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과 촉을 믿어라.
아마도 지금 L양은 귀신에게 홀린듯한 느낌일 거다. 분명 며칠 전까지 다 넘어온 듯 보였는데... 그때 이렇게 하는 걸 보면 분명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확 달라지는 썸남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뭐가 문제인지도 알 수 없을 거다. 이유는 하나다. "그가 바람둥이이기 때문이다."
그 오빠에게는 안 좋은 소문이 좀 있었어요. '얼굴은 그렇게 잘생기지 않았는데 엄청 예쁜 여자들도 오빠를 좋아하더라', '여자 친구가 많이 바뀌는데 연락도 잘 안 하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다.', "스킨십을 거부감 들지 않게 자연스럽게 한다" 등이요... 그러다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조금 경계했지만 들은 것만큼 나쁜 남자인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나도 소싯적에는 사람을 대할 때 선입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80% 이상의 확률로 소문과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촉이 대부분 맞더라. 특히나 연애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인들이 "쟤는 좀 바람둥이 스타일이래!"라고 말하는 스타일 든 98% 이상 바람둥이라고 보면 된다.
괜히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아니다. 다 아궁이에 땔감을 넣고 불을 때니까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거다. 이렇게 바람둥이는 당신의 눈에 띄기 전이는 후든 소문이나 첫인상을 통해 바람둥이임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고 다닌다. 하지만 L양의 경우처럼 "생각보다 나쁜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라는 자기합리화 덕분에 안정적인 연애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L양의 첫 번째 실수는 분명 처음 본 L양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작업을 하는 썸남을 보고 분명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군?"하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래도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하고 자기합리화에 빠져버린 것이다. 만약 L양이 썸남을 알고 있었던 3자였다면 분명 썸남의 행동을 보며 "에고... 또 시작이네..."했을 것이다. 하지만 썸남에게 호감을 느낀 L양은 작업을 매너로 분류하며 자기합리화에 빠져버린 거다.
저는 살짝씩 철벽을 쳐주면서 동시에 제 가치를 높이고 오빠의 가치를 깎는 대화를 했어요. 그러다가 모임이 끝나고 오빠가 저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번호를 교환했고 그렇게 오빠에게 먼저 연락이 와서 연락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너도 모르게 썸을 타고 있더라고요.
일단 L양의 전략은 좋다. 쉬운 여자가 아님을 어필하면서 초장에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기본에 충실한 전략이다. 다만 L양의 전략은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한 전략일 뿐 이런 전략은 바람둥이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만약 L양이 흔남을 만났다면 L양의 까칠한 태도에 기선을 제압당하겠지만 바람둥이 L양의 전략이 눈에는 다 보이기 때문이다.
L양은 철벽을 치고 L양의 가치를 높이고 오빠의 가치를 깎는 대화를 했다지만 결국은 철벽히다 대화를 꾸준히 나눈 것이고, 집에 데려다준다니까 좋다고 하고, 번호 달라니까 번호 주고... L양이 뭘 했든 썸남 입장에서는 그린라이트가 연속으로 켜져 보일 수밖에...
주변 지인들 사이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L양은 "난 다른 여자들과는 달라!"라며 전략을 폈겠지만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남자를 대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L양처럼 하기 마련이다. 차라리 까칠하게 할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응대해주되 중간중간 말을 끊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집에 바래다준다는 건 거절하고, 번호교환은 "아빠가 모르는 남자한테 번호 주지 말래요!"하고 거절하는 편이 썸남 입장에서는 "어라? 요고 봐라~?"했을 거다.
어차피 산전수전 다 겪어본 남자다. L양 썸남 앞에서 뭘 해도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썸남은 L양의 얼굴에서 이미 자신에게 호감이 있음을 다 읽고 있기 때문이다. 호감이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건 나보다 연애 못하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전략이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를 만나 틈만 나면 클린치를 한 것처럼 괜히 아닌 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들이대며 가까이 붙고 상대가 원하는 것만 딱딱 차단하는 쪽이 바람둥이 입장에서는 더 상대하기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처음에는 아픈와중에도 저 보러 오기도 하고 연락도 먼저 하고 했었는데 일주일쯤 되고 나서는 갑자기 연락이 뜸하더라고요. 갑자기 말투도 불친절하게 바뀌고... 저는 애가 타긴커녕 짜증이 나더라고요... 그러다 지난주에 친구랑 술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 와서 술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어쩌다 술에 취해 오빠네서 잤어요;;; 다행히 정신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스킨십은 못하게 했고요.
바람둥이가 잘하는 이유는 진심이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해야 여자들이 넘어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감기 때문에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도 만나러 나오는 모습에 L양이 감동한 듯 보이지만 중요한 건 일주일 만에 태도가 돌변할 정도로 기복이 심하다는 거다. 이 말은 곧 썸남의 호감 표현들이 진심이 아닌 전략이었음을 말해준다.
L양이 자신을 "저는 객관적인 가치가 높은 편이에요. 평소 매력 있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인기도 많아요"라고 소개한 걸 보면 L양도 그 바닥에서는 한가닥 한다는 건 잘 알겠다. 물론 바람둥이도 사람이다 보니 언젠간 사랑에 빠지고 결혼도 하겠지만 지금 L양에게 하는 행동을 봐서는 썸남에게 있어서 L양은 같이 놀만한 여자 정도의 포지션임을 인정하자.
L양아, 바람둥이는 잡는 게 아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지금 뭘 한다고 썸남이 "어맛... L양의 남자가 되려면 어떡해야 할까? ㅠ_ㅠ"하는 게 아니다. 현재의 최선은 현실을 받아들이되, 재미있고 매력 있는 오빠 하나 생겼다 생각하고 편하게 같이 즐기는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하는 거다. (뭔가 즐긴다는 표현이 좀 거시기 한데... 므흣한 의미 말고 서로 썸이나 좀 타면서 달달하게 뭐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