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의 휴가

열네 번째 이야기 - 아버지가 쓰는 글

나는 목사다. 목사는 그가 믿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지만, 목사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지난 1999년, 독일에 선교사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단 한 번도 꿈꾸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선교요 독일이었지만, 명령이었기에 순종해서 독일로 갔다. 문제는 가족들이었다. 특히 자녀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민감한 나이에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외국, 그것도 생소하기만 한 독일에서 살아야 했다.


독일이 낯선 것은 아이들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로 공부해야 하는데 나는 무조건 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독일 학교를, 그것도 독일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김나지움에 아이들을 덜컥 입학을 시켰다. 사실 아이들의 나이가 4, 5년만 어렸어도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언어 기능이 굳어지기 시작한 나이였기에 아이들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김나지움에 가서 하루아침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방과 후에 따로 독일어 과외를 시키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독일 수업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겉돌았고, 급기야는 진한 향수병에 걸렸다.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부모 역시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독일 문화와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아이들을 돕는다는 것도 무망 한 일이었다. 거기에 사춘기까지 겹쳐서 아이들은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선함과 착함, 믿음이 있었기에 힘이 들고 갈등할지언정 가정과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이들이 심각하게 나에게 말을 했다. 거리에서 한글 간판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 현실에 대한 도피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 한 아이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모를 호출했다. 학교에 가니 아이가 학교에 무단결석한 날이 많은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물으니 한국에 가고 싶어 공항에 가서 하염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기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아이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한국을 떠난 지 6년 만에 전 가족이 함께 한국에 휴가차 가게 되었다.


나나 아내는 일 때문에 1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 왔지만, 아이들은 무려 6년 만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국에 가게 된 것이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선교사 형편이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들은 많이 들떴다. 나 역시 비행하는 내내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한국 가서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보고 싶었던 한글 간판 많이 보라고 권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해서 어머니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서울 시내 곳곳을 마치 외국인마냥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제주도에 갔다. 그러나 그토록 바랬던 한국으로의 휴가는 휴가 내내 삐걱거렸다. 아이들이 마침 가장 심한 사춘기 때였고, 그렇게 오랜 시간 24시간을 내내 함께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좋았다. 그런 다툼이 있었기에 그것을 해소하려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비로소 부모는 아이들을, 아이들은 부모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휴가는 시끌벅적했지만, 불끈불끈했지만, 마음에 많은 것들을 풀어주는 진짜 휴가가 되었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휴가철이 되면 자기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가기도 한다. 그들의 휴가가 진정한 그들의 쉼이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ChatGPT Image 2025년 8월 2일 오전 08_50_03.png 온 가족이 제주도에 놀러온 풍경을 AI로 그렸다.


작가의 이전글쉼을 얻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