산한 가난에 대한 공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후 더 심하게 다가왔다. 처음 결혼하고 신혼집을 꽃무늬 벽지가 반기는 20년 된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다. 요즘 인스타에 나오는 예쁜 신혼집이며, 친구들, 조리원 동기들의 신축 아파트의 새집을 보면서 아닌 척했지만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땐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줄 회사의 명함도 없었고 무엇보다 못생김에 복리이자가 붙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멋진 커리어도, 넉넉한 통장의 잔도도, 아름다움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나타샤, 너는 누구니


한때 나는 나를 구원해 줄 나타샤가 직업적 성공이라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나를 제법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잘 맞춰가며 작은 성공들을 쌓았다. 하지만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도 그때뿐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 이름 있는 회사, 더 있어 보이는 포지션으로 욕망은 계속 진화했고 불안은 증폭되었다. 분명 나는 병들어 있었다.

영화 <8마일>의 명대사


건강한 자존감 2단계_실패의 미학(망할 권리)
건강한 자존감이란 이런게 아닐까. jtbc <양준일 91.19>중




결혼 후 고향으로 내려와 아들을 키우는 시간은 돌아보면 정말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진짜 성장은 오롯이 아이를 키우며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5년의 시간 덕분이다. 가벼운 힐링 에세이부터 철학, 과학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위로가 되었던 것은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예요."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다. 위대한 사람이 혹은 성공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나에게 “그냥 존재하면 되는 거야.”라며 말을 걸어주는 제법 진중하고 학식 있는 어른의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새로운 활자들을 채워 ‘나’로 가득 찬 머릿속을 씻어내는 동안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구해낼 수 있었다.



건강한 자존감 3단계_일상의 균형


우선순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번째로 가정에서 나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했다. 학교나 회사처럼 피드백이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기준을 만들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가사노동에매몰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주인공역할이 아니라도 맡은 이상 잘 해내겠다는 마음가짐은 자기긍정으로 이여졌다.


그리고 둘째,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아파트 헬스장에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운동으로 자리 잡는 루틴으로 만들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정말 운동은 가장 효과가 좋은 항우울제였다. 그동안 반복적으로 무너졌던 일상이 튼튼해졌다. 블로그를 이용해 인증하는 방법이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정말 아무도 보지 않는 블로그지만 스스로 하루하루 늘어가는 사진을 보면서 먼가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 운동습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록은 그 자체가 좋은 자극제인 것 같다. 자존감이 떨어져 우울하다면 체중감량 같은 목표 세우기보다 우선 몸을 움직이는 습관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보길 권해본다.



우울감은 지금의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가장 크게 다가온다고 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아침 운동은 나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자존감이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잘 나갈 때 느끼는 자기 우월성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배우며 이치를 깨닫고 직관의 힘을 키워 나의 방향성을 키워나가는 힘인 것이다.


나는 자본의 시대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백석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지금 내게 멋진 직업이 없어도, 아파트 대출금에 허덕이는 삶뿐이라도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의 전부는 아닐 테니깐. 나는 좀 더 뻔뻔하게 시대의 벽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과 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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