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을 통해 상대에게 알려줘야 한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경험하던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보게 되면 그전까지 자기가 속해있던 세상을 낡은 것 그리고 좁은 것 그래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느끼곤 한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발현이 되면 지금 보다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우울감에 빠지곤 한다. 만약 상대가 이런 상태라면 약은 무관심이다. 무관심을 통해 상대에게 알려줘야 한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넌 떠날 수 있어!"라고 말이다.
제 남자 친구는 애정표현도 넘칠 정도로 잘해주는 데다 연락도 잘해주는 편이라 여태껏 싸울 일이 거의 없었어요. 가끔 다른 사고방식으로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저와 남자 친구 둘 다 타인에게 관용적인 편이라 서로 이해하며 잘 넘어갔어요. 문제는 남자 친구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다녀오면서부터였어요. 가기 전부터 앞으로 거의 한 달가량 연락도 잘 안될 텐데... 걱정하던 남자 친구였는데... 다녀오고 나서부터 뭔가 저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사라졌다고 할까요? 여행을 다녀온 지 이주가 지나가고 있는데도 아직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만 얘길 하고 다른 얘기를 할 땐 기운이 없어 보이네요. 저와의 데이트는 뭔가 의무적인 느낌이면서 친구들하고 있을 때에는 또 엄청 기분 좋아 보이고요... 연애 초기의 행동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한 달 여행 다녀와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듯한 남자 친구의 행동이 너무 힘드네요. 대체 남자 친구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리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M양에게 필요한 건 시간과 남자 친구에 대한 무관심이다. 지금 남자 친구의 머릿속엔 세상 복잡한 것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빨리 이뤄야 한다는 막연한 조급증이 난 상태이다.
M양의 사연을 듣고 있자니 몇 해 전 처음으로 혼자 도쿄 여행에 나섰을 때가 생각났다. 당시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에 심취해 있을 때였고 낮에는 도쿄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시간엔 어김없이 도쿄타워에 올라 레인보우 브릿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온갖 생각에 잠겼었다. "왜 그동안 그렇게 나태했었나!", "내 꿈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등등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생각과 다짐들을 그땐 마치 출사표를 쓰는 제갈공명의 마음으로 잘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전의 내 모든 것은 하찮아졌다. 그리고 빨리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막연한 조급증에 시달리고 일본에서 느꼈던 벅찬 생각과 다짐들을 떠올리며 한없이 우울함에 빠졌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애는 뒷전이 되고 막상 하는 일은 없는 막연한 우울감에 빠져있는 나날들이었다. 다만 모순적이게도 친구는 예전보다 더 많이 만나며 도쿄에서 느꼈던 것과 다짐했던 것들을 늘어놓으며 술에 취하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나의 상태는 꼴랑 혼자 도쿄 좀 다녀왔다고 세상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의 코스프레를 하는... 중2병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M양의 남자 친구도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몇 해 전의 나의 상태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니고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니, 그 길을 걸으며 깨달음도 얻겠지만 그것이 지나쳐 오만한 생각에 심취해 있는 거다.
M양이 남자 친구의 그러한 변화를 진 지하가 받아들이고 뭔가 서운해하거나 변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길 하면 남자 친구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기는 어마어마한 꿈 때문에 괴로운데 여자 친구는 작은 일로 시비를 건다고 생각하며 마치 발목이 잡힌듯한 느낌만 받을 것이다.
그러니 괜한 걱정을 하지 말고 당분간은 남자 친구가 중2병의 환상 속에서 마음껏 괴로워하고 고민하도록 그냥 두도록 하자. 중2병에는 시간이 약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