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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Sep 19. 2021

의외의 순간

시간이 지난 후


첫째 아이에 대해서는 지금이 육아 여정의 어디쯤인지 알 수 없어서 하루하루가 챌린지였고 그냥 마냥 힘들기만 했던 것 같다. 엄마 인생 만 4년 차인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둘째 아이는 듣던 대로 참 예쁘고, 이 작은 사람이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심어주기 위해 찾아온 건가 싶을 만큼 세상 환한 미소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그런데도 이 작은 사람의 비예측성, 그리고 내가 내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금이 때로는 갑갑하게 느껴진다. 육아만 그런 것도 아니다. 회사 다닐 때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더 없다. 그러면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는 내 삶은 어디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이기적인 편이어서 이런 헌신이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길을 이미 앞서 걸어간 어른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신다. 먹고살기 바쁘고 힘들었지만 애들 키울 때가 가장 좋았다고. 나는 출산에서부터 시작된 지금의 육아 집중기 시간을 과연 그리워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자신의 곁을 기꺼이 나에게 내어주고, 나는 그 곁에서 한 인간이 성큼성큼 자라는 것을 경이롭게 목격할 수 있는 이 시기. 하지만 아이들의 엄마로서 말고 그냥 내 인생으로서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이 시기. 과연 그리울까. 지금 이 시점으로 시계를 돌리고 싶은 날이 과연 올까.




지나 보면 의외의 순간이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나에게는 2019년 겨울, 코로나 시대가 열리기 직전에 다녀온 스코틀랜드 가족여행 중 크리스마스날의 기억이 그러하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를 물씬 느껴보고 싶다는 남편의 기획 의도에 따라 우리는 크리스마스 당일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떠났다. 하지만 여러 도시를 거쳐 크리스마스 당일에 도착한 인버네스는 예상과 달리 무척 스산한 분위기였다. 실망감을 누르고 분위기를 살려보고자 근사한 만찬을 해 먹으리라 단단히 장을 봤다. 그런데 만찬이고 뭐고 우리는 모두 낮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일어나버린 것이다. 이번 여행의 정점이라고 기대하고 온 그 크리스마스가 이미 지나가 버린 상황.


흘러가 버린 시간을 잡을 길 없어 TV 리모컨이라도 잡았다. 그냥 소파에 널브러져 TV 채널을 돌렸다. 모두 큰 내색은 안 했으나 나처럼 적잖이 실망스러워 울컥했을 것이다. 적어도 내 마음은 그랬다. 그래도 에어비앤비 주인이 마련해놓은 크리스마스트리의 알알이 빛나는 불빛 속에서 콜드플레이(Coldplay)의 BBC 라이브 공연을 보며 애써 따뜻하게 그날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흘러 남편과 내가 그 스코틀랜드 여행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장면은 바로 그날 밤이다. 밤하늘에 쏟아지던 근사한 별들도, 무척 좋았던 스카이섬의 매력적인 황량함도, 엉망진창이었던 크리스마스 그날 밤 기억을 앞서지 못한다. 실망스러운 아쉬움으로 가득한 순간이었는데 지나 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다. 함께 한 그 공간에 내려앉은 낯선 방의 조명, 그곳을 채운 콜드플레이의 음악, 까슬까슬한 패브릭 소파의 감촉, 먼 이국 땅 겨울의 차가운 밤공기. 콜드플레이 보컬 크리스 마틴의 타투와 피아노 각인을 보며 남편과 나눴던 대화들도 떠오른다. 별거 없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실은 특별했다.


지나보니 특별했던 인버네스에서의 크리스마스 밤




마스크를  반쪽 얼굴로 살아야 했고,  시간에 대한 자유를 일부 양보해야 했으며, 가벼운 외출조차 두려운 지금의 일상도 실은 보석처럼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까. 어쩌면 의외의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만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니 한여름의 나무 그림자에서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빛이 나는지 감탄할  있었다.  스크린 앞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소박한 일상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그리워할  있었다. 시간이 지난 , 의외의 순간에 발견한 당연한 가치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시간들이 흘러 아이들에게 들려줄 후일담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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