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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Oct 29. 2021

우리가 우리가 되는 동안

결혼 5주년 편지


명랑한 나의 남편, 힘찬찬에게.


십수 년을 같이 산 것 같은데 왜 결혼한지 5년밖에 되지 않은 걸까요. 불과 '5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둘이 마주 앉아 자주 술잔을 기울이던 신혼부부가 이제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희로애락의 에피소드가 한가득이네요.


언젠가 글쓰기 모임 멤버들과 '재미있는 일화'에 대해 써보기로 한 적이 있어요. 근 5년간 나에게 일어난 정말 정말 웃긴 에피소드가 뭐였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초보 육아와 회사 생활의 힘들었던 기억들만 찰랑거렸어요. 그러던 찰나에 당신이 떠올랐지요. 자신 없는 표정으로 출산 가방을 챙겨 온 당신의 얼굴이요.


우리는 두 아이 모두 35주에 갑작스러운 양수 파열로 조산을 했지요. 태평하게 만사를 즐기던 우리에게 출산 가방 따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어요. 양수가 터진 나는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있고, 어쩔 수 없이 당신 혼자서 급하게 출산 가방을 챙겨 왔지요. 보통 출산 가방은 이동과 간수가 편리하도록 여행용 캐리어로 준비하는데, 당신이 챙겨 온 첫째 아이의 출산 가방에는 캐리어에도 넣지 못할 큰 물건에 들어가 있었어요. 바로 우리 집 침대에 있어야 할 나의 바디필로우요. 나의 키 만한 대형 바디필로우.


양수가 철철 흘러 바로 누워있기만 해야 하는 나에게 도무지 쓸모를 알 수 없는 바디필로우가 도착했습니다. 집에 가서 이것저것 챙기다가 내가 임신기간 내내 가장 애용하던 바디필로우가 보이길래 가지고 왔다고 했지요. 지금도 그 바디필로우가 좁은 분만대기실에 수줍게 다리를 꼬고 서 있던 장면을 떠올리면 너무 웃겨요. 이렇게 내가 두렵거나 걱정스러운 상황이 되었을 때 내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었어요. 가끔 그 선을 못 지키고 자꾸만 웃기는 바람에 내가 화를 내는 경우도 발생하지만요.


무엇이든 미리 준비해야 안심이 되는 나는 걱정까지도 미리 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나에 비해 여간해서는 내일의 걱정 없이 즐겁게 오늘을 사는 당신이 가끔은 미운 베짱이 같아요. 딩가딩가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베짱이처럼 당신은 눈앞의 집안일이 한가득 이어도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요. 그럼 그 집안일은 누구의 몫이냐 따지고 싶지만(실제로 따지고 들지만), 팍팍한 나의 일개미 같은 삶이 당신 덕분에 조금씩 빈틈이 생기고 있다고 좋게 생각해보겠어요. 고마워요.


그런 당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펑펑 울던 한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샤워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특정 리듬의 에코 사운드가 들리길래 무슨 노래를 저기서 또 부르고 있나 싶었어요.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당신의 눈이 새빨갛더라고요. 혹시 울었냐는 내 말에 당신은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지요. 좀 전에 같이 본 TV 프로그램에서 나온 한 할아버지의 임종 장면 때문인지 샤워하다가 갑자기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슬픈 일을 앞으로 4번이나 겪을걸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미어진다고 또 펑펑 울었지요. 그렇게 꺼이꺼이 통곡하는 다 큰 남자를 내 두 팔로 안아준 건 처음이었어요.


5  오늘을 떠올려봅니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리면 단연 그날의 우리 결혼식이 생각나요. 제대로 살을 빼지 못한 나는 돼지핏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했고, 결혼식 전날까지도 죽어라 연습했던  기타 연주가 실전에서 (예상대로) 무척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그날 정말 즐거웠어요. 그날은 우리의 날이었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마음대로 했던 우리의 . 우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까지 해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딩딩 딩딩딩딩- 나의 엉망진창 기타연주도 우리 부부가 평생 깔깔거릴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우리 친정 부모님은 결혼식 내내 울고 계셨지요.


결혼식 하루 전날, 먼저 일산에 올라온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내 딸 너무 예쁘다. 남 주기 아깝다."

엄마에게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어요. 상황에 따라 에둘러하는 말과 표정으로 나를 자랑스러워하든 안타까워하든 걱정하든 그런 엄마의 마음을 느껴왔는데, 나에 대한 사랑을 저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건 내 기억에 처음인 것 같아요.

"뭔 소린데. 주긴 누굴 주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딸은 이렇게 툭 대답하고 말았어요. 마음속으로는 결혼한다고 해서 원가족에게 소홀한 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자식 챙기느라 내 부모는 언제나 뒷전이네요. 칭얼거리는 애들 보거나 밥 차리기 바빠서 친정에서 온 전화는 대충 답하다가 서둘러 끊기 바쁩니다. 얼른 애들 챙기고 나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쉬길, 내가 어서 따끈한 밥 앞에 앉길 바라는 엄마는 그런 나보다 더 빨리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요. 내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내려보면 벌써 꺼져있거든요.


그나저나 우리는 참 좋은 계절에 결혼했네요. 하루가 다르게 색이 변하는 나뭇잎들은 나를 둘러싼 모두가 살아있는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줘요. 깊어가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곳에 닿을 수 있는 큰 나무가 되고 싶다가도 이내 작아져요.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본 푸른색의 아이슬란드 하늘과 닮아서 나를 작은 존재로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알려주거든요. 그리고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겨울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에 설레기도 하는 그런 계절, 가을이네요.


나는 아직도 우리가 '우리'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되었다'라고 결론짓기보다는 능동적으로 계속 굴러가는 관계이고 싶기 때문이에요. 당신도 잘 알다시피 능동적이고 온전한 스스로의 바퀴가 되기 위하여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그 모든 일을 가장 크게 응원해줘서 항상 고마워요. 세상 모두가 반대해도 당신이 응원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진짜 '우리'가 되는 거겠죠.


마지막으로,

자주 이기적으로 구는 나를 견뎌줘서 고맙고 미안합니다. 더 다정한 바퀴가 되도록 노력해볼게요.



사랑을 담아,

푸른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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