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그들의 정체는 뭘까?
몇 해 전부터 ‘연애계’에 신인류가 출현했다. 연애에 그다지 관심 이 없는 남자. 본능을 역행하는 이 남자들은 가끔 “외롭다”거나 “결혼하고 싶다” 같은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정작 주변에 있는 괜 찮은 여자들을 소 닭 보듯 한다. 대체 그들의 정체는 뭘까?
패션 마케터로 일하는 P는 내가 주최하는 파티에서 알게 된 형이 다. 배우 이종석을 닮은 깔끔하고 샤프한 외모와 187cm의 훤칠 한 키를 자랑하는 30대 중반인 이 남자는 여자가 좋아할 만한 요 소를 웬만큼 다 갖췄다. 그가 파티에 떴다 하면 모든 여자의 시선 이 그에게 꽂힌다. 그래서 주변에 늘 이성이 넘치지만 신기하게도 그는 항상 남자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눈다. 다가가서 들어보면 시 계, 자동차 얘기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괜찮은 여자들이 아까부 터 형만 바라보고 있다”라고 귀띔해주면 심드렁한 답만 돌아와 다. “경쟁자가 너무 많아.” “난 너랑 얘기하는 게 더 재미있는데?” 들을수록 커져가는 의심. 혹시 이 형… 남다른 ‘성적 지향점’을 가 진 사람인가? 의혹이 커질 무렵, 드디어 P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 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가 봐도 ‘선남선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파티에서 P에게 관 심을 보인 무수한 여자를 ‘압도’하는 미모는 아니었다. 그녀가 조 금 다른 게 있다면 P처럼 이성이나 연애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한 눈빛과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둘의 연애를 가만히 지켜보면 뭔 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연애의 일반적인 패턴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뜨겁게 싸우고, 격렬하게 화해했다 가 하나가 되는 감정의 결합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온도부터 달랐 다. 지구와 달처럼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느낌이랄까? 함께 있기보다는 서로의 곁에 존재하는 연인에 가까웠다.
가까이에서 두 사람의 연애를 지켜보며 호기심이 생겼다. 누가 봐 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미모를 지닌 여성이 적극적으로 어필해도 늘 연애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던 이 ‘철벽남’은 어떻게 어느 날 갑자기 마치 늘 해왔던 것처럼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P의 여자 친구는 그 철옹성 같은 남자를 어떻게 별다른 유혹도, 적극적인 어필도 없이 사로잡았을까? 그냥 P의 취향이 편협하거나 까다로웠던 걸까? 어쩌면 둘의 연애 패턴이 좀 더 진화한 연애 방식이 아닐까라는 생 각도 들었다.
대개 남녀가 연애를 할 때는 원하는 상대를 유혹하 고 상대를 내게 맞추는 데에 집중하며 자기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P와 그의 여자 친구는 연애 상대나 연애 자체에 쏟는 에너지를 자 기 자신에게 쓰는 케이스였다. 상대와 맞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맞춰가는 데 힘을 쓰기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서로의 취향이나 개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함께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둘이 연애에 큰 관심이 없거나 서로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그냥 상대와 빨리 가까워지고 싶다거나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는 등의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하 지 않을 뿐이다.
당신 주변에 혹시 P 같은 남자가 있나? 매력은 넘치지만 연애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를 유혹하려고 기를 쓰거나 속 끓이지 말길 권한다. 대신 그에 게 쏟는 신경을,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쏟아부었던 에너지를 자신 에게 써보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남 자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길 원하 는 경우가 많다. 조금 답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유혹하 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려들던 여자들이 혜성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 나갈 때, 당신은 승자가 돼 그의 곁에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남’ 대신 스스로에게 쏟아부은 관심과 에너지는 당신 자신을 그 ‘난공 불락의 P’처럼 돋보이게 해줄 것이다.
-코즈모폴리턴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