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 아버지가 쓰는 글

오늘은 대한. 대한답게 영하 13도를 오르내린다. 그런가 하면 딸아이가 사는 춘천은 영하 14도, 아들아이가 사는 파주는 영하 15도이다. 정말 감사한 것은 바깥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집안에만 있으면 그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따뜻한 난방이 얼어붙은 수은주를 녹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급강하한 기온을 보면서 문득 내 인생에서 가장 추운 날이 언제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장 추웠던 날은 초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아직 학교가 겨울방학을 하지 않아 학교를 갔다가 집에 왔는데 날이 얼마나 추운지 손과 발이 다 얼어버렸다.


너무 추워서 급히 엄마를 찼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고 방문을 열었는데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만 나는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날씨 때문인지, 엄마의 부재 때문인지 그렇게 울었던 9살 겨울이 가장 추웠던 나의 겨울이다.


사실 겨울은 추워야 겨울이다. 만일 겨울이 춥지 않다면 그게 겨울이겠는가. 겨울이 추워야 봄이 더 봄다워지는 것이고, 여름이 더욱 찬란한 법이리라. 우리나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이기에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차림도, 먹는 음식도,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처럼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변화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는 변화에 적응하는 유전자가 장착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남극에도, 아프리카에도, 지구촌 어느 오지에 가도 한국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잘 적응하며 산다. 이렇게 변화에 적응하며 사는 것은 우리네 삶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인생도 항상 봄일 수 없고, 언제나 무성한 여름일 수 없다. 당연히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가을만일 수도 없고, 삶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각자에게 찾아온다. 문제는 봄날이든, 가을날이든, 그 시기에 잘 적응하고,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봄인데 너무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고 있어도 안 될 것이고, 이제 스산해지는 늦가을인데도 여름처럼 반소매를 입고 있으면 몸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봄은 봄답게, 여름은 여름답게, 가을은 가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사는 것, 이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딸아이가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아직 그렇게 추운 겨울을 맞지 않아도 되는데 삶의 변화를 우리가 주도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매서운 겨울 북풍을 맞은 아이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그저 메마른 안부 전화를 하는 것밖에 없다. 내가 입을 외투를 벗어주고 싶어도 맞지도 않을뿐더러 추울 때는 추운 것이 낫다는 바람에 옷을 벗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말 감사한 것은 그렇게 매서운 겨울 북풍이 불어도 옷깃을 꼭 여미고,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으니 대견할 따름이다. 나이가 40이 되어도 아직 어린 줄 알았는데, 나이 40 답게 흔들리지 않게 서 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겨울도 끝난다는 것이다.


인생의 어느 계절이 그러하듯, 딸아이의 겨울도 끝나고, 우리 가족의 겨울도 끝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안달하지 않아도, 왜 이리 봄이 늦냐고 짜증 내지 않아도 딸의 봄은 우리의 봄은 자기 속도대로 조용히, 은밀하게 찾아와 냉정한 이별의 얼음을 녹게 하고, 슬픔의 눈물을 닦아내며, 움을 틔우고, 마침내 꽃이 피게 할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대한 추위를 견디며, 다가올 봄을 기대한다. 가족들이 꽃피는 봄날에 꽃비를 함박 맞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아직은 대한. 조금 더 추위를 참아내야 하리라. 이것저것 풀어야 내야 할 실타래도 있을 것이고, 열받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순리대로 하나님의 법대로 넉넉한 품으로 안는다면 모든 것은 다 풀어지리라. 겨울은 반드시 끝이 있고, 봄은 분명히 온다.


사계절의 숲을 AI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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