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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Jan 27. 2020

아픈 기억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

열등감을 마주하는 힘

고갱<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은 건강과 사랑하는 딸을 잃은 절망 속, 삶의 근원적 물음에 고뇌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Where do we come from?


새로운 생명체가 나에게 왔다. 현미경의 도움 없이는 존재감도 없던 2개의 세포가 서로 만나, 4kg의 생명체로 변신한 것이다. 지인들이 아들 딸 낳을 땐 그저 축하의 기쁜 마음뿐이었는데,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보니 그 모든 과정들이 놀랍고 신기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세포 제군들, 이제 만났으니 분열을 시작하시오.”라고 명령한 것도 아닌데 두 개의 세포가 분열을 하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각 쌍을 이룬 염색체와의 부분 교환을 통해 나도 신랑도 아닌 다른 유전자 배열을 가진 새로운 개체가 되어 10달 동안 나의 뱃속에서 스스로 뼈도 만들고 살도 만들어 완벽한 모습으로 내게 온 것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두 세포의 성장을 생각하면 소름이다.


아들이 나도 신랑도 아닌 새로운 유전자 배열을 가지게 되는 이유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인 유전자>가 고전적인 이분법적 시각으로 나를 육체와 영혼을 가진 하나의 개체가 아닌 세포의 연합으로 인식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나의 뱃속에서 아이를 키운 경험은 단순히 인식의 수준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놓았다. 순간, 모든 생명이 경의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40억 년 전 태초의 바다에서 원시세포로 시작해 서로 연합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DNA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과장해서 일종의 동지애도 생긴다.


10여년 전에 처음 읽었던 <이기적 유전자>는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유전자 운반 로봇이라는 시각은 정말 신선했다.


임신을 한 후 생명의 근원을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 닉 레인이 쓴 <미토콘드리아>를 구입하게 되었다.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닌 복합 세포 군집을 통해 다세포 생물로 진화할 수 있던 것도, 남성과 여성 같은 성의 구분도 다 미토콘드리아 덕분이다. 무엇보다 나의 몸속 에너지 생산을 담당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사실은 독립된 계체로 독자적인 DNA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바라보는 철학적 시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 과연 무엇인가?


진핵세포의 은인, 미토콘드리아의 역활 중 하나인 마이너스 전자를 만들어 에너지생산하는 과정


임신과 출산의 과정도 경의로웠지만 50cm에 3.98kg로 태어난 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인간, 호모 사피엔스로 성장하는 모습은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보통의 아이처럼 아들은 14개월이 지나서야 넘어지지 않고 잘 걷기 시작했고, 24개월쯤 되어서 세 단어 이상의 문장을 말하기 시작했으며, 30개월이 되어서야 여러 번의 이불빨래 끝에 밤기저귀를 땔 수 있었다. 현재 49개월인 아들은 한글의 세계에 빠져있다. 한글을 따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생활 속에서 하나둘씩 알아보는 글자들이 생긴 것이다. 자신의 머릿속 지식들을 서로 이리저리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루 종일 재잘거린다. 제법 자의식도 생기고 자기 취향도 생겼다. 또한 본인을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 뽀로로라고 정의도 내린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각자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한번 꺼내 보게 되는데, 이 작은 우주는 나를 삼켜 버리는 블랙홀과 같다. 두려워 열지 못 했던 나의 무의식의 문, 이젠 때가 되었다.


내의 최애 영화 <어바웃 타임> 중


우리는 무엇인가?
What are we?


아직도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집에선 5분이면 밥을 먹던 내가 다소곳하게 앉아 오물오물 천천히 친구들을 의식하며 밥을 먹고, 밥을 2 공기도 거뜬히 먹어 치우던 시절이지만 나는 핑크색 아담한 3단 보온도시락통을 들고 다녔다. 나의 첫 퍼스널 브랜딩의 역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했다. '보이는 나'와 '진짜 나'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 시점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땐, 소풍에 입고 갈 핑크색 남방과 미니스커트를 당시 핫했던 브렌따노에서 직접  산 기억도 생생하다. 학교를 가기 전에 한 시간씩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해서 엄마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도, 당시 친구들이 아동복을 입을 때, 엄마의 지인에게 물려받았던 화이트 버버리 코트를 허리가 잘록하도록 묶어 입었던 기억도 그대로다.


조커란 개인 무의식 속 그림자의 한 형태가 아닐까.


나에겐 늘 나이고 싶은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옷으로 표현되는 외형뿐만 아니라 좀 복합적인 면이 있었다. 학창 시절엔 늘 반장을 도맡아서 해야 할 만큼 리더십이 있기를 바랐었고, 장기자랑시간엔 인싸 중에 인싸를 꿈꾸었고, 나의 존재감을 세워줄 좋은 성적도 필요로 했다. 동네에선 인사를 잘하는 밝은 아이, 친구들에겐 정의가 필요한 순간,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용감한 아이가 되어야 하기도 했다. 잔다르크처럼 이상적인 성향이 강한 INPF적 성격까지 고려한다면 10대 시절 나의 세계는 꿈과 환상의 네버랜드였던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런 이상적 성향은 대학 때 그 흔한 커닝 한번 시도하지 못하는 극단적으로 이상향을 추구하는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라인 타기나 찍어 누르는 것처럼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인 관행적 행위를 받아들이지 못해 제법 고생했다. 돌아보면 10년의 시간 동안 견고하게 만들어 왔던, 제법 성공적이었던 나의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20살부터였다. 판이 달라진 것이다.


성인의 삶에서 위선은 어디서나 존재했다. 성인이 되고 마주한 세상은 마치 양자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세상처럼 기존의 단순한 뉴턴의 운동법칙인 F=ma로 설명되지 않았다. 나의 자아가 분명했던 것만큼 나의 무의식에 숨어있던 그림자 역시 크고 선명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나의 페르소나가 디디고 설 판이 좁아질수록 무의식의 속 그림자는 나의 자아를 부정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진짜 영웅이 되려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어야 하지만 나의 페르소나는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고 나는 현실에서 처절하게 실패한 패배자가 되었다. 나는 내가 그저 평범한 사람임을, 더 나아가 부족하고 형편없는 사람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을 인정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웠고 몇 번의 자기부정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철학을 과학적으로 재미있고 쉽게 알려주는 유투버 <5분 뚝딱 철학>의 김필영교수님의 칼 융을 설명한 '나는 누구인가'편에서 참조


칼 융이 분석심리학에서 말하 듯 페르소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개인의 사회적 모습이다. 나는 누구보다 멋진 가면을 소유하고 싶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능력 있고, 아름답고, 호탕하고 싶었다. 비록 나는 태생적으로 미천했지만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카이사르를 남몰래 흠모했다. 나는 왜 그렇게 완벽한 모습을 꿈꾸었을까? 그건 아마도 나의 열등감의 반증일 것이다. 건설 공사장에서 먼지 묻은 옷을 입은 아빠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순간과 몇만 원의 여유도 없어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을 쌓아두었던 기억들과 어른이 되어서도 남자 친구가 우리 동네를 몰랐으면 했던 회피의 순간까지. 사실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했었다.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원형으로 남아있는 고결한 혈통에 대한 욕망은 하나의 콤플렉스가 되어 '부모님의 직업'이나 '내가 사는 아파트' 등 나의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우리 사회에 공공연한 계급의식이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나를 지배했음을 깨달기 전까지 나는 나의 오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은 아이였던 과거의 나의 마음에도 수치심을 남겼다.


콤플렉스는  자체가 악하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페르소나에 순응하기 위해서 그림자에 붙어놓은 수치심 때문에 우리를 불편하게  이란 융의 설명은 듣기 전까지 요술 할머니의 도움으로 유리구두를 신고 무도회에 간 신데렐라처럼 나를 숨기기 바빴다. 정신을 놓고 파티를 즐기는 순간 12시가 되어 마법이 사라져 나의 정체가 드러날 것 같은 불안감은 내 삶 속 여기저기에 존재했다.


<왕좌의 게임> 티리온 라니스터처럼 자신의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나면  이상 그것은 콤플렉스가 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열등감 때문에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마흔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직한 노동으로 가정을 지켜내신 부모님의 노고가 보였다.



<왕자의 게임>의 매력 덩어리 '티리온 라니스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are we going?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유발 하라리가 쓴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간의 성공은 언어를 통한 집단 상상력 덕분이라고 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우리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일 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는 것만 보아도 그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우주적 관점에서 먼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인간이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인 것이다. 결국 무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집단이 공유하는 상상적 가치인 성공, , 명예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바라볼   있고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를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로 겸손하게 바라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각자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한다.


나는 나의 페르소나를 가장 나답게 쓰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투명해서 매 순간 진실한 나 자신(self)이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아닌 것을 연기하는 것엔 많은 내적 에너지가 사용되고, 그렇게 힘을 분산시키고 나면 나는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내가 믿는 것과 반대의 경험이 많아지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바꾸거나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무의식은 나의 의식보다 더 영리하고 재빠르다. 건강한 삶의 기본이 되는 자아존중감은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자신을 긍정할  있는 시간의 중첩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자. 당신이 누구든 나는 당신을 응원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보통의 존재이니깐.



내 마음속 명작 <눈이 부시게>의 두 주인공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 낯 꿈에 불과한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눈이 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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