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 아들이 쓰는 글
어렸을 적 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1997년 10월부터 1998년 4월까지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다. 처음 친구의 추천으로 책을 읽었을 때가 2000년이었으니, 당시 이런 류의 소설을 접하기가 어려웠던 환경에서는 가히 늦은 시점이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에 이 소설 중 일부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라이트 노벨의 시조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치고는 꽤나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할 때가 중학교 1학년 나이쯤이었다. 그때 이미 독일에서 살고 있던 터라, 수준 높은 문학책이든, 재미만 추구하는 라이트 노벨이든 한국어 책을 구하기 어려웠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편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바라던 것은 명확하였다. 인류의 지혜를 모아 깊은 인문학적 깨달음을 주는 고전보다는 오늘의 괴로움을 잊을만한 흥미 위주의 라이트 노벨을 선호했던 것 같다.
이 드래곤 라자의 내용 역시 당시에 내 심정을 단단히 지지해 주었다. 네트발이라는 한 시골 소년, 양초를 만드는 수련공이었던 그가, 블랙 드래곤 아무타르트 원정군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수도로 가는 일행에 동참하게 되었고, OPT(오우거 파워 건틀릿)라는 장갑을 착용하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적들과 싸워 이기며, 평생에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마주하고, 가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땅을 밟아가는 이야기였다.
나와 같은 어린 소년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힘을 얻고, 모험을 떠나며, 자신에게 익숙한 땅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이제 청소년기에 들어선 어린 내게 퍽이나 매력이 있었다. 얼마나 재밌던지, 여러 번을 읽고, 이후 이런 장르 문학 소설들을 찾아 읽었다. 우리나라 장르문학의 시조새정도 될만한 퇴마록, 가즈나이트 등을 시작으로 지난 26년간 셀 수 없는 작품을 탐식하였다. 그 열심히 통했던지 인터넷을 통해 이런 장르문학을 접할 수 있는 연재 사이트, 문*아, 조아*등을 방문하게 되었고, 마치 내 집 안방마냥 매일 그곳을 방문하며 작품을 읽으며 보내었다.
그렇다고 고전문학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후 몇 번이나 이런 가벼움을 끊어내고 묵직함을 얻고자 고전문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았지만, 순간을 잊고자 하는 내게 묵직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고전문학은 깊어도 너무 깊었고,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내 이름에 ‘중’ 자가 무거울 중(重) 자가 아니라, 가운데 중(中) 자여서인지, 체격과 비율을 맞추고자 했던 본능 때문인지, 자꾸만 라이트 노벨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후 스마트 폰이 나오면서 이런 소설을 접하는 것이 훨씬 간단해지고 편해지게 되었고, 덩달아 스스로 자신의 먹을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 많은 돈을 뿌려가며 한 날에 괴로움을 잊기 위해 소설을 읽어댔다. 그렇게 가벼움, 라이트 노벨, 장르문학과 함께 26년이 지났다. 옛적에는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면 어른들의 잔소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런 압박 때문에 중간 1, 2년 정도 읽지 않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요새 장르문학의 위상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많은 웹툰, 영화, 드라마, 심지어 엔터테이닝 쇼까지 웹소설의 기반을 두고 있다. 그뿐만인가, 인기 있다고 하는 작품들은 수억뷰를 기록할 만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웹소설을 읽는다. 지난 수십 년을 장르문학과 함께 했던 나로서는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다.
이런 장르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구원자의 존재이다. 이런 구원자의 모습, 소설 속의 구원자가 등장하는 방식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구원자 역할을 비교하며 논문을 쓰고자 했을 정도로, 나는 이런 소설류의 진심이다. 이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열해 본다면 가장 앞에 있는 요소는 ‘재미’이다. 쉽고 간결한 문장, 무지막지한 주인공의 능력, 전 세계에 중심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흔적들이 내게 재미를, 나아가 쾌감을 느끼게 한다.
한 문장을 이야기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과 주저함을 이겨내야 하는 타국에서 살아가던 이방인으로써는 이런 쾌감이 갑갑한 일상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의,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수도 있으리라. 인생의 문제를 유쾌히 이겨내는 주인공, 일말의 즐거움을 찾아 문제에서 도망쳐 이야기 뒤에 숨는 내 연약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장르문학을 읽는다. 더는 도망갈 수 없음을, 소설과는 달리 인생은 고달픔의 연속임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알지만, 잠시의 안락함을 유리하고자 장르 문학을 찾는다. 처음 이를 접했을 때와 전혀 다른 환경이지만, 그 품은 마음에는 격차가 있지 않다. 언젠가 다가올 인생의 봄날을 향해 달려가며 거친 숨을 잠재우고자 시선을 돌린다.
어쩌면 이미 봄날이 왔는지 모른다. 내 눈에 담기지 못할 뿐, 세상 저너머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시는 분만 아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