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체계로서의 재화
어린 나는 왜 아버지의 1톤 트럭이 부끄러웠을까.
학창 시절 나는 ‘1톤 트럭’이 가진 표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1톤 트럭은 단순한 이동수단이나 경제수단이 아닌 내가 속한 사회계층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표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타인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버지의 차에서 내리던 10대 소녀가 느낀 하차감은 스스로가 만든 내면의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소유한 물건을 통해 차별을 받거나 등급이 나누어진 경험을 해본 적이 있지 않던가. 돈 때문에 내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열등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준 고통의 에너지가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 모멘텀인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라는 생각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거부의 경험은 성장 후에도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아이들의 자아상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한동안 나에게 가장 민감한 주제는 사회 계층(Social class)이었다. 상위층, 중산층, 노동자계층이라는 단어는 개인이 태어남과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낙인과 같다. 아이 육아를 위한 대부분의 글에선 계층을 구분 짓는 단어가 등장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은 막내딸에 대한 로망은 우리 모두의 판타지다. 이런 종류의 글을 읽을 때면 묘한 반발심과 수치심으로 마음이 출렁거렸다.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어난다는 것은 위험을 인지했다는 것이고 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의 기저에는 차별과 구별짓기가 있었다. 20대 시절 내가 가진 불안 중 한 가지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왜냐하면 결혼정보회사의 기준으로 나는 최하위등급에 속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말할지 못했지만 괜찮은 사람과 결혼이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내면 깊숙이 존재했었다. 자본에 대한 서열과 더불어 결정사의 등급도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계층도식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이미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소유한 자들뿐이다. 21세기의 토템은 자본이 아니던가.
정보 시스템으로서의 상품
(Goods as an information system)
상품은 단순히 물리적 형태를 넘어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고 상호작용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는 소비자, 생산자, 그리고 시장의 다른 참여자들 간에 정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며 자본주의사회에서 내가 소비하는 물건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식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비교자극으로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적절한 위장은 심리적 에너지 손실을 막아주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국방비로 치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멋진 자동차가 될 수도 있고 명품가방이 될 수도 있고 비싼 학위가 될 수도 있다. 요컨대 나의 심리적 에너지 누수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에 쓰는 소비라 말할 수 있다. 무소유가 득도의 마지막 단계라면 소유의 단계에서 무소유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유의 과정에서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균형감의 필요하다. 왜냐하면 첫째 인내심과 같은 심리에너지엔 총량이 있고, 둘째 심리적 에너지 누수가 발생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욱 빠르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이나 안전과 같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 충족과 더불어 사회적 지위나 소속감과 같은 심리적 욕구와 만족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다. 때문에 우리는 소비를 단순한 경제 활동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행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표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토템적 가치를 가진 소비를 파악하는 능력이야 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꼭 익혀야 할 새로운 형태의 감각이 아닐까 한다.
사실 감정이 촉발하는 순간, 그 감정의 출처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울감을 자극하는 영상 시청만으로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소비지출이 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뇌는 알로스테스시를 위해 일정한 균형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때문에 감정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장 손쉬운 방법인 소비를 통해 부족한 마음을 채우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당신의 디올드레스는 무엇입니까?
시카고대학교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퓰리처상 수상작인 <미국인: 민주주의 경험>에서 백화점의 등장과 호화로운 상품의 진열이 대중에게 ‘사치의 민주화’를 가져다준 최초의 사례로 손꼽았다. 또한 베블런은 인간은 남들과 어울리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대개 사회적 구성물에 의해서 실현된다고 했다. 소비 중에는 지위나 사회경제적 위치를 드러내는 소비가 있기에 우리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에는 출처가 있다. 이것을 단순히 개인의 가치기준의 문제 혹은 미성숙함으로 보아서는 진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의식 속의 나’도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후배가 친구결혼식에 다녀온 후 자신만 명품가방이 없다는 사실에 감정의 동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서른이 넘어 남들 다 가진 명품가방 하나 없는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졌다는 솔직한 속마음을 단순한 미성숙함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한 마음이 들 때면 마음의 출처를 더욱 살펴봐야 한다. 입바른 소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욕망에는 출처가 있다. 그것을 인수분해해 보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소비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내가 가진 돈보다 비싸고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지만 진짜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영화 ‘미세스 해리스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 해리스가 꿈꾸는 디올의 드레스처럼 말이다. 가정부인 그녀에게 디올 드레스란 누군가에겐 사치로 누군가에겐 허황된 꿈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자신의 마음속 디올 드레스를 잘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필요한 순간 적절하게 국방비를 집행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사회적 생존일지라도 생존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보 체계로서의 재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