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 아들이 쓰는 글
얼마 전 승부라는 영화를 보았다. 바둑을 잘 모르는 나였지만 그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스승 조훈현 9단과 제자 이창호 9단의 이야기였다.
1989년 9월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여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 조훈현 9단은 불과 5개월 후인 1990년 2월에 자신의 제자였던 이창호 4단에게 패배하게 된다.
그의 패배는 어이없는 실수가 아니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제자 이창호의 승리는 스승 조훈현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패배의 수렁에 빠지게 만든다. 스승도 어버이다, 여기던 시절인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지 가르치던 시대인데 제자가 스승을 이겼으니, 스승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스승이 제자에게 그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더 이상 그 길을 인도할 수 없다는 좌절감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길마저 잃어버린 막막함이 조훈현 9단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훈현 9단은 절치부심하여 체력을 단련하였고 바둑을 공부하였으며 밑에서부터 위로 한 계단 한 계단 느리지만 단단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올라갔다. 조훈현 9단은 이 과정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후 밝혔다. 자신도 질 수 있는 사람임을, 자신도 보완해야 할 점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내게 큰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나비가 고치를 찢고 나오듯,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처럼 내비쳤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는 진정한 스승이다. 이창호 9단에게, 조훈현 9단 자신에게도.
나에게는 어떤 스승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스승이란 누군가를 가르쳐서 그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학창 시절에도 하물며 지금도 내게 뚜렷이 그 길을 인도해 주었다, 말할이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는 내게 큰 괴로움이다. 홀로 그 길을 결정하는 것. 누군가가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실패하기 두려워하는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스승을 두어 언제든 명쾌히 내 길을 인도해 주기를 바라보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걸어가야 할 몫이라, 누구라도 조언을 아끼곤 한다.
‘삼인행 필유아사언’이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한 사람이 나이고 한 사람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며 한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는 그의 좋지 못한 점을 통해 나의 나쁜 점을 고쳐야 하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서 그의 좋은 점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볼 때 언제나 내가 보고 배울 부분이 있으니 언제든 어디서든 배우려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공자의 가르침이든 조훈현 9단의 깨달음이든 배움에 중심에는 내가 있다. 무언가를 보고 배우며 깨닫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다. 그게 말이든 행동이었든, 타자를 통해서 나를 비추어 보고 그의 단점과 장점을 통해 나의 단점과 장점을 깨달아 더욱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가장 좋은 스승이란 결국 나 자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